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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윤효 May 05. 2024

내 사랑, 고여사!

2. 고여사의 두번째 고향

인생의 산에 꽃이 찬란하게 필 무렵 꽃다운 나이 19살. 갑작스럽게 결혼한 그녀의 제2의 삶이 시작된 시점이다. 19살 나이는 1960년대에는 결혼할 나이에 손색이 없는 시대였다. 수반이라는 전라도 간전면에 있는 한 마을에서 태어난 그녀는 또래 여성보다 키가 컸다. 당시 164센티의 키는 아도 외할아버지의 유전자 때문일 것이다. 그 큰 키가 부끄러울 때가 있기도 한 한참 외모에 관심을 쏟기 시작한 시기였다.

<오른쪽- 엄마, 친구와 이종 당숙벌 아재와 함께>

마을 주위로 낮은 산들이 엄마 치마폭처럼 쌓여 포근한 느낌이 드는 동네가 수반이라는 마을이다. 딸 넷에 아들 3명의 그림은 당시의 가족 풍경에는 자연스러운 그림이었다. 오히려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부부라는 이름으로 나란히 서실 때 왠지 모를 부조화가 느껴졌을 것이다. 키가 180인 외할아버지와 150 정도인 외할머니의 신장 차이는 7명의 자식들과 옹기종기 화음을 마쳐가는 과정이 오히려 남의 이목을 더 집중시켰을 것 같다.


마을은 농사를 천직으로 여기며, 정직하고 소박하게 고만고만 사는 사람들끼리 살아가는 조용한 곳이다. 봄이면 산 지천에 피는 꽃들이 농사를 시작해야 하는 아낙과 농부들에게 농본 기를 알리는 조용한 환영식을 알리는 전령이 되었다. 지금도 가끔 가보는 수반이라는 동네는 수줍음이 많은 처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맘껏 드러내는 자태가 아니라 곱씹어 볼수록 예쁜 동네에 이제는 노인들만이 고향을 지켜내는 곳이 되어 버렸다. 홀로 사시고 계시는 외삼촌은 그래도 아직까지는 엄마에게 친정이라는 곳으로 남아 있다. 혼자 계시는 외삼촌을 위해 반찬을 싸서 가져다 드리는 엄마의 마음에서 느낄 수 있다. 그곳에 외삼촌이라도 계셔서 그녀의 친정이 존재한다는 안도감을 주는 건 아닐까.


 엄마의 어린 시절은 가끔 내 가슴을 아프게 한다. 다른 형제들은 초등학교를 다닐 수 있었지만, 또래에 비애 영리하고 키가 컸던 엄마는 할아버지를 도와 일을 해야 해서 학교에 보내 주시지 않으셨다고 했다. 엄마가 첫째도 아니고 셋째인데, 왜 유독 우리 엄마만 일을 시키고 학교도 보내주시지 않으셨는지 외할아버지에게 나도 모르게 서운한 마음이 있었다. 엄마는 살면서 남아 선호사상이 강하신 외할아버지 때문에 자신의 딸들에게는 절대 그런 감정을 느끼시지 않게 하시겠다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나와 언니는 단 한 번도 차별을 받는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물론, 언니는 첫째라 집안일을 제법 많이 했지만, 나는 서열상 넷째라 편안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작년 가족 모임에서 막내 외삼촌의 말을 통해 지금 하늘나라에서 조용하게 자식들을 내려다보고 계실 외할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9살 부모를 여의고 고모집에서 자란 외할아버지는 당시 27살이 돼서야 결혼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벌의 옷으로 사계절을 지내면서, 겨울이면 얇은 옷사이로 파고드는 바람을 맞고서 물을 길어 날랐던 그 시절이 외할아버지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셨다고 외삼촌이 들려주셨다.

먹고살기 힘든 시절이라 고모집에서 살면서 머슴처럼 살았을 외할버지에 대한 안쓰러움이 올라왔다. 외삼촌은 지금도 외할아버지의 눈물이 기억난다고 한다. 가마를 타고 시집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고 생전 처음으로 자신의 아버지의 눈물을 보셨다는 그 말에 묘한 위로감이 들었다. 엄마가 생각하시는 것보다 외할아버지는 엄마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하셨던 것이다. 제일 큰 외삼촌은 몸이 좋지 않아 다른 지방에서 요양을 해야 했고, 외할머니는 그런 아들을 위해 음식을 싸서 날랐고, 큰 이모는 키가 작아 당연히 셋째인 엄마가 외할아버지의 일을 도울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함부로 누군가를 비난해서는 안될 것 같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삶과 자신만의 역경을 겪어 왔기에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이웃마을 흥대리에는 흰모시를 즐겨 입으셨던 미래의 시아버지 될 어르신은 약주를 좋아하셨다고 한다. 흥대는 큰 개울물이 마을 중앙을 관통해 아랫동네 복기미까지 흘러내린다. 그래서 여름이면 개울물은 동네 아이들의 천연 놀이터 역할과 아낙 내들의 시집 살이 설움을 나누는 부녀자들의 수다 공간이 되었다. 물가에서 잡은 미꾸라지와 매기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몸보신이 되어 주었고, 가끔 만나는 오리알은 마치 황금알 같았을 것이다. 아주 어린 시절 물가에서 찾아낸 오리 알이 지금도 기억난다. 맑게 흘러내리는 물속에 어린아이 주먹만 한 크기의 하얀 오리알은 어린 내게는 벅찬 자연의 선물이 되었었다.


엄마의 결혼 이야기를 들으며 여러 부분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써가며 자료를 찾아보고 뜻을 알아가며 과거의 그녀를 만나는 상상을 해본다. 흑백사진 속에 엄마와 친구는 하얀 저고리에 댕기 머리를 하고 있는 수줍은 듯한 순한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었다. 부모라는 그늘은 어린 자식들에게 비빌 언덕이다. 사진 속 그녀의 해맑은 수줍음은 그래서 안정적으로 보인다. 


 그녀의 시아버지 즉 나의 친할아버지는 키가 크시고 흰색 모시 한복을 즐겨 입으셨다고 한다. 이상하게 결혼 전에 학원 운영을 하며 힘든 시기가 있었다. 한 번도 할아버지를 뵌 적이 없었는데 당시 꿈속에서 할아버지가 자신의 묘지 옆에서 여러 아이들과 함께 나란히 서 계시는 모습을 뵈었다. 어머님께 말씀드리니 그분이 나의 친할아버지 이신 것 같다고 하셨다. 한 번도 뵌 적이 없었기에 왜 내 꿈에 나타나셨는지 궁금했다. 사주나 점을 한 번씩 보시며 고단한 삶의 위안을 삼으시는 어머니는 이번에도 내 꿈속 이야기를 점쟁이에게 했더니, 묘지 옆에 묘목이 없어져버린 게 원인이라고 했다. 누군가 할아버지 묘 주위의 묘목을 잘라버려 아들 내들 모든 집에 한 가지씩 우환이 생겼다고 하셨다. 큰 아버지는 사다리에서 떨어지셔서 다리를 다치셨고우리 집은 내가 운영하던 학원 건물에 문제가 생겨 전세금도 받지 못한 상태로 쫓겨나는 상황이 되었었다. 그래서 집안 어르신들이 할아버지 산소에 가봤더니 누군가 묘목을 모두 배어가고 없었다고 한다. 그 이후 다시 묘목을 심으셨다.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늘 어머님이 말씀하시듯이 우리 조상들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그런지 왠지 모르게 경외감이 든다.


할아버지는 첫째 아들을 결혼시키고 함께 사시고 계셨고, 흥대 마을 중심을 흐르고 있는 개울 너머에 둘째 아들을 결혼시켜 정착하도록 하셨다. 외할아버지의 사촌 고모 딸이었던 둘째 며느리(내게는 작은 큰 엄마)가 그 성품이 너무 좋아 엄마와 할아버지의 셋째 아들인 아빠의 결혼을 성사시키고자 하셨다. 당시 할아버지는 자신의 건강이 긴 삶을 허락하지 않을 것을 직감하고 계셨고, 결혼을 빨리 시키기 위해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하셨다고 한다. 어느 날 아침 식사를 하고 계시던 작은 큰집으로 가서 '너희는 이 와중에 밥이 넘어가느냐'라고 호통을 치셨다고 한다. 


둘째 며느리에게 수반으로 넘어가서 결혼을 허락받기 전에는 집에 들어올 생각을 하지 말라고 엄명을 놓으셨다. 이제 갓 3살인 사촌 길영이 오빠를 등에 업고 아침 일찍 외가댁에 가서 통사정을 하셨다고 한다. '외삼촌, 한 번만 살려주세요. 저희 아버님이 결혼 허락 없이는 집으로 들어오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조카 한 번만 살려주세요.' 10월의 어느 날 조카며느리가 아들을 등에 업고 아침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통사정을 했지만 외할아버지는 단번에 허락을 하시지 않으셨다고 한다. 하지만, 하루의 해가 서서히 산 너머로 넘어갈 듯하자 아이를 업고 혼자 산을 넘어 다시 돌아가야 하는 조카를 생각해 반 승낙을 하셨다고 한다. 내 기억 속 외할아버지는 굉장히 큰 키에 무섭고 엄한 분이셨다. 반면 외할머니는 조용하시고 온순한 분이시라 그 큰 키의 외할아버지가 쏟아내는 화를 묵묵히 잘 받아 내시는 분이셨다. 아무리 엄하고 냉정하셔도 캄캄한 밤 산중을 조카며느리가 아이를 업고 홀로 넘게 하실 만큼은 아니셨다.


어린 시절 큰집에서 세배를 들이고 가족 모두 그 산을 넘어 외가댁으로 가는 길은 길고도 무서운 여정이었다. 어린 나의 걸음은 성큼성큼 앞서가는 부모님이나 언니, 오빠를 따라가기도 벅찾을 뿐만 아니라 사이사이 만나는 짙은 녹음이 무서웠었다. 호랑이도 나올 수 있다는 오빠들의 우스개 소리도 사실로 믿고 엄마 치마 자락을 꼭 붙들고 걷던 기억이 있다. 가끔 가시덤불이 한복 위에 입었던 코트에 붇기도 했고, 작은 계곡 아래 살 어름 아래로 졸졸 거리며 흘러가는 맑은 물소리는 음악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 험한 길을 작은 큰 엄마는 신나는 걸음으로 흥대에 가서 할아버지께 의기양양하게 알리 셨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다음날 새벽에 한동 아주머니를 외가댁으로 '사성'을 들려 보내셨다. 당시 결혼 풍습 중 하나가 사성을 신부댁에 주고 가면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해야 했다고 한다. 이른 새벽 외가댁의 양철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 보니 '사성'을 마당에 던져놓고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고 도망치듯이 사라지셨다고 한다. 결국, 20일 동짓달에 엄마, 아빠의 결혼 날짜를 잡고서야 할아버지는 세상의 마지막 숙제를 끝내고 삶의 무대 막을 내리셨다고 한다. 자신의 죽음 전에 셋째 아들까지라도 장가를 보내고자 하셨던 할아버지의 노력이 느껴졌다. 당시의 삶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배고픔이 일상이었고 가난이라는 이름이 늘 주위를 맴도는 인생 앞에서 앞날에 대한 기대나 미래에 대한 소망은 그저 소박할 뿐이었으리라.


결혼 준비를 위해 이불을 꿔 매고 있던 어머니 댁에 당숙모가 헐레벌떡 뛰어 오셔서 잔잔한 호수에 돌 던지듯이 시아버지 되실 분이 돌아가셨다고 알리셨다. 그러나 정해진 결혼은 미룰 수는 없었기에 할아버지 돌아가신 삼오 날에 엄마, 아빠는 예정대로 혼사를 치렀다고 한다. 단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빠는 가마를 탈 수 없어 걸었고, 엄마 또한 외가댁에서 절반만 가마를 타고 오다가 중간에 내려 걸어서 흥대로 가셨다고 한다. 엄마의 빛바랜 결혼사진을 보니 머리에는 서양식의 꽃이 달린 화관을 쓰고 계셨고 위아래로 흰 한복을 웨딩드레스처럼 입고 계셨다. 아버지는 큰 키에 까만 양복을 입고 계셨고 두 분 모두 경직된 신랑 신부의 모습이 사진 속에서도 희미하게 드러나있다.


당시 부모상을 당하면 집안에 영을 모셔두고 석 달 동안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차려두고 울어야 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밥상에 할아버지의 담배대를 올려두고 세 며느리가 소복을 입고 우는 풍경이 상상을 하면 왠지 낯설다. 시집에서 낯선 사람과 어울려 살아야 하는 설움과 아직은 정이 들지 않은 남편 덕분에 엄마는 그 곡 소리가 오히려 위안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서서히 익숙해지고 남편과 정이 들자 아침마다 우는 일이 힘들기 시작하셨다고 한다. 어느 날 세 동서가 절하다가 머리를 함께 부딪쳐서 자신들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울다가 웃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자 종순이 고모가 문을 열고 쫓아와서 나무라던 이야기를 하시면서도 어제 일이라도 되는 듯이 엄마는 깔깔거리시며 웃으셨다.


당시 친할머니는 첫 부인을 병으로 잃은 할아버지의 둘째 부인으로 약간은 모자란 듯하신 분이셨다고 한다. 첫 부인의 자식들은 할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우리의 가족 역사에서 같이 사라진 것 같다. 어려서 어렴풋이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해하기 어려웠고, 실제 한 번도 뵌 적이 없기에 존재 자체를 잊었었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어렴풋하게 어릴 적 기억의 창고 속에서 빛바랜 장난감처럼 먼지를 털고 다시 존재를 끌어올려 본다.


할머니는 5남 2녀를 마치 고아원 아이들처럼 키우셨다고 한다. 한 바가지안에 밥과 김치를 비벼 숟가락만 꽂아 두면 아이들이 서로 머를 부딪치면서 숟가락 하나로 바가지의 밥을 서로 더 먹기 위해 아침저녁의 소란한 풍경을 만들어 내었다고 한다. 그런 가정교육 때문에 밥상에 대한 생각이 여전히 엄마와 아빠의 작은 갈등의 소재가 된다. 엄마는 잘 차려서 건강한 음식을 느긋하게 드셔야 한다는 생각인 반면 아빠는 간단하게 한두 가지만 빨리 먹자는 식이다. 종종 엄마가 밥을 두세술 정도 뜨고 있을 때 아빠는 다 드시고 혼자 일어나시는 것이다.


친할머니는 아이들에게 가정교육을 전혀 시키시지 않았고, 방치하는 형태로 자식을 키우다 보니 생활 습관의 차이로 여전히 아빠는 엄마의 잔소리를 들으신다. 정리 정돈을 해야 한다는 엄마와 보이는 곳에 그냥 두어야 한다는 아빠의 편리 주의가 노년인 지금까지도 서로의 신경을 건드리시는 것을 보니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옛 우리말의 속담이 꼭 맞는 것 같다. 


당시 새색시들은 흰색 면의 옷 가리개에 수를 나아 시집으로 가져가 살림을 시작한다고 한다. 옷 가리개는 벽에 걸린 옷들을 감추기 위해 그 옷 위로 치는 천을 말한다. 그리고 그 천 옆으로 희고 깨끗한 수건들도 함께 걸어 두었다고 하셨다. 대가족과 지내다 보니 자신만의 신혼방은 새색시에게는 소중한 공간이었으리라. 유일하게 허락된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는 그 공간에 대한 애정은 남달랐을 것이다.


가끔 고모는 승환이 오빠를 등에 업고 신혼방에 들어와 어린 조카의 콧물이 흐르면 손으로 닦아 흰 면옷가리개나 장롱에 쓰윽 닦아 버리는 것을 보고 엄마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 장면을 아직 까지도 생생하게 이야기하신다. 


제일 첫째 큰 아버지를 우리는 큰 큰아버지라 불렀다. 그의 첫째 부인이 2남 1녀를 두고 지병으로 돌아가시자 큰 큰아버지는 다시 재혼하셔서 1남 3녀를 낳으셨다. 현재의 큰 큰 어머니는 배다른 자식에 대한 차별 때문에 가끔 어린 나에게도 친척들이 수근 되었던 기억이 있다. 그중 둘째인 승환이 오빠를 아직 결혼하지 않은 종순이 고모가 업고 다니는 이유는 엄마 없는 어린 조카에 대한 안쓰러움이었을 것이다. 작은 큰 엄마(두 번째 큰 엄마를 우리는 이렇게 불렀다)는 자신 또한 아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큰 큰엄마가 전 처의 자식 3명을 함께 키우기는 어려우실 것 같아 막내딸인 순남이 언니를 데려가 딸처럼 키우 셨다고 한다. 그 언니는 좋은 신랑 만나 부유하게 잘 살고 있어 작은 큰 엄마에게 여전히 효도하는 딸이다. 살림이 넉넉해 차를 세로 장만할 때는 자신이 타던 차를 동생들에게 그냥 주기도 하고 작은 큰 어머님과 작은 아버님께는 톡톡히 장녀 역할을 하신다고 들었다.


꽃 치매에 때문에 우람하고 강하셨던 작은 아버지는 여자처럼 고분고분 해지셔서 작은 큰어님과 잘 맞는 노년의 친구 셨다. 하지만, 이른 아침 고사리를 끊고 오시던 길에 집 앞에서 작은 큰어머님은 내리시고, 작은 큰 아버님 혼자 주차를 시도하시다가 집 앞 개울가로 용달차가 급발진하면서 세상과 뜻하지 않게 작별하셨다. 작은 어머님이 그날  새벽 자신이 고사리를 끈으로 가자고 하지만 않았더라도 작은 아버지가 더 오래 사셨을 것이라고 후회의 말을 엄마께 하소연하던 이야기를 들었다. 


어릴 적 작은 큰 아버지는 유난히 키가 크셨고, 조금은 무서운 인상이었지만 조카들에게 명절 때마다 넉넉히 용돈을 주셨던 분이셨다. 세월이 지나고 뒤돌아 보면 삶의 소중한 순간은 종종 먼지에 싸여 망각으로 사라져 버린다. 먼지 낀 가구를 닦아내듯이 한 번씩 그 소중한 추억을 잘 닦아 현재로 초대해 보면, 존재하는 현재에 더욱 집중해서 살아야 그 기억들이 또 다른 미래를 만들어 낼 수 있음을 느낀다. 세상 만물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수시로 변하는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을 지키고 자식들을 잘 키워내기 위한 인내와 견딤은 노년의 행복의 꽃으로 피어나기도 하지만 자칫 이른 봄에 먼저 핀 꽃이 물러간 줄 알았던 동장군의 등장으로 사라지기도 한다. 마치 인생도 이와 같다. 자신의 삶에서 최선을 다해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어 주느라 어느덧 자신의 삶을 사는 법을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가 있다. 마침내 자신답게 살고자 알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자신만의 삶을 사는 법을 알 것 같을 때 심술궂은 운명의 장난이 시작될 수도 있다. 


당시의 삶은 큰 통속에 있는 요란한 그릇들의 합주 같다. 조그마한 동네에 혈연들이 가까이 살며 인생의 희로애락이 합주가 되어 삶의 노래를 그려내는 풍경이 상상이 된다. 한 집에 할머니, 큰 큰아버지 내외와 아이들 그리고 결혼하지 않은 2명의 종순이, 삼순이 고모와 3명의 순봉이, 종실이, 종천이 삼촌들이 신혼의 엄마에게는 모두 타인으로 시작했다가 시간의 흐름을 타고 서서히 가족으로 변하는 시간을 가지셨을 것이다. 순봉이라는 삼촌의 이름은 돌림자에서 제외된 이유가 할머니의 자식이 아니라 할아버지 전처의 자식이라 이름도 다르다. 그분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 순간 가족의 대화에서 사라졌기에 나의 기억 속에서도 이름만 남아 있을 뿐이다. 


결혼하며 시아버지상을 치렀기에 엄마는 3년 가까이를 흰 치마저고리를 입고 계셨다. 매일 아궁이에 불을 때어서 생활하는 환경에서 흰 옷은 또 다른 가사 노동이 되셨다고 한다. 한 겨울에 결혼한 새 며느리가 흰 치마저고리를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차가운 겨울 개울가에 수시로 손을 담갔을 것이다.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셔서 머리도 못 자르고 시집와서도 댕기 머리로 생활했어야 했다고 한다. 당시 결혼 전의 여자들은 머리를 하나로 묶어 땋아  뒤까지 길게 늘어 트려 처녀임을 나타냈다. 그리고 결혼 후에는 머리카락을 자르고 파마를 했다고 한다. 소위 우리가 말하는 '아줌마 파마'가 그 당시 유행했던 스타일이었단다. 결혼은 했지만 시아버지를 먼저 보낸 불효자식이라 차마 머리를 자르지 못하고 처녀처럼 그렇게 오랜 기간 댕기머리를 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엄마는 새로운 가족과 조화를 이루기 위한 화음을 2년 동아 해오시다가 언니를 임신한 후에 그 동네 길가 집에 독립을 하게 되셨다고 한다. 당시 돈으로 4만 원인 길가 집은 방한칸에 부엌 하나였다고 한다. 큰 큰아버지가 2만 원, 작은 큰 아버지가 1만 원 그리고 아빠가 1만 원을 내서 엄마 아빠의 작지만 소중한 공간을 만들어 새로운 삶의 독주를 시작하셨다. 아빠의 성품은 욕심이 없으셔서 자신의 몫에 대해 형님들에게 더 요구를 하시지도 않으셨다고 한다. 제일 큰 큰 아버지는 23마지기의 땅을, 작은 큰 아버지는 13마지기의 땅을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으셨으나 아버지는 1마지기 반을 받아 결혼 생활을 시작하시게 된 것이다. 그나마 결혼 전에 아버지 스스로 마련한 땅조차 큰집 소유가 되어도 말한 마디 하시지 않으셨다고 하니 본의 아니게 어머니가 생활력이 강해지실 수밖에 없으셨다. 


결혼 후 독립한 어머니는 풍족한 큰집들에 비해 생활이 막막한 상황을 최대한 빨리 벗어나고 싶으셨다고 한다. 언니를 낳자마자 산후조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에서 산에서 밭을 홀로 만드셨다고 한다. 자신 소유의 땅을 만들기 위해 흙을 파고 돌을 골라 젓먹이를 집에 홀로 두고 출산 후 이레(일곱 날)부터 산으로 올라가셨다고 한다. 산을 올라가 일하다가 젓먹일 시간이 되면 내려와 젖을 먹이고 다시 홀로 산을 향해 오르셨다고 하니 21살의 여린 젊은 처녀가 강한 어머니가 되기 위한 삶의 전주곡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게 어렵게 만들어 둔 밭에 할머니가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생땅에 깨가 잘 된다고 어머니가 손으로 개간해 둔 밭에 3분의 2 정도를 깨를 뿌리고 가셨다니 얼마나 힘이 빠지셨을까.


살림살이에 관심이 없으셨고, 일 또한 욕심을 부리시지 않는 아버지의 성향은 어머니를 더욱 강하게 만드셨을 것이다. 당시 불을 때서 난방을 유지하던 살림 구조라 남편들은 산에 가서 땔감을 구해 집안 구석에 쌓아 두는 역할을 당담하고 아낙은 그 땔감으로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하고 방을 따뜻하게 하는 일을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늘 미리 땔감을 마련해 두지 않으시고 다 떨어져야 산에 가서 나무를 해왔다고 한다. 그것도 나무에 가시가 잔뜩 달린 잔가지들을 부엌 옆에 던져 놓으시면 엄마는 손을 조심해서 그 나무들을 아궁이에 던져 넣으셨다. 작은 큰집의 머슴이던 14살짜리 성호가 그런 모습을 보고 어머니에게 “길영이 작은 아버지는 작은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으신가 봐요. 불 때다가 손 찔리면 어쩔라고 저런 나무를 해다 준다요? 나는 결혼하면 절대 그렇게 안 할 기예요.”라고 하더란다. 어린 머슴의 눈에도 아버지의 새신부에 대한 배려 없음이 눈에 보였나 보다. 어떻게 사람을 배려하고 존중해야 할지를 모르는 아버지를 한평생 반려자로 참고 살아 낸 어머니께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든다. 


그렇게 시집의 낯선 문화를 몸으로 체험하며 엄마의 고난한 제2의 고향 생활이 시작되었다. 누구나 고만 고만 살던 시절 손에 든 것은 없고, 가진 욕심은 컸던 엄마의 젊은 시절은 머리 끈 질끈 동여 메고쉼 없이 홀로 달려가는 인생 마라톤의 시작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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