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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윤효 May 12. 2024

내 사랑, 고여사!

3. 병든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모곡

첫딸의 재롱이 예쁜지도 모르고 삶의 터전에 정신없이 뛰고 있던 그녀에게 아들이 찾아왔다. 동서간에 한 마을에 모여 살고 비슷한 시기에 아이들을 낳다 보니지금처럼 오로시 사랑을 독차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대신 고만 고만한 아이들끼리 친구가 되고 할머니와 아빠 형제들의 가족들과 조금 더 큰 가족구성원들 속에서 좀 더 큰 세상을 맛보았을 것이다.


할머니는 조 씨 집안에 후처로 들어와 살림을 살기 시작하셨지만 일반인과 약간은 다른 모자람이 있었다고 하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신발의 왼쪽, 오른쪽을 구분하시지 못하셨다고 하니 며느리들에게 시어머니로써의 권위나 잔소리를 쏟아내실 수 없으셨던 것이다. 그저 집안의 어른으로 조용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만 도와주셨던 것 같다.


할머니는 내 것, 네 것이 없었고, 주변에 가난한 사람들이 찾아오면 창고에 열쇠를 풀어 아까운 것 없이 퍼주셨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동네를 방문하던 장사꾼들은 가장 먼저 들르는 곳이 큰 아버지와 큰 어머니, 할머니가 사시는 곳이었다고 한다. 인심도 후하고 잘하면 한 끼 식사도 제공받으니 이곳저곳 발품을 팔아 하루살이처럼 살아가는 분들에게는 요즘의 휴게소 같은 역할을 하는 할머니 집을 방문하는 게 당연했을 것이다. 동네의 가난한 집에다 수시로 쌀이며 보리를 퍼다 주는 할머니 때문에 큰어머니는 창고 열쇠를 자신이 들고 다니셨다고 한다. 가끔 엄마가 과거를 이야기면서 들려주시는 이야기가 있다. 그때 당시 할머니가 베푼 선행이 자들의 복으로 돌아와 모든 형제들이 잘 살고번창하게 해 준 원동력이 된 것 같다는 것이다.


시골의 일상은 항상 바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소먹일 죽을 쑤고, 한 여름의 경우 더위를 피하기 위해 새벽부터 밭이든 논이든 어른들은 일터로 향다. 그 여름날도 다른 날과 마찬 가지로 어른 들은 일찍 밭에 가서 일을 하기 시작했고, 아이들은 할머니와 함께 텅 빈집을 지키는 나날 중 하루였다. 할머니는 당신의 손자, 손녀를 돌보는 역할을 하고 계셨다. 날이 더워 물통에 물을 가득 담아두고 대청마루에 더운 줄도 모르고 놀고 있는 손자, 손녀들 중에 이제 갓돌을 지난 오빠의 옷을 다 벗기고 물에 담갔다가 마루에 눕혀두시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할머니의 집은 동네에서도 조금은 언덕진 곳에 자리 잡고 있어 마루 뒤에서 부는 산바람이 마치 선풍기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한다. 날씨가 더우니 가장 어린 오빠를 물속에 담갔다가 빼고 산바람을 쏘이게 하셨던 할머니의 행동이 얼마나 큰 재앙을 부르는 행동이었는지를 모르셨던 것이다.


일터에서 돌아온 엄마는 저녁이 되자 큰 오빠의 몸이 불덩이처럼 타오르는 것을 느끼셨다고 한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이미 팔과 다리는 마치 오징어 다리처럼 흐느적거리는 아들을 붙잡고 뜬눈으로 밤을 새우셨다고 한다. 다음날 읍내 병원을 찾아갔으나 의사는 이미 늦었다고 더 큰 병원에 가서 도움을 요청하라고 했다. 자신의 품속에서 고개조차 들 수 없었던 아들을 품에 앉고 큰 병원을 향했던 엄마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가늠이 된다. 심장 한 중앙을 누가 날카로운 칼로 찌르는 듯한 그 깊은 고통을 가지고 엄마는 순천 병원에서 오빠가 나아지기를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 하셨을까.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을 수 없어 3일을 품에 앉고 계셨다고 한다. 당연히 자신의 식사는 생각하지도 못하셨다고 한다. 함께 입원한 환자의 보호자가 엄마를 보고 '이러다가는 새댁이 먼저 죽겠네. 내가 아이 안고 있을 테니 이거 한 그릇 잡수시오'라고 말하며 내민 짜장인지 짬뽕인지를 드시면서 그 낯선 사람의 은혜가 지금까지도 가슴에 남아 있다고 하신다. 연락처라도 안다면 그분이 베푸신 호의를 보답하고 싶다고 종종 이야기하셨다.


큰 병원에서 조차 오빠를 포기했고, 태원을 권유받은 엄마는 세상 사람 모두가 포기해도, 자신은 아들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결심을 하셨다고 한다. 그때부터 시작된 엄마의 긴 여정은 마치 수행자의 수행길 같다. 아이를 살리기 위해 13번의 내림굿을 동원했고, 절에서는 3,000배로 신에게 온몸을 다 바쳐 간청을 드리셨다. '이 아이만 살려주십시오. 그 어떠 것도 제가 다 받을 테니 부디 이 아이만 살려주십시오.' 3,000배를 수시로 올리면서 온다리로 설 수 없을 만큼 되어도 아이 살릴 생각에 자신의 몸 고통은 아무렇지도 않게 느끼셨다고 한다. 엄마 나이 21살 그 꼿다운 나이에 인생의 모든 짐을 과감하게 들어낸 그녀의 강인함이 참으로 존경스럽다.


1년이 넘는 세월 동안 병원에서도 포기한 아들을 데리고 좋다는 명의를 찾아다니신 엄마의 심정이 느껴진다. 그래도 엄마는 가끔 이야기하신다. 아들을 살리려고 집안일은 신경도 쓰지 못하는 아내에게 아빠는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으셔서 그나마 마음 편하게 아이를 살려내기 위한 그녀만의 몰입이 가능했다고. 아들에 대한 그 각별한 그녀만의 노력은 그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아이를 품에 안고 자신의 신체의 일부처럼 미신이든 의약이든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인 그녀에게 오빠의 몸은 조금씩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손과 팔에 힘이 조금씩 들어가고 못 가누던 고개를 혼자 힘으로 들어 올리는 행동은 엄마의 노력에 대한 오빠의 작은 응원 같았을 것이다. 


당시를 돌아보니 오빠는 소아마비나 장티푸스의 일종이었던 것 같다. 먹고살기 힘든 시절 큰 병원에서 오랫동안 입원할 수도 없었고, 단지 할 수 있는 일이란 인간 세계 너머에 있는 그 기적을 맹목적으로 믿는 일 밖에 없었을 것이다. 엄마의 기도는 그때부터 더 간절해지셨고 평생을 지키고 계시는 습관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시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주방에 하얀 그릇에 물 한잔 떠 놓고두 손 모아 중얼거리면서 기도를 하신다. 어린 시절 엄마의 기도 모습을 종종 보면서 내 마음속에 자리 잡은 믿음이 생겼다. 신을 간절하게 믿지는 않지만 엄마의 기도는 믿음이 간다.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마음 한 곳에서는 자식들 잘되라고 매일 기도하시는 그녀의 믿음이 나를 지켜 줄 것이라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부터 엄마처럼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하루의 시작을 기도로 열기 시작했다. 부모의 간절한 기도는 아무리 거리가 멀어도 자식을 보호해 주는 보호막이 될 것이라는 것을 피부로 느끼기 때문이다. 


 오빠가 서서히 건강해지기 시작했지만 엄마의 노력은 멈추지 않았다. 그 어려운 살림에도 매일 간 쇠고기를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오빠 밥에만 몰래 넣어 먹였다고 한다. 가끔 작은 오빠가 그런 엄마를 보며 어린 시절에는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꿀이 몸에 좋다고 매일 새벽이면 큰오빠에게 먹였던 그런 정성들이 다른 형제들 눈에는 엄마의 편애로 느껴졌을 것이다. 작은 오빠 또한 부모가 되면서,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무엇이든 잘 먹는 큰딸 주영이와 먹는 속도가 느린 남동생 정빈이와 함께 쇠고기를 먹게 되면, 부모로서 마음이 쓰여 오빠는 자신도 모르게 자꾸 정빈이의 밥그릇에 쇠고기를 부지런히 올려 주게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오빠는 옛날 자신의 어머니가 왜 큰 아들 밥을 따로 챙기고 더 먹이려고 했었는지 이해가 되었다고 한다. 그때 못 먹었던 꿀이 못내 아쉬운지 새벽이면 작은 오빠는 꿀 한술을 크게 떠서 먹는다고 한다. 재미있는 건 곤히 잠든 아들 정빈이를 깨워서 꿀한술을 떠먹인다고 한다. 조카는 유순하게 오빠의 요청을 들어주는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다. 인품의 폭이 넓은 작은 오빠를 닮아 정빈이는 싫은 내색 없이 아빠를 이해하는 마음으로 넙죽 받아먹고 다시 잔다고 한다. 다행스러운 건 지금은 정빈이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기 때문에 오빠의 그 달달한 고문을 받아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엄마의 자식 사랑은 남다르다. 그녀만의 육아를 가만히 돌아보면 지혜롭기 그지없다. 초등학교 때 한두 살씩 차이나는 언니 오빠는 성적표를 받아오면 엄마의 시상이 있었다. 3명의 성적을 보고, 1등에게는 달걀 3개, 2등에게는 달걀 2개, 그리고 3등은 달걀 1개로 포상을 내리셨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공부를 하게 하는 동기부여 덕분에 생활이 풍족했던 큰집, 작은 큰집 아이들보다 언니, 오빠는 공부를 잘해 엄마의 자부심이 되었다고 한다.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았지만 엄마는 스스로 독학해서 한글을 읽을 수 있으셨고, 심지어 엄마 친구들 중에서 제일 먼저 운전면허를 따고 아직까지 운전을 잘하고 다니신다. 운전면허 시험도 성적이 우수해서, 조카뻘 대는 며느리가 왜 우리 집 애들이 공부를 잘하는지 알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아빠는 동의하시지 않으시겠지만, 우리 오남매 모두가 엄마 머리를 닮아서라고 하는 이야기를 했다고 하니 엄마 마음이 얼마나 뿌듯했을지 이해가 간다.


큰 오빠를 잘 키워내기 위한 그녀만의 강단도 대단하다. 어려서 아픈 이력이 오빠의 몸에 흔적으로 남아있다. 어린 시절 언니와 오빠들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오빠의 한쪽 어깨는 들려있고, 유난히 목이 가늘어 보여 약해 보이는 인상이다. 방위를 받으면서 성적표를 제출해야 하는 상황이 생겼었는데, 그의 초등학교 성적은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모두 '수'로 장식되어 있다. 


당시에는 신년이 되면 가족들의 사주나 인생상담을 위해 점쟁이를 찾아가는 일이 많았다. 큰 오빠가 생명이 위태로울 만큼 아팠던 과거 경험까지 맞춘 점쟁이의 말이 당연 엄마에게는 큰 믿음을 주었을 것이다. 엄마와 오빠가 떨어져 살아야 큰 오빠가 성공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그녀는 과감하게 결정한다. 부산에서 살고 있는 이모 옆으로 큰 오빠를 보내기로 결심하신 것이다. 몸은 약하지만 공부를 잘하는 아들이 엄마와 떨어 지내야 성공한다는 그 말에 6학년 밖에 안 된 그 소중한 아들을 타향으로 보내신 결단력을 보이신다. 객지에서 공부하던 큰 오빠가 어찌 공부를 소홀히 할 수 있었을까. 엄마의 그런 열망을 잘 알고 있었기에 공부도 잘했고, 좋은 대학을 나와 지금은 대기업 임원을 하고 있으니 엄마의 그 열정이 오빠의 삶에 큰 영향을 준 건 틀림없다.


온통 큰 아들에게 정신이 쏠려 있는 상황에서 언니나 작은 오빠는 나름대로 살아내는 방법을 터득한 것 같다. 언니는 큰 오빠 때문에 엄마의 젓을 제대로 얻어먹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언니는 엄마의 젓이 그리우면 잘 걷지도 못하면서도 돌담 벽을 짚고 윗집 아주머니를 찾아가 젓을 얻어먹고 왔다고 한다. 같은 시기에 아이를 낳아 젓이 풍족한 이웃 아주머니는 젓을 찾아온 어린 꼬마 손님에게 늘 후한 대접을 했다고 하니, 시골동네의 그 따뜻한 인간미가 지금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언니 또한 어린 시절부터 너무 일찍 어른의 역할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초등 2학년때부터 식구들 밥을 안쳤고, 소먹일 물을 개울에서 떠 오는 역할까지 담당했다는 말을 들으면 조금 미안해진다. 나는 아직도 받기만 하는 동생인데, 그때부터 언니는 엄마의 역할을 다른 형제에게도 해야 한다는 그 의무감을 가지게 된 것 같다. 언니는 아직도 엄마처럼 살갑게 동생들을 챙긴다. 아직 어른이 아닌 어린 자식에게 까지 도움의 손길이 필요했던 엄마의 삶은 전쟁을 준비하는 장군 같다. 진두 지휘하는 장군이 각개의 병사들에게 역할을 주고 자신은 선두에 서서 적진을 향해 돌격하는 모습 같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진학할 나이가 되자, 언니는 엄마의 요청대로 부산에서 학교를 다니게 된다. 한 살밖에 차이는 나지 않지만, 언니는 공부하면서 동생을 엄마처럼 챙겨야 할 의무를 가지고 부산으로 파병된 것이다. 이모집과 같은 동네에서 자취를 하면서 언니는 엄마의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오빠가 대학에 가야 하기 때문에, 언니는 인문계가 아닌 실업계 고등학교를 가야 했다. 공부하면서 아침, 점심 그리고 저녁 식사까지 준비하고, 집안 청소에 빨래까지 해낸 언니는 엄마의 오른손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형제가 많아 언니의 희생은 불가피했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지역감정이 한창이던 때에, 촌티를 벗어나지 못하는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언니가 학교생활에서 겪었던 열등감과 소외감은 참으로 컸을 것 같다. 공부는 못해도 잘 사는 아이들이 반에 많다 보니, 당시 유행하던 브랜드옷을 입고, 부모에게 투정을 쏟아내도 되는 안락한 환경의 반 친구들이 부러웠을 것 같다. 다행히, 언니는 그 와중에서도 공부를 잘해 반에서 1,2등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구들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두 남매가 타향에서 자신들이 해낼 수 있는 역량의 일번으로 공부를 선택한 것은 아마도 엄마의 그 기도 덕분인 것 같다. 몸이 약한 큰 오빠는 중, 고등 6년 동안 규칙적인 공부생활을 실천했다고 한다. 1년 365일 저녁 11시 취침, 아침 6시 기상을 생활 패턴으로 만들어 규칙적인 공부 습관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그렇게 공부를 우선순위로 꾸준하게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엄마의 기도라는 생각이 든다. 공부를 위해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 두 자식들에게 매번 시골에서 나는 곡물을 보내시고, 어느덧 두 집 살림이 된 생활의 무게는 그녀의 또 다른 운명이었다. 


 이모가 근처에 살고 있어서 도시생활을 하는 남매에 대한 불안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내려 두셨을 것이다. 그녀는 분기별로 자식들이 먹어야 하는 양식과 각종 식자재를 부산으로 보내셨다. 엄마의 그 애살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자식들이 빨리 일어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수확철이 다가오면 다섯 자식들의 집으로 배달되는 택배는 아마 엄마 말씀처럼 태산을 쌓고도 남을 만큼이었으리라.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라는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의 어머니가 자식들을 위한 그 애정들이 우리 엄마와 너무도 닮아 깜짝 놀랐다. 저자는 어떻게 그런 인물 묘사를 생동감 있게 그려냈을까. 자신의 몸을 촛불처럼 태워 자식들에게 주고자 하는 그 마음이 자식들에게도 전달되는 것 같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삶의 불꽃이 흔들릴 때, 엄마라는 가장 큰 산이 그 바람을 막았고, 다시 살아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낸 과정은 여전히 우리 가족에는 역경을 극복한 희망의 역사가 되었다. 큰 오빠가 ‘엄마, 덕분에 제가 살았습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엄마가 느꼈을 그 감동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것이다. 삶은 이렇게 위기와 역경이 함께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여행이다. 인생의 여정에서 우리는 꽃길도 만나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빗속에서 온몸으로 견뎌내는 시간도 만날 것이며, 예기치 않은 이별도 있을 것이다. 단지, 그 과정에서, 대장간의 대장장이처럼 불에 달궈진 쇠를 두드리고 다지고, 식혀 마음의 끌을 강하게 만들어 낼 줄 아는 지혜를 얻어 가는 것이 인생 아닐까.


<막내 동생이 태어 나기 전, 학교 운동회가 마을 주민 잔치가 되던 시절... >

<부산에서 큰 오빠는 홀로 공부하고, 남은 식구들 끼리 집 우물옆에서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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