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 스토리가 없다면, 밋밋한 음식처럼 기억에 남지 않는다. 같은 여행,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을 보내고도 누군가는 온 마음이 열려, 기억하고, 사색하고 그리고 기록에 남긴다. 그래서 그 지나온 길이 제법 멋스러워진다. 저자의 책이 내게는 두 번째다. <한 번의 작은 생애>가 아일랜드에서 보냈던 9개월 간의 캠프힐에 대한 이야기라면, 이번 편은 캠프힐 후 3개월 동안 유럽을 여행한 이야기다.
저자의 책은 사람을 만나는 여행 같다. 각자의 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다리를 놓고 조용하게 두드려 방문하고 서로의 마음을 읽어내고 웃고 감동하는 이야기다. 말로 이루어지는 소통이 아니라 마음으로 이루어지는 대화를 통해, 여행의 참 의미는 내 안의 나를 꺼내 낯선 상대의 마음과 함께 나누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신이 나와 다르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도, 당신 역시 귀한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주체임을 인정하고 나니, 역으로 내 삶이 존중받는 곳이었다.’ 캠프힐을 경험하고 싶다. 그리고 저자가 만났을 그 울퉁불퉁한 낯선 감정들을 꿈꿔본다.
책은 10년 전, <이런 여행 뭐, 어때서>로 출간된 책을 다시 작가의 손끝으로 써내려 간 글이다. 10년이 훌쩍 지났던 여행도 곱씹을 수록 더 가치가 발휘되는 그 경험은 가장 소중한 인생의 보물일 것 같다. 소유가 아닌 특정한 경험과 사람들을 소중한 보물 꺼내 놓듯이 써낸 책이다.
한 미국인이 경비절약을 위해 아이슬란드 1500명 대학생에게 집을 여행자에게 무료로제 공할 수 있는지 메일을 보냈고, 50명의 사람들이 긍정의 답변을 보내와서 시작된 여행방식(Couch Surfing카우치 서핑)이다. 자신의 집을 제공하는 사람을 호스트(Host)라 칭하고, 그 집에 머 무루는 여행자를 서퍼(Surfer)라고 부른다. 저자는 캠프힐에서 만난 사람들의 가족이나 고향을 방문하기도 했지만, 카우치 서핑 방식으로 여행을 했다. 지구촌에는 이렇게 마음만으로도 여행을 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게 신기하다. 당연히 돈을 주고, 숙소를 구하는 것이 여행이라 생각했다. 가난한 여행자를 위해 자신의 집을 제공하는 사람도, 그리고 그 집을 찾아 나서는 사람도 어떻게 보면 마음의 빗장이 낮은 사람들이다. 삶을 경계의 눈초리가 아닌 호기심의 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생은 이렇게 멋진 화음을 쏟아낸다.
벨기에에서의 첫 카우치 서핑은 부드럽게 여행의 시작을 알린다. 4개의 아파트가 하나의 정원을 가운데 두고, 아담하게 살아가는 그들의 여유로운 삶이 보인다. 캠프힐에서 만난 크리오 친구인 루돌프가 살고 있는 삶으로 들어간 저자는 마치 마음 가까운 친척집에서 생활하는 느낌을 받았을 것 같다. 음악과 미술을 알고, 낯선 이를 위해 맛있는 음식을 해주는 루돌프 씨의 그 마음을 마음껏 받아들인 경험은 절대 잊히지 않은 경험이었으리라. 책의 후반부에 루돌프의 암투병과 그리고 다시 만난 경험은 따뜻한 물이 담기 대야 속에 오랫동안 얼었던 발을 담근 기분을 준다.
체코 농부의 집은 캠프힐에서 만난 이바네의 집이다. 그곳의 풍경이 아니라 가족이 사진을 차지하고 있다. 여행의 목적이 장소가 아니라 좋은 사람을 만나기 위한 과정일 수 있다는 생각을 준다. 애플 스트루를 잘 만든 체코인 싱글맘 리타는 캠프힐에서 만난 사람이다. 두 아이의 엄마지만, 삶을 멋스럽게 장식해 낼 수 있는 사람 같다. 깔끔하게 차려진 그녀의 식탁과 애플 스트루트는 보는 독자의 마음까지 전해져 온다. 삶을 아름답게 누리고 싶다면, 생활의 각 영역에서 나를 위한 또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아름다운 것들로 채우는 것이다. 꽃이 꽂혀 있고, 단순하지만, 정성이 들어간 음식과 단정한 그릇과 포크와 수프는 삶에 대한 존중이 들어가 있다.
여행을 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읽어내는 여정도 저자는 스스럼없이 드러낸다. ‘나를 해고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 강하게 기억에 남는 문구다. 미국과 한국의 거리만큼 벌어져 버린 남편과의 헤어짐에 대한 기억을 먼지 쌓인 가구를 털어내듯 그렇게 털어낸다. ‘좁은 두 마음이 감당하기에는 거리와 시간이 너무 버거웠다..... 남의 인생에 편승하여 했다..’ 독백 같은 고백을 보면서, 남의 인생의 주연이 되려 하다 보니 버거워지는 삶을 생각하게 만든다. 저자의 말처럼 상대의 삶에서 우리는 단지, 조연이라는 것만 인정해도 관계의 무게는 가벼워질 것 같다.
프랑스에서 여행에서는 연인의 만남과 헤어짐이 있다. 체코인 알렉산드라와 프랑스 남자 프레드릭에 대한 사랑이야기 그리고 이별이야기가 있지만, 그래도 사랑은 아름답다는 생각을 준다. ‘사랑은 온갖 난해한 경우를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는 참으로 경제적인 단어다.’
캠프힐 후 떠난 3개월 일정의 여행을 저자만의 방식으로 정의 내린 것도 인상 깊다. ‘생각을 멈추고,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기꺼이 하자. 당장 곁에 있는 사람을 보라. 그 안으로 들어가자. 그게 나의 여행이다.’
남프랑스의 로익과 경험한 캐녀닝(Canyoning-신체의 모든 부분을 사용하여 급류를 타고 내려오는 토털 익스트림 레포츠)은 저자의 조용한 내면에 생기를 불러일으킨 활동이었으리라. 제레미 집에서 만난 납작 복숭아는 잔잔한 웃음을 선물한다. 발로 살짝 눌러 논 것처럼 생긴 복숭아가 상자하나 가득한 그림은 주인들의 풍성한 마음을 보여 주는 듯하다. 제레미의 조언처럼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는 가족에게 가는 거야’라는 말이 방황하는 저자의 마음에 조언이 되어 실천하게 만든다.
‘전력을 다하지 않은 100미터 달리기 같던 날들....... 나는 리셋에 서툴렀다.’ 살아가면서 이런 마음들을 느낄 때가 있다. 저자의 고백 같은 말을 들으며 나를 돌아본다. 전력을 다해 달려본 적이 있던가. 실패라는 감정을 리셋하는데 나는 익숙한가.
‘가이드를 따라, 계획된 일정으로 정돈된 시설에서 좋고 안전한 것만 누리고 오는 관광은 했지만, 내 몸으로 부딪치고 내 몸에 고스란히 새겨지는 여행은 처음이었다.’ 그녀의 여행은 단연 사람의 마음을 만나는 여행이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 한구석에 무겁게 자리 잡은 감정을 조금씩 덜어내는 과정 같다. 여행의 정의를 다시 내려 봐야겠다. 저자의 책을 읽어 가면서 세상에는 여전히 좋은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들을 내 삶의 영역으로 초대할 수 있는 일상을 만드는 인생도 멋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