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언어에 속지 않는 법]- 허새로미
도대체 영어를 얼마나 배워야 해요? 가끔 이런 질문을 듣는다. 해도 해도 끝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리라. 모국어인 한국어도 20년 가까이 공부를 한다. 하지만 각자가 그 공부의 길이를 결정한다. 중학교만 졸업할 수도 있고, 고등학교만 졸업할 수도 있고, 또는 대학까지만 공부할 수도 있다. 더 욕심을 낸다면, 대학원 석, 박사까지 그 기간을 늘릴 수 있다. 영어도 자신의 목표에 따라 그 기간이 달라질 수 있다. 저자의 책은 영어의 목표를 높여주는 효과가 있다. 단순히 영어로 소통하는 것이 아닌, 모국어처럼 자유자재로 읽고, 쓰고 생각할 수 있는 그 세계를 꿈꾸게 한다.
저자는 한국에서 7년간 토플 강사로 일하다가 뉴욕 대학교에 영어교육 석사 과정을 5년 받고 현재 SpeakEasy English로 영어에 목마른 사람들의 갈증을 해소해 주고 있다. 첫 글은 추운 겨울 뉴욕에 개 한 마리와 숙소를 찾아다니는 이방인의 두려움이 묻어난다. 단지 3일만 머물 수 있는 에어비엔비를 신청했고, 그 제한된 시간에 대한 긴장감과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은 낯선 땅에서의 두려움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과정이다.
대학원 인터뷰에서 ‘How are you?’라는 그 단순한 안부말이 칼날 위에 서 있는 듯한 저자의 마음을 풀어놓게 만든다. 인터뷰가 끝나고, 저자를 위해 임시동안 거처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한 사람들을 통해, 세상 어디든 사람이 살만한 곳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의 글은 깊다. 한국어와 영어를 하면서 느끼는 그녀만의 관찰력은 예리하다.
한국어에 대한 이야기는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다. 그중 ‘눈치’에 대한 그녀만의 의견은 내가 한때 느꼈던 감정과 닮았다. 눈치란 그 집단의 최고 권력자가 만들어 내는 것이고, 항상 주변을 탐색하고 은근한 신호를 읽으며 들리지 않는 날음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눈치가 없다는 것은 사회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신호와 같다. 조직에서 살아남는 사람은 ‘눈치 빠른 사람’ 일 수도 있다. 한국어는 고도록 맥락화된 언어라고 한다. 가장 작은 단위인 형태소까지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메시지보다는 암시적이고, 숨겨져 있는 신호로 소통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 언어가 한국어라는 것이다.
‘언어와 문화는 서로를 파고들어 꼭 붙어 함께 진화한다.’ 제한된 공간 안에 옹기종기 모여 살던 우리 문화는 가까운 만큼 말로 상처받을 일이 많을 수밖에 없다.
나이로 생기는 위계질서와, 조직에서 계급으로 정해지는 위계질서에서 ‘존칭어 어미 사용’에 대한 개인의 자율권은 없다. ‘중얼중얼 상소하듯 긴 문장을 읊다가 소중한 인생을 낭비’ 한다는 표현은 웃음을 자아낸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챙겨주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권력이나 힘이 있어 세다는 증거의 사회에서 자기주장이나 의견을 날 생선 내놓듯이 해서는 안된다. 어려서부터 어른들 말에 꼬박꼬박 말 대꾸하면, ‘한마디도 안 지려한다’고 어른을 이겨 먹는 아이로 취급되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주고받은 경험이 있었기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인 특유의 ‘정’ 문화는 그 개념이 포괄적이다. ‘너무 많은 것을 포괄한 감정은 그것이 제대로 정의되지 않았을 때 상대를 향해 무기로 쓰일 수 있다.’
‘최소한의 말만 해 놓고 상대방이 알아듣기를 바라거나 알아들을 때까지 몰아가는 식으로 소통하는 언어가 한국어이기도 하다’는 저자의 말도 인상적이다. 나이가 들어 가지만, 가끔 권위적인 사람과의 만남에서 느끼는 불편함의 원인을 찾은 것 같다. 알아서 대접해 주어야 하는데 눈치가 없다 보면, 놓치기 쉽다. 상대방의 불쾌한 눈빛을 고스란히 받아 내면서, 그 원인을 찾아내야 하는 마음의 분주함을 주는 만남은 피하고 싶어 진다.
바이링구얼을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무얼 보고 있는지를 판별해 주는 렌즈이자 너무 따가운 모국어로부터 이를 숨겨주는 양산’ 같다고 한다. ‘영어를 하는 나는 한국어를 하는 내가 보지 못하는 신나는 가능성과 미세한 감정의 눈금들을 본다.’
‘모국어에 말 하나를 더 하고 나서, 나는 비로소 세상이 그렇게 까지 두렵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장 인상 깊은 내용의 글이다. 바이링구얼은 세계를 보는 마음의 눈을 활짝 열리게 만들 것이다. 영혼의 땅이 있다면, 한국어와 영어의 땅 두 곳이 자신의 점령지가 된다.
바이링구얼을 구사함으로써, 현상에 이름을 붙고, 진단이 따르고, 그 언어를 통해 바깥과 연결되는 경험은 거의 모든 것을 바꾸었다는 저자의 경험이다. 영어는 삼차원 공간 정보를 포함한 ‘시각적 묘사’와 인물의 감정 묘사에 에너지를 많이 쏟는 언어라고 한다. 한국어가 다른 언어의 도움을 받아 상호 작용하면서 진화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감정을 언어화하고, 더 나아가 두 언어를 오가며 그 감정의 스펙트럼을 시험해 보는 일은 당신의 마음에, 그리고 우리의 소통에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영어는 미래시제가 뚜렷한 언어고, 한국어는 미래 시제에 대한 구분이 없다는 것은, 미래를 멀리 떨어진 것으로 바라보는 시각과, 아주 가까이 있다고 보는 시각의 차이를 만들어 낸다고 한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한국인들이 미국인들에 비해 더 많은 저축을 한다는 UCLA경제학의 키스첸 교수의 연구도 흥미롭다.
감정에 대응하는 언어가 없을 때 생기는 일들에 대한 이야기도 공감이 간다. 한국어의 경우 감정을 나타내는 400 단어 중에서 부정어가 72%라고 한다. 우리 문화권이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낼 일이 많다는 것이다.
언어학자 브로디츠키는 호주의 한 부족에 대한 이론은 언어 구조의 차이가 생각의 차이를 어떻게 불러내는지를 보여 준다. 오른쪽, 왼쪽, 앞, 뒤라는 말대신에 남동쪽, 북동쪽 같은 표현으로 일상에서 말을 주고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나침반이나 구글맵처럼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안다고 한다. 언어 구사가 생각의 방식과 감각과 능력에도 매우 큰 차이를 가져옴을 보여 준다.
‘미분화되지 않은 감정을 다른 언어로 지도 삼아 샅샅이 살펴보는 일은 새로운 종류의 재미일 뿐 아니라, 생각의 근육을 연마하는 일이다.’ 참으로 매력적인 유혹이다.
‘외국어를 말하는 나는 다른 결정을 내린다.’ 2018년 키크니션 지에 실린 실험도 인상적이다. 철로의 방향으로 자신의 눈앞에 있는 한 명과 다른 곳에 있는 다섯 명의 목숨을 결정짓는 실험에서, 모국어로 질문을 받는 사람은 한 명을, 외국어로 질문을 받은 사람은 5명을 살리겠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즉, 목국어로 질문을 받은 사람은 감정적 선택을, 외국어로 질문을 받은 사람은 실용적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후자는 다섯 명의 목숨이 한 명의 목숨보다 낫다는 실용적 선택을 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중언에 망설이는 사람들을 유혹한다. ‘언어를 넘나들며 사는 것은 신나는 경험이다. 우리의 서사가 다른 언어로 달라질 때, 어떻게 재 조립되는지 어떻게 스스로를 재발명하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그녀의 유혹에 푹 빠진 마음 때문에 영어로 책을 출판해야겠다는 꿈이 커진다. 이렇게 책은 꿈을 만들어 주기도 하고, 더 큰 꿈을 꾸게 해주는 도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