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데기] -황석영
글을 쓴다는 것 특히 소설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아이를 세상에 한 명씩 출산해 내는 기분일 것 같다. 작가가 생각하고 있는 인생관과 세계관에 대한 응축되고 오랫동안 숙성된 사고를 소설이라는 인물들을 통해 그려낼 수 있는 힘은 다년간의 노력이 빚어낸 예술일 것이다.
'바리데기'라는 제목이 유독 끌렸다. 표지 앞장의 수수한 젊은 동양인 여자의 얼굴 뒤로 보이는 유럽풍의 탑이 보이는 배경이 서로 상치된 듯 보이기도 하고 그녀의 슬픈듯한 얼굴이 동양적인 매력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첫 책장을 넘기자마자 시작되는 작가 소개를 읽어 내려갔다. 황석영 작가의 프로필을 읽어 내려가는 중 '월북' 후 복역 후 1998년 석방이라는 구절이 강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세계 문학사에 주목받을 만한 그의 글의 우수성, 만해 문학상, 단재상이라는 말보다 '월북'이라는 이력이 그의 사상이 이 소설 속에 어떻게 드러 날까 라는 궁금중을 더해 주었다.
주인공 바리는 북한 청진에서 7번째 딸로 태어나 아들을 기다리는 부모가 너무 속상해 태어나자마자 버린 아이다. 다행히 그 집에 함께 살던 개가 바리가 버려진 곳에 할머니를 인도해 생을 얻게 된 것이다. 그래서 '버려지다'의 뜻인 '바리'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소설이 끝나고 작가의 책 소개 인터뷰가 짤막하게 추가되어 있는데 바라의 또 다른 의미는 우리말 '발'의 연철음에서 온 소리로 광명 또는 없던 것을 새로 만들어 낸다는 뜻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버려진의 뜻인 바리공주와 탄생을 의미하는 광명의 공주, 생명의 공주, 소생의 공주 뜻을 내포하고 있다.
북한의 삶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글들이 생생해 작가의 월북 체험이 큰 몫을 차지했을 것 같다. 바리 아버지는 대학도 나왔고 중국어도 잘해 나름 당에서 제공하는 안락한 집에서 살 수 있었다. 기근으로 인해 식량이 부족해지면서 개개인들이 집안에 곡식을 숨기고 살아가는 모습과 그것도 불을 자주 지필 수 없어 저녁에 몰래 한 끼 식사만 하는 소설 속 바리 가족의 모습이 신문에서 봤던 북한 기근에 대한 내용을 떠올리게 했다. 그 어려운 시기에 바리 삼촌이 월남해버린 것 때문에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바리의 파란만장한 삶의 소용돌이가 시작된다. 할머니와 그녀의 언니 현이와 자신을 살려준 개가 낳은 7번째 강아지와 함께 국경을 지나 중국의 한 농장 근처 산속에서 은신하며 살아간다. 다행히 무사히 탈출해온 아버지와 잠깐의 산속 생활을 한다. 추운 겨울 얼어 죽은 언니 그리고 나머지 가족을 찾아오겠다던 그녀 아버지는 다시 북한으로 돌아 가지만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만다.
산속에서 할머니 조차 떠나보낸 열두세 살의 어린 여자아이는 자신의 개 흰둥이를 데리고 다시 북한으로 넘어간다. 오래된 기근으로 여기저기 버려진 시신들의 묘사가 정말 이랬을까 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바리가 가진 능력 중 죽은 이들의 혼을 볼 수 있는 능력과 자신의 육체를 떠나 생을 볼 수 있는 능력을 통해 죽음 이후 사람들이 어떤 형태로 육체를 떠나 영혼으로 방황하는 지를 보여 준다.
작년쯤에 봤던 '환생'이라는 책에서 정신과 의사가 67번의 환생을 기억해 내는 환자의 치료 과정 중 만나는 사후 세계와 비슷한 장면이 있다. 육체를 떠난 혼들이 생의 기억을 가지고 잠깐 지상에 머물고 곧이어 넓은 초혼 같은 곳에 무리 지어 있다가 한 단계씩 더 나은 단계를 거쳐 다시 환생한다는 이야기다.
돌아가신 할머니와 4살밖에 안된 조카 민성이를 두고 떠난 유난히 예뻤던 이모가 어느 날 내 꿈속에서 넓은 초원에서 나물 캐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냥 평온한 느낌에 두 분 모두 잘 계시는구나 라고 안도했었다. 죽음 이후의 삶이 아름답다거나 또는 고통스럽다기보다는 그냥 하나의 담담한 또 다른 형태의 간이역 같은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북한으로 건너간 바리가 바라본 그곳은 산을 몰래 불태워 개간하려는 배고픈 주민들이 만들어 논 불구덩이 속 장면은 단테의 지옥편의 장면 묘사 같다. 고통스럽지만 살아남기 위한 인간의 마지막 의지를 보여 준다. 이곳에서 불을 피해 달려 나온 멧돼지로 인해 그녀의 마지막 가족 같은 흰둥이를 잃는다. 다시 중국 국경에서 난민자의 위험한 삶을 살아가는 그녀의 삶은 마치 버려진 신의 아이라는 생각을 들게 했다. 이렇게 살아갈 수 도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그녀의 연속되는 불행은 중국에서 영국으로 향한 불법 난민의 항해 길 그리고 이국땅에서 언제 추방될지 모르는 이방인으로서 삶을 그려낼 때 더욱 짙어진다.
하지만 이상한 건 그녀의 고통스러운 삶이 몸에 착 달라붙어 괴로움을 더하는 느낌이 아니라 그녀 존재와 삶의 부조리가 기름과 물처럼 떨어져 있는 느낌이다. 거대한 삶의 폭풍 속에 자신의 힘을 빼고 물결에 따라 바람에 따라 자신을 맡기고 관조하는 느낌이랄까?
영국에서 알리라는 파키스탄 남자와 결혼하고 이슬람 문화권의 풍속으로 자연스럽게 그녀가 스며들어간다. 결국, 형태는 다르지만 신에 대한 경외와 이승과 저승을 구분된 삶의 형태를 느낀다. 미국에 대항한 극우 이슬람 집단이 911 테러로 남편은 파키스탄으로 떠난 남동생을 찾아 떠난다.
같이 밀항했던 정신이 망가진 샹이라는 여자로 인해 자신의 어린 딸 마저 잃고 육체를 떠난 혼으로 할머니와 그녀의 흰둥이 개의 혼을 만난다. 저승과 이승의 사이에 수많은 혼령들의 다툼이 묘사된 장면에서 답답함이 느껴졌다. 자신의 종교가 서로 맞다고 여전히 다투는 사제들은 모래 안으로 온몸이 사라졌다가 다시 올라와 똑같은 방법으로 모래에 파묻히고..... 신이라는 이름으로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는 인간의 악이 무섭다. 지난주에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충돌로 수많은 아이와 여자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가 났었다.
작가의 글 중 가장 강하게 인상에 남는 전쟁에 대한 문구가 떠오른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힘센 자의 교만과 힘없는 자의 절망이 이루어낸 지옥이다.' 누군가 말했다. 지옥을 체험하고 싶다면 남을 미워해 보라고. 아직도 세계의 3분의 1 국가가 이념과 사상 그리고 교만과 절망으로 전쟁을 치르고 있다.
소설 마지막 부분에 남편과 안정된 삶을 살아가기 시작하는 바리가 런던 지하철 테러를 목격하며 자신의 부른 베를 잡고 '미안해, 아기야'라고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린다. 남편 알리 또한 두려워하는 아내의 어깨를 꼭 감싸며 눈물을 흘리며 끝난다. 작가는 희망의 상징인 새로운 생명을 기다리는 상황 속에서도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 같다.
"희망을 버리면 살아 있어도 죽은 거나 다름없지, 네가 바라는 생명수가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만,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어떤 지독한 일을 겪을 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 남편 알리의 할아버지 압둘의 대사가 이 소설 전체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듯하다.
이 공간, 이 생이 너무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구나. 삶은 아름답게 나와 다른 타인을 존중하며 살아가야 한다. 소설을 읽고 나서 꽃 시장에 다녀왔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에서 나와 관련된 사람들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기적을 자축하고 싶었다. 흰색 꽃 끝 부분에 보라색으로 마감되는 장미와 연 노란 안개꽃 비슷한 식물을 섞어 세 다발의 꽃다발을 만들었다. 하나는 우리 집 식탁에, 또 하나는 딸을 막 결혼시켜 마음 허전해할 막내 시누에게 그리고 마지막 한 다발은 남을 배려하는 삶이 몸에 배여 자신을 챙기지 못하는 안쓰럽고 한 없이 아껴주고 싶은 셋째 시누이에게 선물했다.
꽃을 자주 사게 될 것 같다. 삶의 요란한 소리 속에 은은히 아름다움을 품어내는 꽃들이 누군가에게 평온함을 선물해 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