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쓸모]- 로랑스 드빌레르
나답게 잘살기 위해서는 철학이 필요하다. 하지만, 철학은 항상 베일 속에 가려진 미지영역 같다. 철학을 이해하고, 머리 깊숙한 곳까지 감흥 되고, 삶에 적용되는 긴 거리는 분명 장거리 마라톤 같다.
말라가는 식물을 보고 놀라 물을 주듯이, 철학에 관련된 책을 간간히 읽는다. 책은 육체의 고통, 영혼의 고통, 사회적 고통 그리고 흥미로운 고통들을 이야기한다. 저자의 서두글을 통해 철학자들이 전하는 철학적 치료법을 접할 수 있다. 살아가는 동안 만나는 번뇌에 대한 정확한 정의와 철학으로 치료하는 법을 알려준 후 조용하게 독자의 하소연을 들어주는것 같다. 고민을 정의 내리는 것만으로도 상당 수의 해결책이 나온다. 고민을 직시한 후 철학자의 치료제를 맛본다. 그리고 철학이 조용하게 자신의 고민을 들어준다는 것을 느낄 때, 고민은 흘러간 강물이 되어버릴 것 같다. 철학이 현재의 고통을 치유해 줄 수 있는 힘이 있다. 철학이 육체와 영혼의 질병을 치유하여 이성이라는 항체의 천연 공급원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시작되었다고 해서,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긍정하고 지속시켜야 하는 것이다. 삶이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감당하는 것이다.’ 감당하겠다는 마음만 먹어도 몸속 기가 강해지는 느낌이 든다.
‘내가 누구인지를 돌아보는 일은 내가 하나의 영혼일 때만 의미를 갖는다.’ 저자의 말처럼 나 자신이 된다는 것은 나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일이다.
육체의 고통에 대한 철학적 이야기를 들려준다. 육체는 나에게 속해 있지만, 내 뜻과 상관없이 주어진 것이기에 나인 동시에 내가 아니다는 말도 일리가 있다. 평범한 사람은 영원히 살 것처럼 살지만, 철학자는 하루하루가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산다고 한다. 100년도 안 되는 삶을 한 순간으로 보는 힘과 하루를 1년처럼 길게 바라보는 연습을 하고 있다. 철학자의 생각을 깊이 있게 이해할 때 원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삶 속에서 무를 대면하는 유일한 순간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라는 말도 공감이 간다. 이별을 전제로 살아가는 삶이다.
육체에 가해지는 고통은 수도 없이 많다. 고통, 늙음, 질병, 죽음 등등... 질병에 대한 철학적 접근이 인상 깊다.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은 함께 살아가겠다는 마음가짐이라는 것이다. 질병은 돌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내 육체를 가지고 또 다른 삶으로 살아가야 하는 길이다. 데카르트의 이론이 도움이 된다. 육체와 정신은 서로 상호 작용하는 뇌의 ‘송방울샘 Pineal Gland’ 기관이 있다.
늙음을 맞이하는 철학적 접근법은 지혜롭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새로 시작하는 것을 주저하고, 현상 유지에 만족할 때 늚음을 만난다. ‘우리는 자유롭게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해체하면서 스스로를 자기 삶의 예술가라고 생각해야 한다.’ 한나 아렌트의 명쾌한 해석도 힘이 된다. 비루하고 보잘것없더라도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인 ‘탄생성’은 내면의 힘을 기르면서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인간은 비록 죽음을 맞는다 해도 죽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매일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 태언 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결코 마주할 수 없다는 것을 통해 에피쿠로스는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니 현재에 집중하라고 전한다.
카뮈의 ‘정오의 사상’은 인생이 쓰리고 실망스럽지만 삶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껴안을 때 비로소 행복해지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려 준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는 상태가 열정이라면, 열정으로 잃어버린 것을 의지로 찾아야 한다. 쾌락은 물이 세는 항아리와 같아서, 그 활동에 열중하고 있을 때조차 억지로 노동할 때처럼 중압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영혼의 고통을 주는 번뇌도 피할 수 없는 운명 같다. 산다는 것에 대한 정의, 무수히 반복되는 일상, 사랑에 대한 막연함, 위로, 후회, 자책, 우울, 실패, 낙오, 좌절, 수치심 등등 영혼의 고뇌는 삶의 동반자 같다. 내가 누구인지와 내가 사는 삶에 간극이 있다는 말도 공감이 간다. 사르트르는 ‘나는 내가 선택한 삶 그 자체다’라고 말했다.
라이프니츠는 벽돌을 쌓듯 살아가야 하며, 시간에 끌려 다니지 말고, 스스로 삶을 이끌어 가며 삶의 매 순간을 보다 활기차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좌절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라고 조언한다.
일상을 바라보는 두 마음이 저울 같다. 반복되는 일상이 지겨운 마음이 들다가도, 잔뜩 마음을 흔드는 일들을 겪다 보면 그 일상이 그리워진다. 그래서 니체는 이야기했다. 우리 일상을 축제처럼 살아가라고.
‘지속적인 습관은 마음을 무겁게 하고, 삶의 공간을 협소하게 만들고, 단기적 습관은 삶의 공간을 확장하고 풍요롭게 하면 흥미롭게 만든다.’
의지박약인 ‘아크라 시아’에 때문에 생기는 스트레스의 원인 해석이 명쾌하다. 할 수 없어 못하는 일 때문이 아니라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아서 생기는 게 스트레스라는 것이다. 파스칼은 이런 스트레스 처방법을 잘 진단해 준다. 미루거나 변명을 허용하지 말고, 자신의 의지가 아닌 무의식을 이용하는 법을 이야기한다.
삶에서 사랑을 뺀다는 것은 행복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자유롭게 사랑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평생 단 한 번만의 사랑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주위에 온통 사랑할 수 있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둘러싼 모든 것들에 대한 사랑이 삶의 향기를 품어낼 것이다.
위로에 대한 편에서 정의하는 희망이야기도 생각해 둘 필요가 있다. 너무 많이 가져도, 너무 적게 가져도 문제가 되는 게 희망이라는 것이다. 희망이 너무 크면 현실을 회피가 될 수 있고, 너무 없어도 살아갈 힘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중용의 희망이 필요하다.
칼 마르크스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했다. 신앙이 희망과 관련된 질병이라는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들이 신을 이용해 사후 세계에 대한 포장이 이를 보여 주는 듯하다.
후회와 자책을 동반하는 인간 삶에 대한 몽테뉴의 처방전도 효력이 높다. 춤을 출 땐 춤만, 잠을 잘 때는 잠만 잠으로써, 몰두하면서 온전해지는 연습이 필요하다. ‘원하는 것을 하지 말고, 지금하고 있는 것을 원하라.’ 사람으로서 올바르게 사는 것, 이 삶을 참되고 자연스럽게 살 줄 아는 것만큼 아름답고 정당한 것은 없다는 말도 교훈이 된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 타인의 불행에 기뻐하는 마음 ‘샤텐프로이데’라는 것을 통해 인간 내면에 가진 잔혹성이나 윈시적 공격성을 인정할 때 다룰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실패나 낙오, 좌절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닌 ‘나는 존재한다. 고로 생각한다’라는 전제로 바꾸어 보는 역발상이 필요함을 알려 준다. 살고 있기 때문에 이런 감정을 만나는 것이다. 컵에 반쯤 찬 물을 보고, 낙관적 비관적 태도를 선택하기보다는 오직 컵을 가지고 있다는 감사함을 알라는 것이다.
함께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회적 고통이 어쩌면 자연스럽다. 산속에서 혼자 살아가는 사람에게 사회적 고통이 찾아오지 않는다. 고슴도치처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힘을 길러 내면 된다. 사람들끼리 나누는 대화에서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뺀 다면, 대화할 가치 있는 주제는 한두 가지밖에 없고 한다. 그래서 인간을 한두 가지 소리 밖에 내지 못하는 악기 같은 존재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철학은 육체와 영혼의 연결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 ‘사람은 전체적으로 육체와 정신이 연결되어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이다. 음식이든, 생각이든 적은 양에 만족 하며, 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오로시 자신의 판단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삶이 거저 살아지는 것이 아님을 이야기한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끝나지 않는 숙제 같은 것이며, 어떤 인간도 내면의 현실과 외부의 현실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런 긴장감 완충 역할을 하는 것이 예술과 종교가 된다는 말이 이해가 된다.
영혼과 육체의 조화를 이루고, 현재에 집중하되 나와 사회 그리고 세계를 보는 힘을 주는 것이 철학이라는 생각을 주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