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남이 정해주는 미래는 없다.

by 레미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는지, 하나를 보면 열을 본다는지, 제 팔자 개 못 준다든지, 이런 운명론적인 속담들이 예로부터 많이 전해져 온다. 옛날부터 우리 민족은 사주팔자(四柱八字)라 하여 자신의 모든 곤란과 고통을 운명으로 해석하곤 했다.

그 사주팔자라는 것은 문자적으로는 여덟 글자로 이루어진 네 개의 기둥이라는 말인데, 금(金), 수(水), 목(木), 화(火), 토(土)의 다섯 가지가 음양의 원리에 따라 행함으로써 우주의 만물이 생성하고 소멸하게 된다는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 근거하여 그 사람이 몇 년, 몇 월, 며칠, 몇 시에 태어났을 때부터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고 믿는 학문이다.


동서양의 차이는 있지만 서양 사람들 또한 운명론적인 사상에 깊게 물들어 있었다.

16세기 영국의 왕 제임스 1세가 주창한 왕권 신수설(王權神授說, Divine Right of Kings)이 대표적이다. 군주제는 신이 명령하는 것이며 왕은 신에게만 책임이 있으니 왕이 악할지라도 국민이 이것을 비판할 권리가 없으며 운명으로 받아들이라는 사상이다. 각 나라의 왕들이 왕권의 절대성을 주장하고자 했던 이 이론은 유럽 절대주의 시대를 뒷받침해 온 정치사상이다. 이 또한 운명론에 입각한 사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고보면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으로 운명론이라는 것은 참 인간의 정신을 오래토록 지배해왔던 사상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가? 정해진 운명이란 없다.


운명은 인간 스스로 개척해가는 것이고, 환경은 인간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진리다.

조선의 9대 왕인 성종은 자기와 사주가 똑같은 여인이 그 한양 도성 내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녀를 불러 인생사를 물어보았다. 그런데 성종의 세자 책봉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성종이 왕위에 등극을 할 때 남편이 죽어서 과부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사주가 같은 사람인데 성종이 경사가 있을 때마다 그녀에게는 불행이 닥쳐왔다는 것을 안 성종은 사주란 못 믿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나마 서양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로 귀족주의가 무너지고 자본주의에 기반한 민주주의가 일찍 정착되면서 이 운명론에서 빨리 벗어난 것 같기는 하다. 물론 타로카드나 그 외 아직도 주술적인 의미에서의 운명을 예측하는 것들은 있지만 이는 그냥 오락이고 재미에 가까운 놀이문화 정도로 여겨진다. 그러나 동양은, 특히 우리 나라는 아직도 운명이 정해져있다고 믿는, 운명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점 잘 보고 미래를 예측한다는 무슨 보살이니 하는 사람들의 현수막이 오다가다 한 동네에 하나쯤은 여전히 있다.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는 거라면 아직도 많은 이들이 그걸 믿고 찾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시대가 크게 변한 지금까지도 자녀들의 결혼을 앞두고 사주가 어떻게 되고 팔자가 어떻게 되는지 알아 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이 남아 있다. 용한 무당이라며 방송에도 나오는 것을 보면 이는 재미라기보다는 진짜로 믿거나, 아니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인해 찾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리다.

우리가 미래를 안다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최대한의 지식을 통계로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다고 예측하는 것이 전부이다. 그나마도 우리가 모르고 있는 또 다른 변수가 발생하면 그 예측은 터무니없는 방향으로 빗나가기도 한다.


그런데 미래를 알 수 있는 이가 누가 있겠는가? 미래를 안다고 떠들어대는 무당이니, 점 치는 사람이니, 이런 사람들은 신통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워하는 인간의 불안감을 이용하여 돈을 버는 사기꾼들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이 만약 미래를 안다면 두말할 것 없이 그것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부터 먼저 취하려고 할 것이다. 그게 인간 아닌가. 그리고 모든 인간이 미래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취하려 한다면 멀리서 찾을 것 없이 그게 바로 지옥이다. 이 경우는 아는 것이 힘이 아니라 차라리 모르는 것이 약이다.

차라리 주사위나 동전 던지기로 앞으로 살 길을 정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그건 남이 정해주는 미래가 아니라 자기가 선택한 미래라고 자위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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