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야기 - 칼의 양가치성

- 이승우의 <칼> (2010년 황순원 문학상 대상 수상작)

by 이중석

칼의 양가치성



입김은 언 것을 녹일 수도 있고, 뜨거운 것을 식힐 수 있다.

눈물은 어떤 이에게 기쁨을 차오르게 하고, 어떤 이에게는 슬픔으로 수몰시킬 수도 있다.


은 상대방을 공격하는 무기로, 나를 보호하는 무기로도 사용된다.

칼이 어떤 상황에서 누구의 손에 들려있는가가 ‘칼의 가치’를 결정한다.


사람은 누구나 칼 하나를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2010년 황순원 문학상 대상을 차지한 이승우의 <칼>은 기존 이승우의 기독교적 세계관을 다룬 작품과는

다르게 주제가 인간으로 넘어왔다.

마치 중세가 끝나고 르네상스가 온 것처럼.



기존 이승우의 소설을 읽으려면 긴 호흡을 하고 들어가야 했었는데 이 작품은 짧은 호흡으로 읽을 수 있는 단편 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대학생이다.

대학생인 주인공은 사랑하게 된 여자를 위해 돈과 시간을 탕진하면서 부모님과의 관계가 뒤틀리고 결국 대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칼을 배달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쪽수는 2010년 황순원문학상 수상 작품집]


아버지에게 시간과 돈을 낭비하며 얻을 만큼 가치가 있는 것 가운데 최고의 것은 시간과 돈이었다. (49쪽)


세상의 모든 시간과 돈을 바쳐서라도 얻고 싶은 대단한 여자와 가치 있는 사랑이 있다는 것을 그(아버지)는 알지 못했다. (49쪽)


어떤 시간도 그녀를 얻는 데 도움이 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고, 어떤 돈도 그녀를 기쁘게 하는 데 사용되지 않으면 가치가 없는 그런 열정의 시기가 있다는 걸 그(아버지)는 알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 않았다. (49쪽)



주인공은 사랑하는 여자와 끝난다. 아니 일방적으로 차인다.

여자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직 그가 쓰는 돈에만 관심이 있었다.


주인공의 어머니가 사정 이야기를 알고 여자를 찾아갔다.

여자는 주인공의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한테 뭐라고 하지 마세요.

나는 나를 따라다니라고 요구한 적도 없어요.

공부하지 말라고 한 적도 없고, 호프집에 가서 일하라고 한 적도 없고, 보증금을 빼라고 한 적도 없어요.

아니, 그런 줄도 몰랐어요. 그렇게까지 구질구질한 사람인지 몰랐어요.

사실은 나도 귀찮았어요. 나한테 뭐라고 하지 마세요.

따질 게 있으면 당신 아들에게 따지고, 충고할 게 있으면 당신 아들에게 가서 충고하세요. (53쪽)



여자 때문에 사채까지 끌어다 쓰고 파산한 아들을 아버지 또한 버린다.

주인공은 이후에 대학을 다니지 못하고 칼을 배달하는 아르바이트를 한다.

칼을 배달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단골 고객인 한 남자의 부탁으로 그 남자의 아버지를 일몰부터 일출까지 돌보아주는 일을 하게 된다.

돌보아주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남자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일이다.

그런데 '칼을 배달'하는 일과 '말을 들어주는' 일 사이에서 이상한 공통점이 발견된다.


이승우라는 작가의 글쓰기를 생각할 때 ‘칼을 배달한다’, 혹은 ‘말을 들어 준다’는 것이 sword와 word의 관련성에서 유추되어 온 것이라면 텍스트의 구성이 단순한 생각에서 온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동안의 상징성 고찰에서 내러티브가 구성된 것이라 짐작 된다.


칼이 문학에서 지닌 일반적인 상징성은 악과 부정을 퇴치하고 정의와 평화를 창조하는 군사력, 왕권을 상징하고 국민을 보호한다는 의미에서 ‘보호’를 상징한다. 즉 칼은 권력, 보호, 권위, 정의, 용기, 강함을 상징한다.

작품 속에서 드러난 ‘칼’은 자신을 보호하는 방어기제로서의 역할을 한다.


말 또한 이러한 상징성을 가진다. 말도 일상생활 속에서 방어기제 역할을 수행한다.

말이 많은 사람은 그만큼 자신을 방어해야할 이유가 많은 사람이다.

고수가 말을 많이 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을 말로써 방어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말을 들어주라고 주인공에게 일을 시킨 남자는 아버지를 만날 때마다 칼을 몸속에 지니고 있다.

그 남자가 몸속에 지니고 있는 칼은 ‘투사’(投射)라는 개념을 가지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

투사는 자신의 내부에 있는 인정하기 어려운 어떤 억압된 감정을 자신이 아닌 어떤 외적인 대상, 즉 다른 사람이나 어떤 사물을 통한 일종의 방어기제이다.

그 남자가 아버지를 만나러 갈 때에 몸에 지닌 ‘칼’은 그 남자의 투사이다.

그 남자는 주인공에게 이런 말을 한다.


칼이 없어도 불안하지 않은 사람은 칼을 가지지 않고도 잘 살지만, 칼이 없으면 불안한 사람들은 칼이라도 지녀야 겨우 살 수 있다고, 실제로 그 사람들은 칼을 가지고 애초에 칼을 필요로 하지 않은 사람들보다 잘 살지 못한다고 그는 말했다. (65쪽)


그 남자의 아버지, 주인공이 일몰부터 일출까지 말을 들어주는 노인의 방은 온통 하얀색이다.

노인의 방 어디에도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다.

이 노인에게 그림자는 아들인 거 같다.

어둠을 피하려고 온통 집에 전등을 켜 놓으면서도 그 안에서 어둠을 피하는 것이 아니고 어둠과 그림자를 찾으려 애쓴다.

빛과 어둠은 ‘칼’이 가지고 있는 양가치성과 어우러지면서 우리에게 둔탁한 메시지를 던져준다.




주인공과 아버지, 그 남자와 노인의 관계는 미장아빔(액자식 구성)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주인공과 아버지가 겪은 일과 그 남자와 노인이 겪은 일은 시간 차이를 두고 전개된다.


주인공 아버지는 여자에 홀려 시간과 돈을 탕진한 주인공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런 쓰레기 같은 놈. 너 같은 놈이 살아서 뭐하냐? 차라리 똥통에 빠져 죽어버려라.” (54쪽)


그 남자는 주인공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는 언제나 무시하고 모욕하고 경멸하고 비난해.

아버지에게 나는 쓰레기거나 깡통이거나 돌이거나 똥이야.”(66쪽)


주인공과 그 남자와의 동일성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아들이다.

그 남자는 칼을 품고 아버지를 만난다.

아들이 칼을 품고 아버지를 만나는 상황은 얼핏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의미하는 거 같기도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부친 살해 욕망 보다는 부친에 대한 인정 욕구나 자신을 보호하려는 의지로 읽힌다.


칼을 품고 마주 앉으면, 옷 속의 칼이 방탄조끼나 방패처럼 여겨진다고, 그래서 웬만한 공격을 받아도 끄떡없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긴다고, 아버지가 하는 모든 험한 말들을 옷 속의 칼이 막아주는 게 느껴진다고, 그러면 쓰레기나 깡통이나 돌이나 똥이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진다고 말했다. (67쪽)


칼은 나로 하여금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디게 할 뿐 아니라 위협하지 않는다고, 그것이 뭐라고 불리든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게 하는 것이 칼이라고, 누구나 칼 한 자루씩 품고 산다고, 자기도 마찬가지라고, 사람들이 그걸 모르거나 모른 척하고 싶어서 오해한다고 대답했다. (67쪽)


주인공이 ‘칼을 배달’하고, ‘노인의 ’말을 들어주는‘ 일을 하는 것이 그 남자가 몸속에 칼을 지니고 그의 아버지를 만나는 것과 교차되어 주인공과 남자의 동일성으로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칼>이 보여주는 문체의 특징은 기존 이승우가 사용하고 있던 문체인 반복적 서술에서 오는 강렬한 메시지 전달 방법에 있다.

같은 말을 병렬시키면서 오는 말의 허무감과 역설적 표현을 통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의 역설적이면서 아이러니컬한 존재성에 대한 천착은 이 작품의 백미이다.

또한 항상 명제(항진명제)일 수밖에 없는 배중률의 문장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을 갖게 하는 소설의 빈 공간은 작품을 다 읽은 후에도 독자에게 강한 여운을 남겨 준다.


우표나 동전이나 열쇠고리를 수집하는 것이 그저 취미에 지나지 않은 것처럼 칼을 수집하는 것 역시 취미에 지나지 않다.

칼을 수집하는 사람이 특이하다면 우표나 동전이나 열쇠고리를 수집하는 사람이 특이한 것처럼 특이하다.

우표나 동전이나 열쇠고리를 수집하는 사람들을 조금 특이하다고 할 뿐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처럼 칼을 수집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조금 특이할 뿐 이상하지는 않다고 생각해야 한다. (37쪽)


나는 항상 칼을 몸에 지고 다닌다.

일을 할 때도 칼을 지니고 일을 하지 않을 때도 칼을 지닌다.

칼을 가지고 무얼 하려는 것이 아니고 칼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뭐라고 불리든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게 하는 것이 칼이다.

그것을 뭐라고 부르든 누구나 칼 한 자루씩 품고 산다고 나는 생각한다.

칼을 수집하는 사람들에게 칼은 우표를 수집하는 우표, 동전을 수집하는 사람들의 동전, 열쇠고리를 수집하는 사람들의 열쇠고리와 같지 않다.

칼을 수집하는 사람들은 우표나 동전이나 열쇠고리를 수집하는 사람들이 우표나 동전이나 열쇠고리를 수집하듯 칼을 수집하는 것이 아니다.

우표나 동전이나 열쇠고리를 수집하는 것은 그저 취미에 지나지 않지만 칼을 수집하는 것은 그저 취미에 지나지 않은 것이 아니다. (69쪽)


위의 두 개의 인용문에서만도 수집이라는 단어가 열여섯 번, 우표, 동전, 열쇠고리의 단어는 여덟 번이 반복된다.

이러한 단어의 반복에서 오는 강박증을 불러일으키는 서사 기법을 통해 텍스트는 두터운 질감을 만들어 낸다. 또한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왠지 모를 강박적인 느낌을 받으면서 독자는 텍스트의 단어와 단어 사이에서 극적 긴장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소설의 전체 문장 대부분을 반복하고 있는 것은 작가가 반복을 통해 던지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는 것인데, 이 메시지를 생각해보는 것도 소설을 읽어가는 또 다는 재미를 선사한다.




이승우의 『생의 이면』, 『식물들의 사생활』을 읽으면서 벅차오르던 감동은 마치 믿기지 않는 마술을 보는 듯하였다.그의 소설이 보여주고 있는 형이상학적 보편성이야말로 이승우만이 가지고 있는 득의의 영역이 아닐까 싶다.


이승우는 자신의 칼로 과거의 기독교적 세계를 가르고 르네상스로 진입하였다.

‘칼’이 가진 상징성을 깊게 파고들어 만든 밀도 있는 텍스트는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부자(父子)들에게 보내는 힘 있는 메시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텍스트를 생각하면서 읽게 만드는 이승우 작가에게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칼>은 이승우 특유의 형이상학적 상상력의 발현으로 보이며 그가 만들어가고 있는 길이 한국 소설사에 큰 지표가 되기를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독자로서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