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 외교(外交)

1. 신라(新羅) - 결국은 신라가

by 이중석

2025년 벚꽃이 한참이던 어느 봄날.

아파트 안의 놀이터 벤치에 앉아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고 있었다.

갑자기 한 무리의 아이들이 나타나면서 조용하던 놀이터가 분주해졌다.

이어폰을 귀에서 빼니 놀이터는 예전 어린 시절의 시골 장터로 변하였다.

쫑알쫑알 조그만 입들이 쉬지도 않고 움직였다.

새삼 아이들의 대화가 궁금해져 귀를 기울였다.


한 여자 아이가 다른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희들한테 이거 줄게.” 하면서 막대사탕을 내밀었다.

그 여자 아이는 세 명의 아이들에게 막대 사탕을 하나씩 주었다.


나는 그 광경이 매우 흥미로웠다.

막대 사탕을 준 여자 아이와 막대 사탕을 받은 아이들.

아이들 세계의 외교의 서막이 올랐음을 난 직감했다.

막대 사탕을 준 여자 아이는 이제 아이들의 리더가 되거나 놀이터 내에서 힘이 강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외교의 시작은 이러한 막대 사탕에서 시작하기도 한다.




신라의 외교 이야기는 중국 역사에서부터 시작해보려 한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제 영정(嬴政)이 사망했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기원전 221년)한 진 나라는 중국 통일 12년 만에 시황제의 사망으로 중국은 다시 혼란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혼란의 시대는 진승·오광의 난(기원전 209년)을 계기로 정점을 행해 치달았다.

혼란의 시대를 끝내려는 군웅(群雄)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그 중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 초나라의 항우였다.

초나라의 항우는 역발산(力拔山, 힘이 산을 잡어 뽑는다)이라고 불릴 만큼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던 장사(壯士)였다.

초나라 귀족의 혈통으로 힘뿐만이 아니라 명분에서도 다른 군웅에 비해서 앞섰다.

초나라 항우와 끝까지 결전을 벌였던 한나라 고조 유방은 항우와 달리 할 일 없이 이일 저일 기웃대는 건달이었다. 유방에게는 처음에 힘도 명분도 없었다.

그러나 유방에게는 본인의 ‘없음을 이해’하는 유연함이 있었다.

항우는 힘과 명분이 있었기 때문에 남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었다.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은 남을, 아니 세계를 관찰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남을 관찰하지 않는 사람은 뻣뻣해진다.

항우와 유방의 차이는 세계의 변화를 관찰하느냐, 관찰하지 않느냐로 나타난다.




한고조 유방이 초나라 항우를 물리치고 황제 즉위식 이후 축하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장량(張良)처럼 교묘한 책략을 쓸 줄 모른다. 소하(蕭何)처럼 행정을 잘 살피고 군량을 제 때 보급할 줄도 모른다. 그렇다고 한신(韓信)처럼 병사들을 이끌고 싸움에서 이길 자신도 없다. 하지만 나는 이들의 훌륭함을 알고 기용했다. 내가 항우보다 나은 것은 사람을 알고 그들의 말을 듣는 것이다.”

사람을 안다는 것, 이것은 세계를 관찰할 때 생긴다.


"심부재언 시이불견 청이불문(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이란 말이 있다.

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마음은 세계를 관찰하려는 의지에서 생긴다. 유방은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세계를 잘 관찰하고 다룬 사람이다.


사람에게는 모두 각자의 매력이 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매력이 있고 어떤 사람은 저런 매력이 있다. 그래서 사람과 어울리는 일은 항상 즐겁다.

유방은 사람을 관찰하고 그들과 어울린 반면 초나라 항우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 사람을 관찰하지도 사람과 어울리지도 않았다.

항우를 요즘 스타일로 말하면 자뻑이 심한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기에게 ‘뻑이 가 있으니’ 남의 말을 들을 필요도 이유도 없다.

남에게 귀를 기울일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성공의 기억이 더 이상의 성공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는 이유도 이런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중국 역사에 많은 군웅들이 할거했지만 유방처럼 매력적인 인물은 드물다.

역사에서 난세에 영웅이 탄생한다는 말이 있지만 서민 출신의 황제는 중국 역사에서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유방의 매력은 ‘이청득심(以聽得心, 귀 기울여 경청하는 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최고의 지혜)’이라 할 수 있다.

유방은 책사(策士) 장량과 소하, 한신 등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본인이 보잘 것 없었기 때문에 남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주위를 항상 살피고 관찰했다.

남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주변의 변화를 잘 살피는 것은 리더(leader)의 덕목 중 하나이다. 보스(boss)와 리더는 수준이 다른 인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스가 되고 싶어 하지만 대부분의 시대가 원하는 것은 보스가 아니고 리더이다.

보스는 뻣뻣하고, 리더는 유연하다.

뻣뻣한 것은 죽은 것이고, 유연한 것은 살아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고대 삼국 중 가장 힘이 약하고 영토가 작았던 신라가 결국 삼국통일을 하는 이유도 이러한 유연함에 있었다.

신라는 주변을 잘 살피고 관찰했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상황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항상 살펴야만 했다.

힘이 약한 나라가 외교를 할 때 일반적으로 지켜야하는 원칙이 ‘매우 영리하거나,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라는 전자에 해당한다. 매우 영리했다.

신라의 삼국 통일은 신라의 위기 속에서 발휘한 영리함의 결과였다.


638년 고구려는 현재 경기도 파주의 칠중성을 공격(1차 칠중성 전투)하였다. 신라는 어렵게 방어에 성공은 했지만 고구려가 한강 유역으로 밀고 내려온다는 긴장감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의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게 포위되어서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642년 백제의 의자왕은 현재 경상남도 합천의 대야성을 공격하였다. 대야성은 백제와 신라의 주도권이 어떤 나라에게 있는지 가늠자가 되는 핵심 요충지이다.

백제는 대야성 전투에서 승리했고 신라는 대야성 전투의 패배로 서부 국경 지대 대부분을 상실하였다. 당시 신라의 왕은 선덕여왕이었다.

아래의 지도는 6세기 말의 국경선과 7세기에 변화한 국경선이다. 지도에서 북한산성 위의 칠중성과 경상남도 대야성이 위치를 보면 7세가 당시의 신라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642년 대야성 전투가 일어난 해에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옹립하였다.

영류왕과 연개소문은 당나라에 대한 외교 문제에 대한 이견으로 대립하였다.

영류왕은 이전 영양왕 대에 수나라와의 전쟁을 통해서 소모된 국력을 만회하기 위해 되도록 당나라와 전쟁을 피하고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다.

반면 연개소문은 천리장성을 축조(부여성~비사성, 631 축조 시작)하면서 당나라에 대한 강경한 외교적 입장을 고수하였다.

영류왕과 연개소문의 당나라에 대한 외교 입장 차이는 결국 연개소문의 쿠데타로 일단락되었다. 연개소문의 쿠데타 성공 이후 고구려는 당에 대한 강경한 외교 입장을 채택하였다. 신라는 이러한 고구려의 변화를 예의주시하였다.

당나라 또한 고구려의 이러한 태도 변화에 불만이 있었고 결국 당나라는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당나라의 고구려 원정은 안시성 전투(645)로 실패하였고 이후 당과 고구려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642년 대야성 전투 이후 신라는 백제의 팽창을 막기 위해 고구려와의 동맹을 시도하였다. 신라의 김춘추는 고구려의 연개소문을 만났다.

백제의 세력 팽창을 막기 위한 동맹을 연개소문에게 제안하였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당시 신라의 동맹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다.

고구려에게 백제는 위협 대상국도 아니었고 견제할 이유도 없는 나라였다.

당시 고구려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것은 당나라의 움직이었다.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연개소문의 쿠데타를 알고 있던 당나라가 어떻게 움직일지가 관심사였지 신라와 동맹을 맺어 백제의 세력 팽창을 막을 이유가 없었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신라의 김춘추의 제안을 거절하였고 오히려 김춘추를 감금하였다.

신라 김춘추가 고구려의 연합에 실패한 이 사건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내용이 있다.

외교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아니고 저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그것이 내가 원하는 것과 일치할 때만 저들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김춘추는 고구려와의 외교에서 배운 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당나라와의 외교 협상을 시도한다. 신라의 외교 전략가인 김춘추는 고구려와의 연합 실패 과정에서 학습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당나라도 백제의 세력 팽창을 막을 이유가 없었다.

당나라에게 백제는 크게 관련이 없는 나라였다. 그러나 김춘추는 당나라에게 백제가 왜 당나라와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김춘추는 당나라의 태종에게 과거 수나라의 고구려 공격이 왜 실패했는지, 당나라의 안시성 전투가 왜 실패했는지를 이야기하면서 보급 문제를 거론하였다. 원활한 보급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원정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였다.

만약 당나라의 고구려 원정이 시작되면 신라가 배후에서의 보급과 후방 지원을 약속했다.

그런데 김춘추는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를 당나라 태종에게 이야기했다.

당나라의 고구려 공격 과정에서 신라의 보급과 후방 지원이 일어나면 당시 신라와 관계가 좋지 않던 백제가 신라를 공격할 수 있음을 설명했다.

김춘추는 당나라가 왜 백제를 공격해야 하는지를 설명한 것이다.

그렇다. 바로 이 부분이 중요하다. 김춘추는 한반도의 주도권 싸움에 당을 끌어들인 것이다.

당나라는 충분히 당시의 상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라의 논리가 매우 정확하다고 판단하였다. 이렇게 신라는 당과 나·당 동맹을 체결(648)하였다.


진덕여왕 2년(648) 이찬 김춘추와 아들 문왕을 당 나라에 파견하였다.

(줄임) 하루는 태종이 김춘추에게 소원을 물었다. 김춘추가 말했다.

“신의 나라가 대국을 섬긴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백제는 강성하고 교활하여 침략을 일삼아 왔습니다. 더구나 지난해에는 대군을 거느리고 침입하여 수십 개 성을 점령하여 대국에 입조할 길을 막았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군사를 보내 그 흉악한 무리들을 없애지 않는다면 우리나라 백성은 모두 포로가 될 것입니다. 육로와 수로를 거쳐 섬기러 오는 일도 다시는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태종이 크게 동감하고 군사를 보낼 것을 허락하였다.

- 『삼국사기』




신라의 김춘추는 신라 삼국통일의 판을 짰다.

『삼국사기』에 나타난 나·당동맹의 필요성은 매우 간단하다.

신라가 당나라에 계속적인 사대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신라를 위협하는 백제를 당나라가 없애주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백제는 당나라가 바다를 통해서 백제를 공격한다는 사실은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다.

백제의 입장에서 보면 당나라가 백제를 공격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백제의 외교적 안일함이 백제를 10일 만에 멸망시켰다.

고구려 연개소문은 당시 쿠데타로 집권한 고구려의 국내 상황을 정리하면서 신라의 움직임을 대수롭지 않게 보았다.

반면 신라는 고구려의 정치적 변화, 당나라의 고구려 원정 실패, 백제의 세력 팽창을 놓고 깊은 고민을 하였다.

신라의 나·당 연합 추진은 『전국책(戰國策)』에 나오는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사례가 된다.

원교근공은 중국의 진(秦) 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때 썼던 외교 정책으로 ‘먼 나라와 우호 관계를 맺고 가까운 나라를 공격한다.’는 뜻으로 중국의 진나라는 멀리 떨어져 있던 제(齊) 나라와 우호 관계를 맺고 가까이 있던 한(韓) 나라, 위(魏) 나라를 차례로 정벌하였다.

그런데 원교근공의 외교 정책의 아이러니는 가까운 나라를 차지하게 되면 우호관계였던 먼 나라가 가까운 나라가 되면서 결국 새로운 정벌 대상 국가가 된다는 것이다.

신라의 삼국 통일 과정에서도 가까운 백제와 고구려가 차례로 멸망한 이후 가까워진 당나라와 신라는 싸워야 했다.

삼국통일 과정에서 나·당 전쟁(670~676)이 발발한다.

신라는 나·당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결국에는 삼국 통일의 대업을 달성했다.

나·당 전쟁 과정에서도 신라는 당과의 전쟁 중에도 외교적 협상도 추진하였다.

672년 석문 전투에서 크게 패한 신라의 문무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한다.

“죽을 죄를 짓고서 삼가 아룁니다. 몸을 가루로 만들고 뼈를 바순다고 하더라도 큰 은혜에 보답하기는 부족하고, 머리를 깨뜨리고 티끌처럼 재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자애로운 도움을 갚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당나라에게 편지와 함께 금은보화를 바쳤다. 그런데 이는 신라의 시간 벌기용이었고 사실은 전쟁을 이어가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신라의 사죄를 통한 기만전술은 당나라에게 먹혀들었고 당(唐) 나라는 결국 나·당 전쟁에서 신라에게 패배(676)하였다.

또한 신라는 나당 전쟁 과정에서 멸망한 백제, 고구려의 유민과 연합해 당나라를 괴롭혔다.

신라는 나·당 전쟁 중에 지속적인 화전양면책을 펼치면서 전쟁과 외교를 병행하였고 결국 원교근공 한계를 극복하면서 삼국 통일의 대업을 달성하게 되었다.




이제 시계를 돌려 현재로 오자.

지금의 대한민국 상황은 어떠한가.

1990년대 초 소련의 붕괴 이후 40년 넘게 이어져 온 미국의 일극 체제에 균열이 일어나고 있다.

중국의 놀라운 경제 성장과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는 러시아의 전쟁은 미국의 일극 체제의 균열을 야기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이러한 새로운 냉전 구도 속에서 영민하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

외교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펼쳐진다.‘ 절대로 다른 나라를 도와주기 위해 외교를 하는 나라는 없다.

만약 어떤 나라가 대한민국에 도움을 준다면 그것은 반드시 자국의 이익과 부합하기 때문일 것이라는 의심을 해보아야 한다.

우리나라와 같은 지정학적 위치를 가진 나라는 일방적으로 한 나라를 믿거나, 일방적으로 한 나라를 미워하는 일은 자국의 이익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면 상황은 항상 변하고 그들은 그 변화에 따라서 항상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예전 어렸을 적에 친구와 심하게 싸운 뒤 싸운 친구를 욕하자 나의 외할머니는 나에게 여기 앉아보라며 두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석아! 그 친구도 너만큼은 생각한다, 사정이 있었을 게다.”


그렇다. 다른 나라도 대한민국만큼은 생각한다. 그래서 외교는 어렵다.

대한민국이 항우와 유방 중에 누구의 전략을 택할 것인지.

대한민국이 고구려, 백제, 신라 중 어느 나라의 전략을 택할 것인지는 예전처럼 지도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