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이야기 - 옥수수의 알레고리

김영하의 <옥수수와 나> (2012년 이상 문학상 대상 수상작)

by 이중석


1. 사회진화론으로 본 옥수수의 알레고리(allegory)


김영하의 <옥수수와 나>는 결말 부분에서 소설가인 ‘나’가 ‘옥수수’로, 출판사 사장이 ‘닭’으로 변하면서 끝을 맺는 이야기이다.

‘옥수수와 나’, ‘옥수수와 닭’의 관계망을 분석하면 옥수수와 닭이 가지고 있는 알레고리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기존 문학에서 보여주던 보편적 ‘옥수수’의 알레고리가 사뭇 다른 의미로 확장된다.

기존 문학에서 ‘옥수수’가 가지고 있는 알레고리는 ‘번영’이나 ‘풍요로움’을 가지고 있는데 반해 이 작품에서의 ‘옥수수’는 상반된 의미 속에서 텍스트를 구성한다.


옥수수에 붉은 솔이 늘어진 것이 꼭 등에 업힌 어린아이와 같다.

언제 보아도 그것이 어린애 같았다. 옥수숫대는 어린 것이 잠이 깰 새라 하고 고이고이 업고 있었다.

- 이광수, 「여름의 유머」


옥수수 밭은 일대 관병식입니다. 바람이 불면 갑주 부딪치는 소리가 우수수 납니다.

- 이상, 「산촌여정」


아이는 옥수수를 좋아했다.

옥수수를 줄줄이 다음다음 뜯어먹는 맛이 참 재미도 있다.

알이 배고 줄이 곧은 자루면 엄지손가락 켠의 손바닥으로 될수록 여러 알을 한꺼번에 눌러 밀어 얼마나 많이 붙은 쌍둥이를 떼어 내나 누이와 내기도 했었다.

- 황순원, 「별」


이광수의 경우 옥수수는 ‘옥수숫대는 어린 것이 …… 업고 있었다’라는 표현이 암시하듯이 어린 것, 곧 자라는 생명을 상징한다.

이상의 경우 옥수수는 병정들에 비유된다.

옥수수의 전통적인 상징과는 다소 동 떨어지는 것 같지만 ‘관병식’이 암시하는 것 역시 크게 보면 번창하는 힘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는 일반적인 상징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황순원의 경우 옥수수는 그야말로 풍요하고 행복한 삶을 상징한다.

그것은 이 소설에서 옥수수 알을 먹는 장면이 풍요와 행복을 표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존 문학 작품에서 보여주는 옥수수의 알레고리와는 다른 ‘옥수수’가 김영하의 작품 속에서는 펼쳐진다.

그렇다면 『옥수수와 나』에서의 ‘옥수수’의 알레고리가 어떻게 만들어져가고 있는지 텍스트를 통해 알아보자.

또한 이 작품 속에서의 ‘옥수수’가 기존의 ‘옥수수’와 다르게 변주되고 있는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닭’(출판사 사장)의 역할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옥수수와 닭’의 관계망을 어떠한 방식으로 구축해내고 전개시키느냐가 중요하다.


‘옥수수와 닭’의 관계망을 구축해내기 위해 주시한 이론은 사회진화론이다.

사회진화론은 현대 자본주의의 약육강식, 적자생존, 우승열패의 구조적인 관계망을 설명하는 데 유용한 이론이다.

사회진화론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을 만들어내는데 활용되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여 사회를 발전시킨다는 사회진화론의 핵심 논리는 원래 다윈의 생물진화론을 바탕으로 성립되었는데, 이는 독점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제국주의를 유지·발전시키는데 큰 기여를 한다.


<옥수수와 나>에서 ‘옥수수’는 적자생존의 생태 역학관계 속에서 볼 때 한 없이 약한 존재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옥수수는 팝콘이 될 수도 있고, 닭의 모이가 될 수도 있다.

작품 속 주인공인 소설가 ‘나(박만수)’는 옥수수가 된다.

또한 작품의 시작 부분에서 자신을 옥수수라고 믿는 정신병자 이야기를 보여주는데 이는 소설 전체의 내용의 복선을 깔아주는 중요한 장치로 읽힌다.




[본고의 인용문은 제36회 이상 문학상 전집]


한 정신병원에 철석같이 스스로를 옥수수라 믿는 남자가 있었다.

오랜 치료와 상담을 통해 자신이 옥수수가 아니라는 것을 겨우 납득한 이 환자는 의사의 판단에 따라 귀가 조치되었다. 그러나 며칠 되지도 않아 혼비백산 병원으로 되돌아왔다.

“아니, 무슨 일입니까?”

의사가 물었다.

“닭들이 나를 자꾸 쫓아다닙니다. 무서워 죽겠습니다.”

환자는 몸을 떨며 아직도 닭이 자기를 쫓아오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하면서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의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안심시켰다.

“선생님은 옥수수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거, 이제 그거 아시잖아요?”

환자는 말했다.

“글쎄, 저야 알지요. 하지만 닭들은 그걸 모르잖아요?” (12쪽)


소설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글쎄, 저야 알지요. 하지만 닭들은 그걸 모르잖아요?”에서 보듯 환자는 자신이 옥수수가 아니라는 자아의 인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닭(타자)의 인식이 더 중요함을 보여준다.

그렇다. 본인의 믿음과 타자의 믿음을 저울에다 달아보면 타자의 믿음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무게가 더 크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타자의 믿음이 무게를 더 갖고 있는 것은 본인이 ‘약한 자’라는 인식에서 시작한다.

이 환자는 자신이 옥수수라는 착각을 하고 있는데 어쩌면 이 소설 전체를 관통시킬 수 있는 것이 이러한 착각이다.

주인공인 소설가 박만수는 출판사 사장과 전처와의 관계를 의심한다.

아니 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확신을 가지고 있다.

결국 이 확신은 나중에 주인공의 착각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착각이 단순한 개인의식 속에서 발생한 착각이 아니고 사회적 역학관계 속에서 발생한 착각이라고 접근하는 것이 이 작품의 전체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처음에 소개한 이 꽁트는 사회적으로 ‘약한 자’의 생활은 본인의 생각과 활동과는 상관없이 ‘강한 자’의 생각과 활동에 의해서 결정되며, 사회 구조와 흐름 또한 그렇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자본가를 대표하는 출판사 사장 앞에서 자신이 쓴 소설의 예술성은 결정된다.

본인이 아무리 예술이라고 말해도 현실에서 ‘예술이냐 쓰레기냐’는 출판사 사장에게 전적으로 위임되어 있다.


사장이 원고를 책상 위에 던졌다.

“(인용자 전략) 이 소설에 대한 내 생각은 이래. 이건 쓰레기야. 나를 엿 먹이려고 쓴 그런 글이란 말이지.”

“도대체 이런 소설을 쓴 저의가 뭐야?”

“쓰레기라니요? 이해가 잘 안되네요. 물론 이소설의 창작 동기가 불순, 아니 불명확했던 것은 저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막상 쓰기 시작하자 신비스러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작가들이 어느 정도는 겪는 현상입니다만 작품이 작가 자신을 배반해버리는 것입니다. 이번 경우에는 저 작품이 저 자신을 초월해, 저의 비천한 문재(文才)와 사상을 훌쩍 뛰어넘어 저 홀로 놀라운 지경으로 가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이 원고는 작가 박만수가 쓰는 것이 아니라 저의 손을 빌려, 아기 예수가 성모마리아의 몸을 빌려 이 세상에 오셨듯이, 이 세상에 지금 오고 있는 것입니다. (59쪽)


자본의 위력은 이렇듯 소설 작품의 예술성까지 결정한다.

사장은 ‘나’를 죽이는 행위 자체도 돈을 벌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생각한다.

이 부분에 사회진화론의 핵심 전언이 숨어 있다.

사회가 발전되고 있는 것이 겉으로는 모든 이들에게 보다 나은 삶을 제공해 줄 것 같지만 안으로는 ‘강한 자’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가고 있는 과정인 셈이다.

출판사 사장은 주인공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이렇게 말한다.


작가 박만수의 마지막 작품. 미완성 유고 소설이라고 선전하면 계약금은 회수할 수 있겠지. 뭐, 운이 좋다면 꽤 많이 팔릴 수도 있겠어.

아, 뉴욕에서 총 맞아 죽기 전까지 쓰던 소설이라고 언론에서 떠들면 좀 더 나가려나?

이미 원고지 천 매가 넘는 것 같던데. 그럼 신국판으로 뽑아도 삼백 페이지는 나올 거고, 오히려 어설픈 후반부가 없으니 독자들은 마음대로 상상하겠지.

아, 완결됐다면 걸작이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하면서 아쉬워도 하겠고. 아무리 봐도 이게 최선이야. 박 작가는 이쯤에서 요절해주는 게 그간 써온 작품들의 운명을 위해서도 좋을 거야. (62쪽)


원래부터 이 작품 속의 ‘나’는 아이러니 속에서 작품을 쓰기 시작한다.

‘잘 써도 낭패, 못 쓰면 개쪽’인 심정으로 소설 집필을 시작하는데 이 아이러니는 자본가에게는 어떠한 논리적 저항을 해보아도 결국 이용당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아이러니로 파생된다.

‘나는 옥수수’이고, ‘사장은 닭’이 된다는 것은 ‘나’와 ‘사장’ 사이의 권력 관계를 상징한다.

이 부분에서 조금 깊이 있게 들어가면 현실과 상징계 속의 차이가 발생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현실 차원에서는 ‘나’는 사람이거나 옥수수이거나 둘 중에 하나가 되지만, 상징계 속에서의 정체성은 결국 질서에 귀속된다.

상징계 속의 정체성은 결국 ‘강한 자’와 ‘약한 자’의 질서 속에서 만들어지며 우리는 이 질서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쯤에서 작품 속의 구조를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정리해 보면

이 구조에서 집중해야 될 부분은 텍스트에서 강조하고 있는 옥수와 닭의 관계이다.

옥수수는 닭에게 있어서는 ‘모이’다. 그러므로 닭은 ‘모이’를 쪼아 먹으며 배를 채운다.

이러한 작품 속 상징들을 계급 구조와 사회적 역학관계로 연결시켜서 이해해 보면 소설의 텍스트가 강한 짜임새와 단단한 밀도를 갖게 된다.

즉,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을 쪼아 먹으며 배를 불리는 부르주아지나 약한 자를 쪼아 먹는 강한 자나 어떤 식으로 분석을 하던 간에 텍스트는 명징하게 내용을 전달한다.

김영하의 <옥수수와 나>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한 명의 소설가가 겪는 단순한 얼개에도 불구하고 ‘옥수수’가 기존 문학작품에서 보여주지 못한 새로운 상징을 ‘닭’과의 관계망 속에서 새롭게 탄생시키면서 문학 작품에서의 새로운 알레고리를 탄생시켰다.




2. 섹스와 글쓰기의 아날로지(analogy)

<옥수수와 나>의 또 하나의 중요성은 섹스와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김영하는 이 작품에서 왜 섹스와 글쓰기를 번갈아 가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섹스와 글쓰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날로지에 있다.

인간이 섹스를 하는 기본적인 목적은 종족 번식이다.

물론 인간의 섹스가 종족 번식을 위한 목적으로만 행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굳이 이 부분에서 언급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글쓰기가 가지고 있는 기본 목적은 무엇인가.

예전부터 인간이 글을 써 왔던 기본적인 목적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인 생각과 관념을 남기고 싶은 것이다.

섹스가 자신의 육체적 DNA를 남기는 것이라면 글쓰기는 자신의 정신적 DNA를 남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섹스 과정에서 느껴지는 것들이 글쓰기 과정에서도 나타날 수밖에 없다.

또한 작품 속 주인공의 친구인 철학이 아래에서 말하는 대로 섹스와 소설은 관념을 처리하는 공통점을 가진다.


‘나는 섹스를 한다’라는 무거운 관념을, 덤프트럭이 모래를 쏟아놓듯 훌훌 던져버리고 홀가분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22쪽)

“너는 관념에서 출발해 거기에 사실의 살을 붙여가는 일을 하잖아.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거기에 육체를 더하는. 그러니까 네가 뭐라고 떠들든 너 역시 관념을 먼저 처리해야 할 거야.”

(23쪽)


섹스와 글쓰기의 아날로지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는 부분은 주인공 ‘나’가 출판사 사장의 소유인 뉴욕의 한 아파트에서 사장의 아내(영선)와 나누는 격정적인 섹스와 그 섹스와 함께 미친 듯이 소설을 쓰는 부분이다.

영선과의 섹스이후 ‘손가락 끝에 작은 뇌가 달린 것’처럼 미친 듯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문장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하고, ‘서사는 브레이크가 파열된 자동차처럼 폭주’하며, ‘모든 창작자들이 애타게 찾아 헤맨다는 에피파니의 순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글쓰기의 상황 속에서도 영선과의 섹스가 반복해서 이루어진다.

글을 쓰고 있는 ‘나'에게 영선은 계속 다가와 섹스를 요구한다.


나는 그녀를 향해 몸을 던졌다. 우리의 광포한 섹스에서 비롯된 소리가 저 거대한 환풍 장치의 소음을 압도할 지경이 되자 옆집에서 벽을 두드리며 항의했다. 그 순간에도 나의 손은 그녀의 몸 곳곳을 애무하면서 해독 불가능한 문장들을 무수히 그녀의 몸에 입력해 넣었다. (49쪽)


격렬한 섹스와 광적인 집필. 오직 그것뿐이었다. 예컨대 이런 장면들이 반복됐다.

책상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는 나를 향해 욕실에서부터 네 발로 기어오는 전라의 미녀. “제발 가까이 오지마. 나 지금 글 쓰고 있는 거 안 보여”라고 애걸하면서 강박적으로 몇 문장이라도 더 쓰려는 나.

그러나 마침내 책상 밑에 도달한 미녀가 잔뜩 발기한 내 성기를 입에 물고 즐거워한다.

마침내 참지 못한 나는 벌떡 일어나 그녀를 침대에 던진다. 잠시 후, 나는 다시 책상 앞으로 복귀한다.

절세미인과 벌이는 이 격렬한 섹스가 실은 책상 앞으로 돌아가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이라는 걸, 세상의 그 누가 알아줄 것인가? (52쪽)


섹스의 장면을 연상시키는 듯한 이 장면에서 김영하의 상상력은 빛을 발한다.

분명 작품 속에서 ‘나’는 소설을 쓰는 것과 섹스를 하는 것 사이에서 비슷한 경험을 한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섹스의 상대자가 사장의 아내라는 데 있다.

불륜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남편이 있는 여자와의 섹스는 윤리적으로 이상 성행위로 볼 수 있다.

프로이트의 이론에 따르면 ‘성인들의 성적 도착은 본성에 속한다.’고 보면서 사회적 금기에 깔린 이런 감정을, 바그너(Wagner)의 유명한 악극 「탄호이저(Tannhauser)」에서 재판관으로 나오는 백작은 다음과 같은 풍자시를 빌어 고백하고 있다.


비너스의 언덕(여성의 음부를 의미)에서 그는 명예도, 의무도 망각했다!

- 이상하도다, 우리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다니.

(『프로이트 정신분석학 강의』에서 발췌)


사회적 금기인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나’를 보면서 독자가 비밀적인 질투심을 느낀다는 프로이트 이론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불륜이 가지고 있는 질감 자체로도 극적 긴장감과 흥미를 유발 시킨다.

그렇다면 불륜과 글쓰기의 유사성을 통한 접근도 흥미 있는 분석이 될 수 있다.

불륜은 ‘사회적 금기’이다. 이러한 금기를 넘는 것을 통해 인간은 긴장과 흥미를 느낀다.

자신이 금기를 넘는 사람이든 금기를 넘지 않는 사람이든 간에 양자 모두 같다.

글을 쓰는 행위가 사회적 금기는 아니지만 글을 쓰는 과정에서 ‘사회적 금기’를 무너뜨리는 일은 쉽다.

작품 속에서 ‘나’가 쓰고 있는 소설은 시작부터 ‘음란하고도 난해하면서 기괴한 성적 모험을 하는 남자’ 주인공을 등장시킨다.

그 남자 주인공의 ‘변태적이고 어지러운 의식의 흐름’에 따라 소설의 내러티브가 이루어지는데, 이는 ‘나’가 소설을 쓰면서 ‘사회적 금기’를 무너뜨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작품속의 주인공 ‘나’는 현실에서 사장의 아내와 섹스를 하면서 본인이 쓰고 있는 소설 속의 주인공도 자기와 비슷하게 사회적 금기를 무너뜨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섹스와 글쓰기, 혹은 불륜(성적 도착)과 글쓰기의 아날로지에 대한 의도적 장치로 해석된다.

또한 <옥수수와 나>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제각기 다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인물들이라는 점도 주목해 볼 만 하다.




등장인물들의 복잡한 불륜의 관계망을 구조화 시켜 보면 다음과 같다.



등장인물들의 이러한 복잡한 불륜 관계망은 ‘나’가 쓰려고 했던 소설의 ‘음란하고 실험적이면서 해체적인 난해한’ 내용을 투영한다.

이렇듯 텍스트에서 다루고 있는 섹스와 불륜, 그리고 글쓰기에서 상당한 아날로지를 발견할 수 있다.





3. 변신 모티브에 나타난 자기동일성(identity) 거부

<옥수수와 나>의 백미는 단연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 ‘나’가 옥수수로, ‘사장’이 닭으로 변하는 부분이다.

이러한 환상이 읽는 독자에게는 다소 초현실적인 느낌을 주면서 리얼리티를 감소시키는 경향도 있겠지만 문학에서의 변신 모티브의 차용은 문학의 주제와 심미적 특성을 강조할 수 있다.

변신의 사전적 의미는 다양하지만 본고에서는 ‘몸의 모양을 바꿈’ 정도로 이야기해도 좋을 듯하다.


<옥수수와 나>에서의 변신에 대한 고찰은 ‘변신을 일으키는 외적요소’와 ‘변신 후의 변신체가 갖는 기능적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첫째로 ‘나’가 옥수수로 변하는 ‘외적요소’는 당시의 상황에 기인한다.

사장의 아내와 섹스를 한 행위를 사장에게 들키면서 ‘나’는 죽음에 직면하게 된다.

‘나’는 사장이 관자놀이를 쿡쿡 찌르자 잠에서 깨어난다.

잠이 깬 ‘나’의 옆에는 사장의 아내인 영선이 같이 있다.

변명도 통할 수 없는 불륜의 현장을 들킨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 ‘나’와 영선은 둘의 관계를 변명하며 섹스관계를 부정한다.

그러다가 사장이 침대 옆 휴지통에서 콘돔을 발견하면서 둘의 관계는 적나라하게 밝혀진다.

이 상황에서 ‘나’가 살 수 있는 방법은 소설을 열심히 썼다는 것 밖에 없다.

그러나 소설을 읽은 사장은 소설을 ‘쓰레기’라고 말하며 ‘나’에게 권총을 들이댄다.

이후 사장은 죽는 방법을 ‘약을 먹는 방법’과 ‘총에 맞아 죽는 방법’의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나’는 ‘약을 먹는 방법’을 선택하고 약을 먹은 후 옥수수로 변한다.

그리고 이때 사장은 닭으로 변하는데, 옥수수는 ‘닭의 모이’이다.

즉, 변신의 ‘외적요인’은 죽음에서 빠져나가기 어려운 상황에 있다.

변신 모티브를 가지고 있는 텍스트에서 일차적으로 고찰해야 할 것은 변신이 일어나는 상황과 그 이전, 그 이후의 인물의 변화, 곧 서사적 맥락에서의 분석이다.

이러한 요인분석을 통해 변신이 이루어지는 이유, 변신의 필연성을 알 수 있으며, 변신을 인식적 탄생으로서의 변신, 트릭스터로서의 변신의 두 가지 경우로 나누어 전자는 질적인 변화, 존재론적 층위의 변화와 관련된다면 후자는 신적 존재의 기본 층이나 질적인 측면이 달라지는 변신이라 한다.

이 작품 속에서의 변신은 인식적 탄생으로서 분석하는 것이 올바르다.


둘째는 ‘변신 후의 변신체가 갖는 기능적 변화’인데, 변신하는 대상 주체가 자아를 탐색하는 과정이라고 가정할 때, 자아와 타자성의 탐색을 통해 주체의 ‘변화하고자 하는 경향’이 결코 우연적이지 않고 그 자체가 그러한 경향을 내포하는 ‘잠재성’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 잠재성은 주체의 무의식 욕망에 동조하여 실재적인 움직임을 갖게 됨으로써 옥수수로 변한 ‘나’의 무의식 속에 옥수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주인공의 무의식은 ‘나’가 전처와 헤어진 후 카페에서 ‘나는 이제 옥수수가 아닌데, 정말 옥수수가 아닌데, 그런데 수지가 그걸 모르고 있으니, 내가 이제 더 이상 옥수수가 아니라는 사실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부분에서 확인 된다.

즉, ‘나’는 전에는 옥수수였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 잠재성이 위급한 상황에서 ‘나’를 옥수수로 변하게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옥수수의 나>의 작품 속 변신 모티브가 가지는 변신의 의미에 대해서 접근해 보자.

문학에서 변신의 의미는 어떤 주체가 자신이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진정한 자신을 위해 자기동일성을 거부하면서 인간이 스스로의 정체성과 존재성을 탐색하는 ‘온전한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는 과정인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존재성을 탐문함으로써 자신을 둘러싼 주변에서 자신에게 가하는 타자성을 통해 새로운 주체로 변하려는 욕망이 변신을 불러일으킨다.


<옥수수와 나>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나=옥수수’라는 등식은 나도 아닌 옥수수도 아닌 자기동일성 거부를 하고 있는 ‘나’를 통해서 현대인들에게 존재성을 탐색해 보라는 메시지가 숨어 있는 듯하다.

여기서 <옥수수와 나>의 두터운 질감을 다시 한 번 더 느낄 수 있으며, 이러한 변신 모티브를 통해서 김영하가 던지고 있는 핵심 전언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옥수수와 나>를 분석한 이 글을 읽고 <옥수수와 나>가 읽고 싶어지는 독자가 한 분만이라도 생기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