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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befree May 02. 2022

점심시간은 근무시간이 아니다?

지긋지긋한 점심시간.

공무원의 1주간 근무시간은 점심시간을 제외하고 40시간으로 하며, 토요일은 휴무함을 원칙으로 한다.

지방공무원 복무규정이다. 근무시간에서 점심시간은 제외한다. 점심시간은 당연히 근무시간이 아니지만, 그래도 왜라는 의문이 든다. 직장인의 점심시간이란 편안한 마음으로 느긋하게 점심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은 아니다. 근무시간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사실 근무시간으로 느껴질 때가 더 많았다.




직원들이 다 같이 모여 점심을 먹던 동사무소에서 밥 당번이란?

동사무소의 명칭이 행정복지센터로 바뀌었지만 편의 상 동사무소로 쓰기로 한다.

모든 동사무소가 그렇지는 않지만 직원들이 다 같이 점심을 먹는 동에서 일한 적이 있다. 그 동사무소에서 동 서무는 직원들의 점심을 챙겨야 했다. 코로나가 심하지 않을 때는 식당을 예약하면 그만이었지만, 내가 동 서무를 맡을 즈음에는 코로나가 심해져 직원들 점심을 거의 배달시켜 먹었다.

동 서무의 역할은 온갖 동사무소의 살림을 맡아서 하는 업무라고 보면 된다. 프린터, 컴퓨터, 복사기 고장은 물론 화장실 고장, 캐비닛 고장, 출입문 고장, 전화가 안 되는 것 등 온갖 불통들이 있을 때마다 동 서무를 찾곤 한다. 대부분 서무와 회계 업무를 같이 맡고 있기 때문에 직원들 월급, 초과 수당, 출장 수당 등 지출업무와 사무용품 구입 등 장보기 업무도 한다. 코로나로 인한 추가 업무도 많았고, 2월이 되면 갑자기 살아나는 민원 업무도 맡고 있었다. 또 동사무소 내의 온갖 불통들 때문에 업무가 밀려 인생 최대 목표인 칼퇴근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시기였다.

그중 제일 스트레스받는 업무는 코로나로 인한 점심 배달 주문이었다. 코로나로 인해 배달량이 많아져, 12시 정각에 점심을 먹으려면 늦어도 11시까지는 주문을 완료해야 했다. 메뉴 선정을 2-3개 정도 하고, 동장님과 팀장님께 점심 약속 여부와 메뉴는 괜찮은지를 여쭤본 뒤, 직원들에게 메신저로 메뉴를 받았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여러 사람들에게 불호가 없을만한 메뉴를 매일 다르게 선정하고, 메뉴 결재를 받아 수합하는 일이 오전 시간을 다 잡아먹었다. 오늘 점심을 먹고 나면 집에 가는 지하철에서 내일 점심 메뉴 생각을 했고, 직원들이 약속 여부와 메뉴를 빨리 보내주지 않아 12시까지 배달이 안될까 혼자 전전긍긍하기도 했다. 점심에만 진심이었던 것은 아니고, 육아 휴직 후 복직한 동에서 여러 불통들이 계속 불통인 것을 보고 상처받아 점심뿐 아니라 다른 업무에도 진심이었다. 서무를 맡는다면 저러지 말아야지 하며 모든 것을 바로 처리하려다 보니 더 힘들어졌다. 배달 대신 팀별로 점심을 먹자고 해도 될 일을 성격 상 그 한마디 못했다.

동 서무를 맡을 때 필요한 것은 약간의 밀고 당기기가 아닐까 싶다. 여러 문제들이 바로 처리해야 되는 상황이 아니라면 나의 업무부터 먼저 하는 게 순서이다. 안 그러면 내부 민원을 처리하느라 나의 고유 업무는 끝이 안 날지도 모른다.




밥 당번이 없는 곳에서의 점심시간이란?

그렇게 지긋지긋한 동 서무를 하다 구청으로 인사가 났다. 이제 점심을 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일이 많든 적든 구청으로 가고 싶었다. 우리 과에서는 모두들 자기 일에 몰두하느라 아무도 나에게 말을 시키지 않았다.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불려 다니다 아무도 말을 시키지 않으니 너무 좋았다. 심지어 점심시간에도 말을 시키지 않았다. 지금 있는 과의 특성상 점심 약속은 자유로운 편이다. 눈치게임에서 실패해 모두가 약속이 있고 나만 혼자 남겨질 때도 많다. 핵 아웃사이더인 나는 친한 사람도 많이 없거니와 굳이 먼저 점심 약속을 잡지 않는다.

혼자 먹는 것이 편하긴 하지만, 거의 30년 이상 같은 곳에서 근무해야 하는 지방공무원의 특성상 혼자 밥을 먹고 있자면 조직 부적응자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매일 그렇지는 않으니 괜찮다. 오지랖 넓게 나도 혼자 먹는 주제에 혹시 우리 팀에 혼자 남겨지는 사람이 있을까 봐 신경도 쓴다. 이래서는 집단보다 개인을 중시하는 MZ세대가 될 수 없다고 느낀다. 혼밥 할 때나 친한 사람들과 맛있는 점심을 먹을 때 점심시간이 근무시간에서 제외된다는 것에 납득이 간다. 

또 언제 지긋지긋한 밥 당번을 해야 할 날이 올지 모른다. 밥 당번을 할 때 좋은 상사는 아무거나 시켜도 괜찮다고 하는 상사와 그 보다 더 좋은 상사는 아침부터 메뉴를 정해주는 상사이다. 메뉴를 정해주기만 해도 시간이 훨씬 절약되고 제일 어른이 드시고 싶다는데 불만이 있어도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피할 수 없는 밥 당번이라면 다음에는 그런 상사를 만나길 바라본다. 그전까지 자유롭고도 외로운 점심시간을 즐겨야겠다. 밥 당번할 때와 혼자 먹어야 되는 지금을 비교하면 당연히 후자가 좋다.

외국처럼 자율성이 많은 점심시간이라면 근무시간에서 제외하는 것이 맞다. 

우리나라처럼 마음대로 점심을 먹기 힘든 곳에서 점심시간을 왜 근무시간에서 제외하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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