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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y golden age Feb 14. 2024

(1) 프라도 미술관 Museo del Prado

마드리드: 스페인의 궁정화가

프라도 미술관


12세기부터의 스페인 왕실 컬렉션과 이탈리아, 폴랑드르 등의 유럽 예술품을 소장하고 있는 프라도 미술관. 넓은 영토를 보유한 스페인 역사와 경제 중심지인 마드리드의 중요한 국립 미술관이다. 마드리드는 1561년 펠리페 2세 때에 수도가 되었고, 그 이전까지의 중심지역은 톨레도였다. 예술가들은 지리적으로 밀접한 톨레도와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교회와 왕실을 위한 예술 활동을 해왔고, 프라도 미술관은 이들의 역사를 보관하고 있다. 고대 이집트, 그리스, 로마 등 극동지역의 컬렉션은 인근에 있는 고고학 박물관에 따로 전시되어 있고, 프라도에는 회화와 조각을 전시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프라도 미술관은 역사상 가장 무능하고 비열하다고 평가받는 페르난도 7세 때인 1819년에 개장되었다. 왕이 예술에 관심이 있었던 거 같지는 않고, 포르투갈의 공주였던 두 번째 부인 마리아 이사벨의 뜻으로 왕실 박물관을 건립하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여왕으로 즉위한 지 2년 만에 사망한다.


(왼쪽) 고야의 조각상.  (오른쪽) 벨라스케스 조각상




프라도 미술관은 전반적으로 어둡고 무겁다. 비슷한 시기의 프랑스 그림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갤러리 복도 양옆 벽면을 가득 채운 대작들이 복도의 시작부터 끝까지 걸려있다. 스페인이 얼마나 대강국이었던가, 그림으로 압도당한다. 복도를 빠르게 지나 미로 같은 방으로 들어가면 스페인 대표 작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이곳에 남아있는 수많은 역사화들 중에 몇몇 작가의 작품에만 관심을 두고 본다는 게 미안할 따름이다. 네덜란드나 덴마크처럼 풍속화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스페인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금기가 끝나면서 프랑스의 침략을 받았고 이후에는 내란으로 혼란이 지속되었던지라 평화로운 일상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길 여유는 없었을 거다. 어두운 왕실 중심의 그림 속에서 왕족들의 의복이 눈에 뜨인다. 의복의 디테일이 엄청나게 화려하고 넥카라의 레이스와 프릴은 실제 패브릭처럼 섬세하게 묘사되었다. 패션 역사의 관점에서 왕실 초상화는 상당히 의미 있을 거 같다.


이 왕실 그림을 가장 많이 남긴 화가가 그 유명한 Diego Velázquez(1599-1660)이다. 그는 바로크시대의 궁정 화가로 펠리페 4세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당시 스페인 왕실 컬렉션은 상대적으로 조각품이 부족했기에 왕이 직접 벨라스케스에게 왕실 컬렉션을 보강하라고 지시한다. 이에 벨라스케스는 1629년과 1649년 두 번에 걸쳐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를 방문했는데, 이때 티치아노, 틴토레토, 베로네세 등의 작품과 기타 예술품을 대거 구입해 온다. 현재 프라도에 있는 이탈리아 작품 중 상당수는 벨라스케스의 안목으로 수집되었다. 그의 유명한 대표작인 <시녀들, 1656>과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의 초상화는 모두 이곳에서 만나 볼 수 있다. <시녀들>은 벽 한 면을 가득 채우는 대형 사이즈이다. 스페인 전성기에 활동한 벨라스케스는 공주의 초상화를 실물보다 예쁘게 그려내며 정략결혼이 성사되도록 물밑 작업에 기여한 일등공신이 아닐까 싶다.


<시녀들, 1656>


그보다 뒤에 유명했던 궁정 화가인 Francisco Goya (1746-1828) 작품도 관심 있게 보자. 고야는 43세에 궁중 화가의 자리까지 올라가며 화려하고 순탄한 삶을 살았으나, 46세에 고열로 인해 청각에 문제가 생기면서 지속적으로 고통을 받았고 동시에 스페인의 독립전쟁을 몸소 겪으며 암울함이 지속되었다. 그의 인생 키워드는 전쟁, 고통, 신경쇠약, 광기, 혐오, 은둔, 비관으로 함축될 수 있고, 심신의 괴로움을 어두운 그림으로 적나라하게 표현하였다. 전쟁은 모두에게 고통의 시간이었음을 화가를 통해서 느낄 수 있다. 카를로스 4세 때 수석 궁정 화가가 된 그는 왕족과 백작의 초상화를 수없이 그려낸다. 고야의 대표작인 <카를로스 4세의 가족, 1801>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 보기에는 화려하고 다복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왕족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고 해석한다. 국정을 좌지 우지 했던 마리아 루이사 왕비가 위세 당당하게 중심에 서 있고, 무능하고 국정에 대해 알고 싶지도 않았던 국왕은 의지박약 한 표정으로 먼 곳을 바라보며 옆에 서있다. 다가올 스페인의 운명을 암시하는 듯하다. 1808년, 왕실의 부패함에 민중은 분노했고 왕은 퇴위당한다. 그리고 이 혼란을 틈타 나폴레옹은 스페인을 점령하게 된다.  


<카를로스 4세의 가족, 1801>

미술관 서쪽 입구의 고야 청동 조각상을 자세히 보면 그의 발밑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여인의 대리석 조각상이 있으니 <마하>인 거 같다. <옷 벗은 마하, 1800> 그리고 <옷 입은 마하, 1805> , 이 두 점은 고야가 청각 장애로 고통받다가 잠시 호전되었을 즈음에 작업하였다. 이 당시에는 신화나 역사화에서 얼마든지 누드그림이 용인되었으나, 현실에서 여성 나체화는 그 당시의 종교관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범죄였다. 고야는 이 그림으로 인해서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궁정 화가 지위를 박탈당했고, 그림에 옷을 입혀 복원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그는 <옷 벗은 마하>를 보존하고 싶은 마음에 이 그림은 숨겨두고, <옷 입은 마하>를 새로 한점 그려 명령에 따랐음을 보여준다. 프라도에는 이 두 점이 나란히 걸려있다.



<옷 벗은 마하, 1800>  <옷 입은 마하, 1805>


고야는 서서히 청력을 잃어갔고 이는 그의 인생을 흔들었다. 그는 신경이 쇠약해졌고 이때부터 환상과 어두움을 보게 되었고, 가톨릭 교회의 부패한 실상을 고발한 종교화에서는 악마와 마녀가 등장한다. 또한 프랑스의 침공으로 폭력과 고문, 죽음의 실상을 보며, 전쟁의 고통 속에서 탄생한 그림이 <1808년 5월 3일>과 <1808년 5월 2일>이다. 1814년에 완성한 두 작품 중 5월 2일의 그림에서는 프랑스 군에 맞서 싸우는 스페인 시민의 모습이 그려졌고, 5월 3일의 그림에는 무력으로 진압하는 프랑스군과 처형당하는 시민의 절규하는 모습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마치 조명을 사용한 듯 스페인 시민 쪽은 밝게 처리하였고, 프랑스군은 어둡게 처리함으로써 무감각하게 살상하는 인간의 잔인함과 비통함을 극대화했다. 고야는 이 시기에 전쟁으로 인한 살육의 현장을 많이 그려냈고, 정물화조차도 사냥하여 숨이 끊어진 가축들을 쌓아놓고 끔찍하게도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죽음을 그려냈다. 그 와중에도 수많은 귀족들의 초상화 작업은 그대로 진행되었는데, 초상화에서는 담을 수 없었던 슬픔과 분노를 전쟁화와 정물화에 쏟아부은 듯하다. 마네가 고야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전쟁의 참상과 살육은 우리 역사에 늘 있어왔다.


(왼쪽) <1808년 5월 2일, 1814>.   (오른쪽) <1808년 5월 3일, 1814>


왼쪽. 마네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1868)> 런던내셔널 갤러리.      오른쪽 (1867년작품) Ny Carlsberg Glyptotek, Copenhagen


이후 고야 말년의 작품들은 그가 은둔생활을 하면서 그린 공포스러운 분위기의 <검은 그림> 시리즈이다.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1814년도에 페르난도 7세가 왕궁으로 복귀하였으나 정세가 나아지기는커녕 왕의 폭정으로 더 어려운 상황이 되었고, 고야는 1819년에 청력을 완전히 잃었다. 이때부터 고야는 사람의 얼굴을 일그러지고 기괴하게 표현하였고 인간에 대한 혐오감과 광기를 담아냈다. 그의 후기 작품들은 내가 굳이 이 작품들 앞에 서서 감상을 해야 하나 싶게 흉측하다.  <아이를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1823>은 검은 그림 시리즈 중에서도 최고로 기괴한 작품이다. 원래는 그의 집 부엌에 벽화로 그려놓고 이 그림을 보면서 식사했다고 한다. 왜 이런 그림을 그린건지 그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 시대로 돌아가서 우울증 약을 권하고 싶다. 원래 로마신화에서 ‘농경의 신’인 사투르누스는 덕 있는 군주로 여겨지는데, 이렇게 아들을 잡아먹는 괴물로 표현한 것은 그만큼 고야가 불안과 공포, 절망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거 같다. 그가 평탄했던 젊은 시절에 그린 예쁜 그림들을 비교해서 보면 한 사람의 그림이라고는 믿어지지가 않는다. 사람의 성향이 이렇게 극에서 극으로 바뀔 수 있다니,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굴복하면 나락에 빠질 수밖에 도리가 없나 보다. 그래도 고야는 이렇게라도 스트레스와 화를 표출하며 신이 허락한 그날까지 살아냈으니 나름 건강한 상태가 아니었을까.


<마녀의 안식일, 큰 숫염소, 1823> 프라도 미술관
왼쪽 <아이를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1823>                                                         오른쪽 <밀짚 마네킹, 1791>
왼쪽 <연, 1777> 오른쪽 <만자나레스 강변에서 춤을추다,1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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