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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y golden age Feb 17. 2024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

마드리드: 게르니카

Museo Nacional Centro de Arte Reina Sofía

국립 레이나 소피아 왕비 예술센터


프라도 미술관의 성화와 역사화가 너무 무겁다면, 인근의 현대 미술관을 방문해 봐도 좋겠다. 이곳은 16세기 펠리페 2세 때 병원으로 설립되어 1965년까지 사용되었다. 병원조차도 몇백 년 역사를 갖고 있구나. 1986년, 이 건물의 역사적 예술적 가치를 보존하기로 하면서 왕비의 이름을 사용하여 <소피아 왕비 예술 센터>로 헌정되었다. 이후 후안 카를로스 국왕과 소피아 왕비는 스페인 정부가 보존해 온 예술품과 스페인 현대미술관의 소장품들을 이곳으로 가져와 1992년에 국립 미술관으로 개관하게 된다. 미술관 내부 구조에서는 예전 병원의 모습이 느껴지고, 기다란 창문을 통하여 내려다 보이는 안뜰은 아늑해 보인다.



이곳에는 스페인의 대가 파블로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호안 미로, 후안 그리스뿐만 아니라 유럽 작가들의 20세기 현대 작품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프라도에 이어 이 미술관에서도 미술전공 유학생을 섭외해서 설명을 들으며 관람하였다. 이해하기 어려운 현대 미술품 속에서 처음으로 <다다이즘>을 구별할 수 있었다. 책에서만 보던 다다이즘, 의외로 되게 쉬운 개념이었다. 세계 대전을 겪으며 충격을 받은 예술가들은 삶의 근간이 되던 제도를 부정하고 전통적인 것에 반대하며 삐뚤어지기 시작했다. 사회적 도덕적 틀 안에서의 삶이 허무하게 느껴지며 모든 것을 뒤엎고 파괴하고 싶었다. 그들은 미술뿐만 아니라 음악 문학예술 전반에서 기존의 가치와 형식을 부정하고 비꼬며 세상을 바꾸고자 했다. 1952년 전쟁을 피해 스위스로 도피했던 예술가들은 모여서 붓과 팔레트, 캔버스, 그리고 캔버스 틀과 같이 구태의연한 낭만주의를 버리겠다고 선언한다. 이 분위기는 예술가들의 호응을 받으며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짧은 시간에 불같이 일어났다가 사그라든 운동이었지만 (1916-1922) 많은 사람이 영향을 받았고, 이후 초현실주의로 이어졌다. 아래 작품은 뉴욕에서 다다이즘을 이끈 Man Ray (1890-1976)의 작품이다. 1923년 처음 제작되었을 때의 제목은 <파괴되어야 할 물체> 였으나 1957년 파리의 다다 전시회에서 작품이 파괴된 후에 리메이크 되면서 <파괴할 수 없는 물체>로 제목이 바뀌었다. 초현실주의 화가 Salvador Dalí (1904-1989)의 그림은 언제 봐도 모르겠다.


만 레이  <파괴할 수 없는 물체, 1923-1933, 1982년제작>


살바도르 달리 <세니시타스 (작은재), 1928>


다다‘라는 이름도 별 뜻을 담고 있지 않다. 그들이 모여서 이름을 어떻게 지을까 하다가 사전에서 눈에 들어온 단어가 다다’였을 뿐 아무 의미가 없다. 다다이스트들은 캔버스에 이질적인 재료들을 오려 붙이고, 논리적이길 거부했으며, 전혀 아름답지 않은 오브제를 보여주며 아름답냐고 물었다. 우연히 나오는 결과물을 선호했고, 계획하고 생각하는 창작을 거부했다. 몬드리안의 추상미술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그는 선과 색채로 계획된 아름다움을 추구하였고, 다다이즘은 일부러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는다. 폐품이나 고철, 쓰다 버린 용품같이 이미 생산된 물건이라도 아름답다고 생각되면 그 자체가 예술품이 된다. 1917년 뉴욕에서 출품된 마르셀 뒤샹의 “샘”이 대표적인 사건으로 남아있다. 원본은 사라지고 16개의 복제품을 종종 만나 볼 수 있는데, 별로 반갑지도 않고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오브제이다. 현대미술품 중에 이상한 이미지와 의미 없는 요소들로 채워진 캔버스를 보면서 이해하려고 머리 아플 필요는 없다. 이런 작품들이 다다이즘 이려니 하고 보니 훨씬 편안하고 재미있게 다가왔다.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스페인의 대표 작가 Joan Miró (1893-1983)는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났다. 초현실주의 작가로 평가받는 그의 작품은 회화뿐만 아니라 사랑스러운 조각품과 도예품으로도 많이 접할 수 있다. 그의 고향인 바르셀로나는 스페인 동북쪽인 카탈루냐 해안 지역에 위치한 도시로 마드리드와는 역사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며, 지금까지도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하는 나라이다. 그는 일찍이 프랑스에 정착하여 고향을 오가며 작업을 했으나, 내전 때는 고향에 돌아올 수 없었다. 그의 초기 작품에서는 카탈루냐를 사랑하는 민족주의 성향이 보이고, 이후 스페인 내전으로 정치적 탄압을 겪으면서는 초현실적인 표현으로 억압당하는 심경을 표현했다고 한다. 그림만 봐서는 그런 마음으로 그렸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고향 바르셀로나에서 훨씬 더 칭송을 받는다. 그를 기념하는 미술관도 있고, 도심 곳곳에서 그의 대형 조각품을 볼 수 있다.


호안 미로 (왼쪽) <페인트, 1927>.                                                         (오른쪽) <흡연자의머리, 1925>


이 미술관에는 그 유명한 피카소의 <게르니카, 1937년>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이 작품은 1937년 4월 26일 스페인 내전 중에 반란군인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지원한 나치 독일이 스페인 게르니카 지역을 비행기로 폭격하여 수백 명의 민간인이 희생된 참상을 그린 대작이다. 가로 777cm 높이 350cm의 큰 캔버스에 그려진 인물들의 공포와 절망감이 가득 찬 눈망울과 몸짓은 전쟁의 참상과 슬픔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 이 작품은 1937년 7월에 파리 만국박람회의 스페인관에 전시되었고, 이 끔찍한 사건을 국제적으로 알리게 된다. 이후 작품은 영국과 스칸디나비아에서 전시되었고,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현대미술관 (MOMA)에 맡겨진다. 스페인 내전에서는 프랑코가 승리를 하였고, 반대파 수만 명이 처형되는 잔혹한 보복이 뒤따랐다. 피카소는 스페인에 자유와 민주주의가 확립되기 전까지는 <게르니카>를 스페인으로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게르니카>는 1981년까지 뉴욕 현대 미술관에서 가지고 있다가 프라도 미술관으로 반환되었고, 이후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이 개관하면서 이곳으로 옮겨져 자리 잡고 있다.




Pablo Ruiz Picasso (1881–1973)는 스페인 남쪽 바닷가 마을 말라가에서 태어났다. 피카소의 출생 신고서에는 그의 이름이 <Pablo Diego José Francisco de Paula Juan Nepomuceno Cipriano de la Santísima Trinidad Ruiz Picasso>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름이 길어서일까. 장수는 기본이고, 애인과 부인도 많았고, 미술 사조도 여러 개 만들었고, 작품도 엄청나게 많이 남겼다. 스페인은 전통적으로 부모의 성을 합쳐서 이름을 짓게 되는데, 조상들의 성을 정리하지 않고 다 붙이다 보니 이렇게 길어졌다고 한다. 피카소 부모의 성만 붙이면 Pablo Ruiz Picasso 가 되고, 이름은 Pablo, 아버지 성은 Ruiz, 어머니 성은 Picasso이다. 피카소는 19세 때 본인의 이름을 어머니의 성만 선택하여 Pablo Picasso로 정리했다.


피카소가 평생 남긴 작품은 셀 수도 없이 많지만, 그의 카탈로그에만도 16,000점 이상의 그림이 나와있다. 보통의 예술가들보다 몇 배나 많은 양이다. 또한 그가 사망했을 때 재산 목록에는 45,000점 이상의 예술품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는 동시대 예술가들과 작품을 교환하기도 했고,  구매도 많이 했다. 그는 프랑스에서 사망하면서 현금 대신 그의 컬렉션으로 프랑스 국가에 세금을 납부했고, 이 작품들로 파리에 피카소 미술관이 세워지게 된다. 많은 나라들이 현금대신 예술품으로 상속세등을 받기도 한다. 그의 고향 말라가와 바르셀로나에도 그를 기념하는 미술관이 있다. 이렇게 작품수가 많음에도 그의 작품 가치는 하락하지 않고 세계 최고의 가격을 유지하고 있으며, 스스로 그 기록을 계속 경신하고 있다.


그는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했으나, 이념을 뛰어넘어 인권을 수호하는 평화주의자였다. 피카소는 유엔과 미국의 한국전쟁 개입에 반대하며 <한국에서의 학살, 1951> 작품을 남겼다. 그래서 이 작품은 피카소의 정치적 성향을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라고 평가된다. 고야와 마네의 그림처럼 벌거벗은 여성과 어린이들이 두려움에 떨며 처형당하는 모습을 그리며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강하게 호소하고 있다.



스페인은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라는 명성답게 엄청난 컬렉션을 소유하고 있으며 세계적인 예술가들이 많이 탄생한 것에 반해서, 예술품 관리 시스템이 갖춰지기까지 다소 오랜 시간이 걸린 게 아니었나 싶다. 국가 정세가 오랫동안 혼란스러웠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전쟁도 많았고, 지독한 내전과 세계대전, 오랜 독재 정치로 짠한 마음이 드는 나라이다. 파리나 런던처럼 넘치지도 완벽하지도 않은, 어딘가 모를 허술함이 느껴지는 게 스페인 여행의 매력이 아닐까. 미술관 입구 앞에 맛있는 타파스 식당도 있으니 샹그리아도 마시며 <스페인 마을에는 별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조각품을 감상해 보자.


미술관 입구 Alberto Sánchez (1895-1962) <스페인 마을에는 별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1937 복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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