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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Golden Age

코펜하겐에서 만나보는 황금기 시대

by my golden age

보통 황금기 시대라 하면 당연히 태평성대였을 거라고 생각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덴마크의 황금기는 국가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 일반적으로 1800년부터 1850년경 까지를 덴마크의 황금기 시대라 보는데, 이 시기는 정치 경제 외교 전반에 걸쳐 고통의 시간이었다. 연속된 대형 화재와 전쟁의 여파로 1813년에는 국가 부도를 맞으며 큰 위기를 겪게 되었고, 주변국들이 나폴레옹과 연합하여 덴마크는 위축되고 급격하게 쇠퇴하였다. 이후 서서히 산업화가 시작되고 경제가 일어나면서 1848년에 덴마크에 민주주의가 도입되었고, 프랑스혁명의 영향으로 중산층이 강해진다. 이 시기에는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 건축, 음악과 발레, 문학, 철학, 과학 등 모든 분야에서 근본적인 발전과 창조력이 돋보이게 되었고, 새로운 계층인 엘리트들은 풍요로운 문화를 누릴 수 있었다. 그 유명한 동화 작가인 Hans Christian Andersen (1805-1875)도 이 시기에 활동하였다. 최악의 황폐함 속에서 예술의 꽃이 찬란하게 피어나다니, 그래서 황금기라고 칭한 것일까.

1700년대에는 예술의 정체성 확립은 어려웠다. 중산층뿐만 아니라 상류층도 예술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고, 공공기관에서도 작품을 사들일 형편이 안 되었다. 이미 종교개혁은 16세기 중반 덴마크에도 영향을 주었기에 종교 예술품의 수요도 줄어들었고, 굳이 예술가가 필요하면 외국 작가에게 의뢰하던 시기였다. 이때 프레데리크 5세 (1723–1766)는 과학 문화 예술을 지원하는 왕립 아카데미와 재단을 설립하고, 적극적으로 자국의 예술가들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초기 왕립 아카데미의 궁극적인 목적은 역사화를 그릴 수 있는 궁정 화가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덴마크는 오랫동안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향 아래에 있었고, 외국 화가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기에 국가적 차원에서 덴마크 화가를 배출하고자 했다. 그러나 교수진이 전부 외국인이다 보니 그 부작용으로 학생들의 회화 실력은 늘었으나 작품의 주제가 종교와 신화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덴마크 적인 특징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1780년에 들어서서야 덴마크 교수로 세대교체가 되었고, 1818년에는 덴마크 화가 C.W.Eckersberg 에케르스버그 (1783-1853)가 교수로 임명되며 활약하게 된다. 당시 덴마크에는 네덜란드와 같은 길드 조직이 없었기 때문에 왕립 아카데미 만이 유일한 등용문이었다. 에케르스버그는 이후 35년간 왕립 아카데미에서 미술뿐만 아니라 자연 예술 과학 철학 종교까지 가르치며, 지금의 대학교처럼 아카데미를 운영하였다. 덴마크 황금기 시대에 활동했던 화가들은 거의 대부분 에케르스버그의 제자라고 보면 된다. 아카데미에서 열리는 대회에서 선발되면 국비장학생으로 이탈리아 등 해외로 유학 다녀올 수 있는 제도가 있었다. 런던과 네덜란드에서도 뛰어난 화가가 될성싶으면 이탈리아로 유학을 보냈는데, 당시 최고 예술가로 인정받기 위한 엘리트 코스였나 보다. 에케르스버그 역시 일찍이 이탈리아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왔다. 이 때문에 이들의 풍경화에서 이탈리아 배경을 자주 볼 수 있고, 덴마크스러운 화풍은 아직 모호했다.


C. W. Eckersberg

(왼쪽) <A View through Three of the North-Western Arches of the Third Storey of the Coliseum, 1815> (오른쪽) <View of the Garden of the Villa Borghese in Rome, 1814>


에케르스버그는 로마에서 오일 스케치를 배워왔다. 덕분에 화가들은 스튜디오에서 상상으로 그리던 그림에서 벗어나, 야외에서 스케치하고 바로 현장감을 생생하게 담아내는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튜브에 담긴 물감이 생기면서 야외 작업이 시작된 프랑스 인상주의와 비슷하다. 역사화와 종교화, 해양화, 풍경화 등 멈춰있는 장면을 그리던 전통적인 주제에서 삶의 현장을 이해할 수 있는 장르화로 점차 변해갔다. 집안의 모습, 시장 골목과 광장의 모습, 구시가지에 남아있는 성곽이나 들판 너머의 바람이 느껴지는 전원풍경과 같이 일상의 모습을 빛과 함께 그려냈다. 아래 그림의 휘어진 우산을 보니 코펜하겐 Arken 미술관이 있는 바닷가에서 우산이 날아갈 정도로 강력했던 비바람의 위력이 그림 속에서도 느껴져서 미소가 지어졌다.


(왼쪽) Martinus Rørbye <The Prison of the Copenhagen Town Hall and City Court, 1831>

(오른쪽) C. W. Eckersberg <Street Scene in Windy and Rainy Weather, 1846>


장르화가 나오게 된 또 다른 배경에는 부르주아의 영향이 크다. 왕정국가에서 민주국가로 변해가면서 사회계급이 해체되었고, 새로 등장한 부르주아는 미술 시장의 트렌드를 바꾸었다. 아마도 경제적 개념이 있는 부르주아가 보기에 기존 거장들의 작품은 식상하기도 하고, 장르화는 가격이 저렴해서 접근하기가 쉬웠을 거다. 덴마크 장르화는 네덜란드의 자유 분방하고 살아있는 표정이 느껴지는 장르화에 비해 좀 더 절제되고 차분하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네덜란드 화가들의 경우에는 길드에 소속되거나 성공한 화가 밑으로 들어가서 본인의 개성을 살리며 자신의 그림을 발전시켰으나, 덴마크 화가들은 왕립 아카데미에서 획일적인 교육을 받았기에 두 나라의 화풍에서 다른 점이 보이는 게 아닐까 싶다.

덴마크는 네덜란드보다 약 100년 후에 황금기를 누리며 과학 문학 건축 등 모든 면에서 골고루 발전했지만, 회화에서는 보수적으로 화풍이 다양하지 않았고 두각을 나타낸 국민 화가도 많이 나오지 않아 아쉽다. 덴마크 황금기는 영향력 있는 화가들이 사망하면서 계속 이어지지 않고 이내 사그라들었다. 이 시기의 그림들을 보면 혼란스러운 정세와는 반대로 참 차분하고 고요하며 고급스러운 것이 비현실적이다. 아래 두 작품도 덴마크 황금기의 대표 작품이다. 덴마크 느낌이 물씬 난다. 고전의 느낌은 벗어버린 현대적인 요소와 분위기로 가득 차 있다. 깔끔한 색상과 인테리어 오브제들 하나하나가 모던해 보이기까지 하다. 창가의 모습도 현대 작품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전의 어두웠던 그림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음을 볼 수 있다.


(왼쪽) Martinus Rørbye <View from the Artist's Window, 1825>

(오른쪽) Wilhelm Bendz <The Waagepetersen Family, 1830>

어려움 속에서도 예술에 우선순위를 두고 국가 차원에서 투자하고 후원하며 발전시킨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의 덴마크가 북유럽 예술을 대표하는 세련된 트렌드의 대명사가 된 게 아닐까. 100년을 채 못 채우고 끝난 황금시대였지만, 이 강력한 변화의 힘이 지금까지도 덴마크 감성을 이끌고 있는 듯하다. SMK – Statens Museum for Kunst 국립미술관 2층에 덴마크 회화를 시대별로 자세한 설명과 함께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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