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MK – Statens Museum for Kunst
로젠보르크 성과 자연사 박물관과 함께 끝도 안 보이게 넓은 공원과 호수에 둘러 쌓여 있는 국립 미술관은 규모도 웅장하고 컬렉션별 구성도 잘 되어 있었다. 겨울에 온지라 미술관 한 곳만 쏙 보는데도 반나절 이상이 걸렸는데, 화창하고 따뜻한 계절이었다면 이 근방에서만 시간을 보내도 며칠은 금세 지나갈 거 같았다. 그래서 내가 미술관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겨울여행을 좋아한다. 이곳은 국립 미술관임에도 고 미술작품보다는 근 현대 작품의 비중이 더 크게 느껴졌다. 전시실마다 준비되어 있던 시대적 배경 설명은 작품을 보는데 큰 도움이 되었고, 미술관의 기획 수준과 정성이 느껴졌다.
덴마크 군주들은 16세기부터 예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크리스티안 4세 (1577–1648)와 프레데리크 5세 (1723–1766)는 다른 유럽 왕실의 컬렉션에 뒤지지 않도록 폴랑드르와 네덜란드,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작품을 대규모로 구입하며 컬렉션의 규모를 늘려 나갔다. 화재로 중요한 문화유산들이 다 소실되어서 더 열심히 모은 듯하다. 민주주의로 발전하면서 1827년부터 크리스티안스보르 궁전의 왕실컬렉션은 시민들에게 공개되었으나 1884년 화재로 궁전은 소실되었고, 1897년에 완전히 새로운 덴마크 국립 미술관이 탄생하게 되었다. 계속되는 화재, 안타깝게도 덴마크 역사의 키워드는 화재였던 거 같다.
컬렉션은 14세기부터 현재까지 덴마크와 해외에서 온 260,000개 이상의 그림, 조각, 판화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1300년에서 1800년 사이의 서유럽 거장들의 작품을 다수 보유하고 있고, 최근 들어 미술관은 현대 미술 작품 수집에 집중하고 있다.
미술관은 크게 네 구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1800년도 이전의 유럽 미술, 덴마크 황금기 시대 회화, 1900년도의 프랑스 미술, 그리고 1900년도 이후의 덴마크와 유럽 현대 미술로 나뉜다. 700년 이상에 걸쳐 있는 컬렉션을 통하여 덴마크가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흥미롭게 볼 수 있었다.
덴마크 현대 회화부터 보고 싶어서 연결된 신관으로 먼저 갔다. 원 건물은 그대로 보존하며 신관을 증축했고, 유리 돔으로 두 건물을 연결한 현대적인 감각의 멋진 건축물이었다. 1900년대 그림 첫 번째 방에는 죽음을 의미하는 그림이 가득했다. 단번에 Edvard Munch 에드바르트 뭉크 (1863-1944, 노르웨이)의 작품임을 알 수 있었으나, 찬찬히 보니 전부다 뭉크 그림은 아니었다. 무척 흡사했지만 옆의 작품들은 Jens Søndergaard 옌스 쇠네르고르 (1895-1957, 덴마크)의 작품들이었다.
뭉크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한 살 많은 누나를 병으로 잃으며 죽음의 공포와 우울감에 평생 시달렸고, 연 이은 사랑에 실패하며 정신적으로 치명상을 입게 된다. 세 번째 연인과는 다투다가 왼손가락에 총상을 입으며 사랑이 죽음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경험했고, 세상과의 소통에도 실패하며 삶은 고통이었다.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는 작품으로 표출되었고, 그는 그렇게 머릿속에 온통 죽음만을 생각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아주 오래 살았다.
뭉크의 첫 번째 그림 <Death Struggle, 1915>은 임종을 둘러싼 가족들의 슬픔과 영혼의 안녕을 기도하는 성직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옆에는 해가 지는 마을을 뒤로하고 가족과 지인들이 모여서 매장하는 모습을 그린 쇠네르고르의 <장례식, 1926>이다. 등장인물들의 얼굴은 슬픔과 두려움이 가득한 유령처럼 묘사되었다. 전쟁과 사고, 스페인독감 등 예상치 못한 헤어짐을 슬픈 마음으로 그린 거 같다. 이 작품을 보고 있는 21세기에도 전쟁과 펜데믹은 반복되기에 작가의 슬픈 마음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이 방에서는 나무 한 그루의 그림조차도 슬퍼 보인다.
아래층의 19세기 덴마크 회화실에서 만난 또 다른 장례식의 모습도 기억에 남는다. Anna Ancher의 <장례식, 1891>과 Frants Henningsen의 <장례식, 1883>이다. 유독 죽음과 장례식을 표현한 그림이 많이 보였고 와닿았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덴마크 황금기의 풍경화는 그림처럼 아름답다. 하늘은 환하고 밝으며 매우 이상적으로 그려졌다. 덴마크의 변화무쌍한 날씨와 긴 겨울의 어두운 하늘의 괴리감으로 상상화 같이 보였다. 바다풍경도 비현실적이다. 강력한 해군을 가졌고 해상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덴마크의 실상과 상관없는 듯 평화롭고 잔잔하기만 하다. 초상화는 소박하고 수수했고, 덴마크 국기가 등장하는 민족주의적 그림들도 보인다. 암담한 현실 속에서 인간의 모습에 관심 가질 여유가 없었을 거 같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 등 내적 갈등은 숨기고 이상적인 현실로 잘 포장한 듯하다.
후기 황금기에서 20세기로 들어가면서 색상이 화려해지고 빛이 들어오며 자연스럽게 감정을 표현하는 듯했다. 화풍도 다양해지고 이후 현대 미술로 들어가면서 색감과 디자인이 돋보인다. 유럽에서 최고의 강대국이었던 덴마크는 왕정이 무너지고 시민국가를 거쳐서 현대 민주주의로 계속 변해 갔지만, 그림은 현실처럼 격변하지 않는다. 화려함도 한 줌의 재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여러 번 경험해서 그런지, 그림 속의 사람들은 무표정하고 무덤덤해 보인다. 과장되게 예쁘게 꾸며서 표현하지 않았고 감정 표현도 강하게 하지 않았지만 덴마크만의 독특함이 느껴진다. 이곳에서는 시대 순서대로 보면서 덴마크 미술 흐름을 느껴보면 좋을 거 같다.
2층에 깜짝 선물의 전시실이 있으니 놓치지 말자. 프랑스 인상파 소장품은 뜻 밖이었다. 어떤 경로로 상당한 규모의 인상파 작품을 보유하게 되었을지 궁금했다. 정치가이자 수집가였던 Johannes Rump 요하네스 럼프는 평범한 사람들도 예술에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평소의 신념대로, 1928년에 자신의 대규모 현대 프랑스 컬렉션을 국립미술관에 기증하였다. 일찍부터 예술품 수집을 시작한 그는 조르주 브라크 (1882-1963), 앙드레 드랭 (1880-1954), 앙리 마티스 (1869-1954), 파블로 피카소 (1881-1973) 등의 초기 작품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럼프의 진보적인 가치관은 후손들에게 큰 선물이 되었다.
마티즈 그림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보니 참 부러웠다. 마침 앙리 마티스의 기획전도 진행 중이었어서 덤으로 볼 수 있던 좋은 기회였다. 그동안 진행되었던 기획전 리스트를 보니 참 수준 높은 전시들이 많았다. 겉에서는 수수해 보이는 고전미가 느껴졌지만 알고 보니 현대 미술까지 아우르는, 고리타분하지 않은 모던한 국립 미술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