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국립미술관: 숲 속의 요괴 에밀 놀데
Emil Nolde 에밀 놀데 (1867-1956) 작가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덴마크 국립미술관에서 만난 가장 큰 수확이었다. 덴마크 현대 작가들 틈에서 빛나던 그의 작품은 표현은 무겁지만 풍부하고, 어두운 색상조차도 화려해 보인다.
덴마크 작가들 사이에서 비중 있게 전시되었던 이 작가의 국적은 독일이었다. 그는 왜 덴마크 작가들과 함께 전시되었을까 알아보니 그의 국적을 독일계 덴마크인이라 기록하기고 했다. 그의 고향 마을 Nolde가 덴마크와 독일의 경계선에 있었기 때문에 정세에 따라 덴마크에 속하기도 했으나 현재는 독일이다.
그는 원래 본인의 이름인 Hans Emil Hansen을 버리고 마을 이름인 Nolde로 자신의 성을 바꾸었을 정도로 고향을 사랑했고, 그곳에서 노후를 보냈다. 얼마나 사랑하면 자신의 성을 마을 이름으로 바꿀 수 있단 말인가.
그가 Nolde에서 손수 지어서 살던 집은 1957년에 Nolde Museum으로 개관되었고, 지금까지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아있다. 세상을 떠난 후에 재단이 만들어지고 작가의 미술관이 개관되는 경우는 많지 않으니, 그의 생애가 더욱 궁금했다.
그는 표현주의자로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바람대로 표현주의 작가라고 구분 짓고 싶지 않지만, 그의 작품을 보면 표현주의 특징을 넘치게 가지고 있다. 확실한 것은 그 스스로 표현주의를 개척했다는 점이다. 그는 대상을 깊게 관찰하며 정성껏 풍부하게 묘사했다. 그러다 보니 꽃의 형태도 한 송이 한 송이 소담스러우며, 다채롭고 강렬한 색상으로 표현했다. 꽃을 담은 화병에도 밝은 광채를 써서 생명감을 불어넣었다. 넘실대는 파도의 물보라 거품도 깊은 바다색과 대비되는 밝은 색으로 생동감이 넘치며, 해가 기울어 찾아오는 어둠 속에서도 밝은 빛을 품은 구름이 뭉개 뭉개 흘러간다.
인물의 표현도 풍요롭다. 게르만족의 굴곡 있고 각진 얼굴에는 단순하고 거친 붓질로 표정을 살렸고, 때로는 동화 속의 요괴 혹은 요정처럼 현실과 동떨어지게 그리기도 한다. 특히 요괴의 얼굴에서는 현대 애니메이션 캐릭터 느낌도 든다. 이런 특색 있는 화풍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자면 이전에 없던 표현주의가 되는 거 같다. 그는 딱딱한 그림 위에 붓의 터치로 생명을 불어넣어 준 조물주 같은 능력자였다.
표현주의 작가들 중에는 남태평양과 아프리카에서 강한 영감을 받아 토착민들의 모습을 그리고 가면과 조각상 등의 예술품을 만든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가 뉴기니에서 그린 작품에서도 그런 특징들을 찾아볼 수 있다. 표현주의 초기 작가인 폴 고갱이 타히티에서 그린 향토적인 그림들과도 비슷한 느낌이 있다.
그는 1913년부터 모스크바, 시베리아를 지나 한국, 일본, 중국을 거쳐 독일 령 뉴기니까지 긴 여행을 다녀온다. 그 시대에 시베리아를 횡단해서 한국까지 오다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비록 우리나라에는 그가 다녀간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그의 자서전과 그림에서는 한국을 다녀간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을 그린 드로잉 몇 점이 남아 있고, 기행문에서는 조선을 신비하고 아름다운 곳이라고 묘사했다고 한다. 한국 방문 이전에 그린 <선교사> 그림에도 장승이 등장하는데, 베를린 박물관에 있는 장승을 보고 영감을 얻은 거 같다고 한다.
놀데가 한국여행 때 그린 드로잉은 오래전에 에밀 놀데를 연구하신 분의 책에서 볼 수 있었고, 저자가 작가의 생애와 작품을 상세하게 연구해 두셔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놀데는 베를린, 스위스, 뮌헨, 파리 등을 무대로 활동하다가, 60세가 되어서야 고향에 돌아와 정착을 한다. 모네가 그랬던 것처럼 , 그도 집을 짓고 정원을 가꾸며 꽃을 그렸다. 이때 그린 양귀비와 해바라기를 보면 좀 현대적이다. 그는 반 고흐의 꽃그림에 관심을 많이 보였다고 하는데, 그래서일까, 해바라기를 집중적으로 그린 공통점이 있다.
기독교 교육을 받은 그는 성경의 중요한 장면들을 매우 강렬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최후의 만찬, 1909>이나 <예수의 생애 9편, 1912>이 그렇다. 고갱이 그린 십자가의 예수님과 놀데가 그린 예수님은 어딘지 많이 닮은 듯하다.
그는 초반에는 유대인 예술가들에 대해서 부정적인 의견을 내며 나치당을 지지했으나, 나치가 독일에서 권력을 장악했을 때 그의 작품은 퇴폐미술(Degenerate art/Entartete Kunst)로 낙인찍혀서 그의 작품 중 총 1,052점이 박물관에서 사라지는 비운을 겪게 된다. 1941년 이후에는 정치적 탄압으로 인해 작업 자체를 할 수 없게 되었으나, 고향에 머무르며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수백 점의 수채화를 그렸다.
나치 집권기인 1933 년에서 1945년 사이에 히틀러는 현대 미술을 공개적으로 탄압했다. 나치는 현대 미술이 독일 국민의 정서에 나쁜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며 퇴폐 예술로 분류하고 퇴폐 미술전을 열어서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며 비판했다. 히틀러는 누구나 이해하기 쉽지만 창의력은 제한적인 신고전주의를 좋아했다. 개인이 국가를 위해서 희생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주장에 타당성을 부여하고 국민들을 단합시키고 통제하기 위하여 그림을 계획적으로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나치는 게르만 민족의 혈통과 남성의 우월함을 강조하는 권위적이고 영웅 주의적인 그림을 선호했으나, 감성적 표현이 풍부한 에밀 놀데의 그림은 나치가 원하는 화풍이 아니었던 거다. 에밀 놀데 재단은 훗날 나치에게서 되찾아온 그림 중 8점을 이곳에 기증하였다. 나치에게 빼앗긴 나머지 천여점도 되찾았는지 궁금하다.
<예수의 생애 9편>등 주요 작품들이 놀데 미술관에 있다는데 꼭 한 번 방문하여 그가 가꾼 아름다운 정원과 한국사람을 그린 드로잉도 만나 보고 싶다. 에밀 놀데는 아직까지는 우리나라에서 조명받지 못했는데, 언젠가 한국에서 만나 볼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