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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의 처갓집은 코펜하겐

코펜하겐의 겨울 풍경

by my golden age

Ny Carlsberg Glyptotek 칼스버그 박물관에서 만난 프랑스 인상파 작품들, 역시 인상파 없는 미술이란 앙꼬 없는 찐빵일까. 이곳에서는 특이함이 감지될 정도로 Paul Gauguin (1848-1903)의 작품이 많았다. 특히 인상주의 컬렉션 마지막 전시실에는 고갱 작품이 가득했다. 그동안 많이 보아왔던 이국적인 타히티 분위기도 있었지만, 이 작은 방 안에는 차갑고 고요한 겨울 풍경화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고갱이 이런 그림도 그렸었나? 흥미롭게도 고갱의 조강지처는 덴마크 사람이었고, 처가가 있는 코펜하겐에서 함께 살 때 그린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코펜하겐에 와서 고갱의 알려지지 않은 과거를 만나게 되다니 매우 흥미로웠다. 고갱은 복잡한 집안 사정으로 어린 시절에는 페루에 있는 외가에서 부유하게 자랐다.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1871년 그의 나이 23세에 증권거래소에 취업하고 고소득자로 부유한 생활을 시작했다. 1873년 즈음에는 취미 삼아 그림을 시작했고 카미유 피사로를 스승으로 모시고 예술적 교감을 나누었다. 그의 초기 작품을 보면 아마추어 느낌도 들어서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사회적으로 탄탄대로를 달리면서도 파리 생활에 답답함을 느낄 때면 틈틈이 여행을 다니며 새로운 세상을 탐닉했다.


(왼쪽) <Maisons au bord de l'eau 워터프론트 주택, 1874>고갱의 초기작픔 (오른쪽) 고갱의 부인 Mette Gad


성공한 젊은 청년 고갱은 Mette Gad와 결혼도 하고 10년 동안 다섯 자녀를 낳는다. 그가 1881년과 1882년 두 차례에 걸쳐 인상파 전시회에 출품한 걸로 미루어 보아 취미로 시작한 미술임에도 실력이 꽤 좋았나 보다. 그러나 1882년 파리 주식 시장이 폭락하고 경제 상황이 안 좋아지면서 그는 직장을 잃게 된다. 부유하긴 했으나, 일곱 식구가 수입 없는 지출만으로는 오래 버틸 수 없었을 거다. 고갱은 생계를 위하여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생활비를 마련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이 있는 코펜하겐으로 떠났고, 고갱도 이듬해인 1884년에 가족을 따라나선다. 이때 고갱은 완전한 이주를 생각했던지, 자신의 초기 작품들과 피사로 등의 인상파 화가들로부터 구입했던 작품들을 전부다 코펜하겐으로 가져갔다. 세잔의 그림도 12점이나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코펜하겐에 도착했을 때는 11월 겨울이었다. 고갱이 피사로에게 쓴 편지를 보면 코펜하겐의 겨울은 아름답고 그림도 잘 그려져서 편안한 마음이라고 긍정적인 소식을 전했다. 그가 그린 <코펜하겐의 눈, 1884>은 아주 평범하고 흔한 겨울 풍경이다. 이 작품들은 그가 코펜하겐에 와서 처음으로 그린 그림들이다. 고갱은 프랑스에 있을 때부터도 눈 풍경을 즐겨 그렸었다. 코펜하겐 생활을 시작하며 연속적으로 그린 겨울 풍경은 꾸밈없고 자연스럽다. 얼어붙은 호숫가에서 썰매 타는 아이들, 겨울나무와 숲의 풍경에서 고갱의 잔잔한 마음이 평온하게 전해진다. 이때까지의 그림에서는 고갱의 색깔이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타히티 풍광에 익숙한 관람객으로서는 낯선 설경이다. 이 시기 고갱의 주요 관심사는 하늘이었을까, 파리와는 다른 겨울 하늘이 돋보인다. 고갱은 전문적으로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이 없음에도 눈이 반사되는 겨울 하늘을 감각적으로 표현했다. 핑크빛이 도는 겨울 하늘, 푸른빛이 느껴지는 겨울 하늘, 회색 빛의 어두운 겨울 하늘. 이 작은 방의 그림들은 따뜻하고 잔잔하니 너무 좋다. 부채 모양의 캔버스 위에 세잔의 그림을 따라 그린 풍경화도 느낌 있다.


La Neige à Copenhague 코펜하겐의 눈, 1884년
(왼쪽) Frederiksberg 공원에서의 스케이트, 1884 (오른쪽) 눈속의 정원, 1883


고갱은 아내의 도움으로 그림도 팔고 일자리도 소개받았지만, 덴마크어로 소통하는데 어려움이 있었고 생활력도 없어서 정착하지 못하고 힘들어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면서 고갱은 점점 더 코펜하겐이 싫어졌고 무기력해졌다. 그는 샤를로텐보르 궁전에서 열리는 전시회에 출품하고자 하였으나 심사위원단에게 거절당하며 좌절했고, 예술적 교감을 나눌 친구도 없어 답답함을 느끼며 불만이 쌓여갔다. 부부관계는 점점 더 악화되었고 결국 여름이 되면서 고갱 혼자서 다시 파리로 돌아가게 된다. 그가 코펜하겐에서 지낸 시간은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이후 1891년까지 부인과는 편지로만 소통했고, 결국 1894년에 정식으로 이혼하게 된다. 아내는 남편이 남겨두고 간 작품들을 전시하고 판매하며 생계를 꾸려 나갔다. 이혼 직전인 1893년 코펜하겐에서 열린 전시회에 고갱의 작품이 51점이나 출품되었다. 고갱이 코펜하겐에 남겨두고 떠난 그림들은 그의 아내가 전부다 알뜰하게 내다 팔았고, 누가 구매했는지도 정확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부인은 생활력이 강할 수밖에 없는 엄마였고, 남편은 무기력하고 자존감이 낮아진 상태로 헤어진 것이 안타깝다.


<Gauguin Design for a Fan d'après Cézanne, 1885>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타히티로 건너가 이국적인 그림들을 그리기 전까지 프랑스 여러 지역에서 활동한다. 고갱은 많은 그림을 그렸고 판매도 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가난에 시달렸다. 그는 늘 여자를 좋아했고, 경제적인 개념은 없었다. 젊었던 고갱부부는 풍요로운 결혼 생활을 망친 증권시장의 폭락이 원망스러웠겠지만, 이 변환 점 덕분에 우리는 고갱을 만날 수 있었다. 칼스버그 박물관을 세운 Carl Jacobsen의 아들이자 박물관 관장이었던 Helge Jacobsen은 열정적으로 고갱의 작품을 수집하였다. 고갱의 코펜하겐 작품을 이만큼이나 수집한 것을 보면, 고갱의 부인이 남긴 판매 기록이 도움 되었을 듯하다. 고갱의 인생에서 거의 알려져 있지 않던 짧디 짧은 코펜하겐 시대를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전시였다.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고갱의 귀한 코펜하겐 설경이니 놓치지 말자.


Ny Carlsberg Glyptotek 고갱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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