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uisiana Museum of Modern Art
Louisiana Museum of Modern Art에서 단연 눈에 띄는 작가는 Alberto Giacometti (1901-1966)이다. 자코메티의 작품을 이곳 만큼이나 다양하게 보유한 곳이 있을까 싶다.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스위스에서 유명한 화가 Giovanni Giacometti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3년 그의 아버지가 임종했을 때, 스위스는 국가차원에서 애도를 표하고 그의 업적을 치하하였다. 알베르토는 아버지 덕분에 일찍이 미술교육을 받고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었고, 동생 Diego는 그의 작품의 모델이자 조수로서 평생 옆에서 수족이 되었기에 그는 온전히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그는 파리에서 활약하던 예술가들과 매일 밤 만나서 교류를 했는데, 천재들끼리는 서로 알아보고 당기는 힘이 있었던 거 같다. 파리는 지금도 최고로 사랑받는 도시이지만, 과거 예술가들이 있었기에 그 에너지가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듯하다.
루이지애나는 자코메티의 초기부터 후기 작품까지 다양하게 보유하고 있어서, 시대별로 작품의 형상이 달라지는 변천사를 볼 수 있다. 통창이 있는 넓은 공간에 덩그러니 서있는 <걷는 남자 Homme qui marche, 1960>는 이곳의 하이라이트이다. 이 작품과 마주 보고 있는 흰 벽에는 영국작가 Francis Bacon (1909-1992)의 <Man and Child, 1963> 작품이 걸려있다. 1960년대 초, 파리로 여행 왔던 베이컨은 한 카페에서 자코메티를 만나게 된다. 베이컨은 평소에도 자코메티를 인간적으로 존경했고 그의 작품도 높이 평가했다. 부와 명예를 다 가진 자코메티가 파리에서 소박하다 못해 허름한 작업실을 초심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모습조차도 베이컨에게는 멋지게 보였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며 식당에서 팁을 시원스럽게 많이 주는 모습도 본인과 닮았다고 느꼈다. 자코메티가 전시를 위하여 런던을 방문했던 1964년에도 이 둘은 만나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이들의 우정을 기념하기 위하여 작품을 마주 보게 배치한 걸까, 더 훈훈하게 느껴지는 방이다.
자코메티가 젊었던 1929년에는 Joan Miró, Max Ernst 등 초현실주의에 심취한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고, 그도 영향을 받아 초현실주의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1932년에는 파리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었는데, 이 전시회 오픈식에 제일 먼저 방문한 사람이 Pablo Picasso (1881-1973)였다. 피카소가 20살이나 더 많았지만 그 둘은 절친한 친구로 지내며 서로의 작품에 대해서 조언을 해주었다. 특히 피카소가 작업실에서 두문불출하며 <게르니카>를 그릴 때, 자코메티는 피카소의 화실에 들려서 작품의 진행 상황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또한 예술적 성향은 완전히 달랐지만 Balthus (1908-2001) 와도 친구가 되어서 30년간 우정을 나눴다. 자코메티는 다른 사람의 개성을 존중하였기에 주위에 친구들이 항상 많았던 거 같다. 아래 왼쪽의 <걷는 여자>는 초현실주의에 빠져있던 1932년에 제작되었고, 오른쪽의 <서있는 여자>는 후반기인 1960년에 제작되어 얇고 길어졌다.
긴 복도를 지나다 보면 한쪽벽의 유리 진열장 안에 전시된 소품들이 눈에 들어온다. 조각품의 크기가 작다고 해서 작가가 소홀히 대하거나 실패한 작품은 절대 아니다. 이 작품들은 그가 30대 중반에 초현실주의와 결별하고 나서 10여 년 동안 고군분투 하며 고민에 고민을 담아 만든 인간의 형상들이다. 이 소품들은 대부분 7cm 보다 작아서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0년에 프랑스 북부가 독일군에게 점령당하자 자코메티도 피난을 떠나며 작업실 한쪽 바닥에 커다란 구멍을 파고 지난 몇 년간 만든 작품들을 묻고 흙으로 덮었다. 이곳에서 마주하게 된 작은 작품들은 나름의 매장의식을 거쳐 전쟁에서 살아남은 귀한 작품들이었다. 스토리를 알고 보니 얼마나 애지중지했던 작품이었을지, 더 작고 소중해 보인다.
자코메티가 일부러 작게 만든 것은 아니었다. 인물을 잘 만들려고 엄청난 고민과 노력을 했지만 뜻대로 작품이 나오지 않았고, 사이즈는 커지지 않았다. 비록 작품의 크기는 작았지만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것은 다 담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그가 1939년 취리히에서 열린 큰 전시회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전시 관련자들은 볼품없이 작은 그의 작품들을 보며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였다. 스위스는 한참후까지도 자코메티의 예술적 비전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파리에서 함께 하던 그의 친구들은 자코메티의 예술성을 이해했고 격려했다. 특히 피카소는 자코메티가 본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조각을 만들기 위한 과정을 거치고 있으며, 이 작은 형상들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지를 통찰하고 있었다. 자코메티가 고민하면 할수록 작품의 키는 커져갔고, 작품의 키가 커질수록 인체는 점점 더 가늘어졌다. 이렇게 그의 스타일은 서서히 확립되어 갔다. 이곳 전시실 천장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서있는 앙상하고 긴 인체 그룹이 인상적이었다. 안정된 포스가 느껴진다.
그는 급격하게 인물의 비례가 변한 것에 스스로 당황했으나 곧 그 비례에 친밀감과 희열을 느끼게 되었다. 가늘어질수록 형상을 한눈에 볼 수 있었고, 재료의 역동성에서는 생명력도 느낄 수 있었다. 1947년에는 놀랄 만큼 작업에 속도가 붙었고 만족스러운 작품들이 나오게 된다. 그는 화상 마티스를 통해서 유럽보다는 미국에서 먼저 명성을 얻고 인정받게 되었다. 우리가 많이 보는 얇고 길쭉한 작품들은 그의 인생 후반 20년 동안에 폭풍처럼 몰아친 작업으로 탄생되었다. 그는 조각뿐만 아니라 드로잉과 초상화도 많이 그려냈다. 1965년에는 그의 회고전이 런던의 Tate Gallery, 뉴욕의 MoMA, 그리고 덴마크의 루이지애나 미술관에서 열리게 되었다. 자코메티도 배를 타고 먼 길을 여행하여 새로 멋있게 지은 루이지애나 전시회에 참석했다. 이때 루이지애나 미술관은 쟈코메티의 작품을 대거 구입하게 된다. 이 전시회를 마지막으로 쟈코메티는 급속하게 건강을 잃으며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난다. 그는 평생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고 오로지 커피와 담배만을 달고 살았다. 늘 기침을 했고, 죽을힘을 다해서 체력이 방전될 때까지 작업을 하고 또 하며, 더 이상 작업에 쓸 힘이 없을 때까지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냈다. 그의 열정이 담긴 작품을 이렇게나 많이 만나볼 수 있다니 이곳은 정말로 우리에게 행복을 주는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