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그리는 작가
보통 겨울에는 굳이 유럽여행을 가지 않겠지만, 우리는 어쩌다가 한겨울에 스위스 오스트리아 지역을 여행한 적이 있었다. 그때 알프스 산자락에서 본 눈 덮인 마을과 기차의 통유리창으로 보는 겨울 풍광, 기차역에서 까먹던 군밤과 따뜻한 뱅쇼, 너무 추운 날씨라 꽁꽁 싸매고는 마음껏 돌아다니지는 못해 아쉬웠지만 잊을 수 없이 아름다운 여행이었다. 특히 루체른의 산에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면서 본 아주 큰 전나무숲은 크리스마스 카드에서나 볼법한 정말 예쁘게 눈이 덮인 풍경이었다.
이렇게 겨울 여행을 싫어하지는 않는 나의 눈에 쏙 들어오는 작가가 있으니 Hendrick Avercamp (1585-1634)이다. 네덜란드 황금기 시대 작가들은 풍속화를 많이 그려서 화풍이 비슷비슷한데, 이 작가는 한결같이 겨울풍경만 그렸고 개성이 뚜렷하다. 예쁜 마을의 겨울 풍경화를 만나면 영락없이 아베르캄프의 작품이다. 100여 점의 작품이 남아있어서 대형 미술관에 가면 꼭 몇 점씩은 볼 수 있어서 무척 반갑다.
아베르캄프의 그림은 사이즈가 크지 않은 편인데, 그 안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담겨있다. 멀리 있어서 희미하게 표현된 사람들까지 다 세어보면 백 명은 넘지 않을까 싶다. 작은 캔버스 안에 사람들을 어찌나 섬세하고 디테일하게 표현했는지 자세히 들여다보면 너무 재미있다. 모두들 분주하게 움직이고 표정도 살아있다. 인물들의 작은 몸짓만으로도 연인인지 부부인지 친구인지도 추측해 볼 수 있다. 얼음 위에서 스틱으로 공놀이를 하고 썰매를 타며, 묵묵히 일하는 사람, 술 취한 사람, 숨어서 용변을 보는 사람까지 별의별 사람의 모습이 다 들어가 있다. 반려동물과 가축들, 날아다니는 새 까지도 묘사 능력이 너무나 뛰어나다. 헨드릭 아베르캄프는 암스테르담 북동쪽의 마을 Kampen에서 자랐는데 <Kampen의 벙어리>라고 불린 것으로 보아서는 말하고 듣는 거에 어려움이 있었을 거라 추측한다. 그래서 그런 걸까. 표현력이 뛰어나고 섬세하다. 아마도 모든 표현의 에너지가 다 손끝으로 집중되었을 거라 생각된다. 흐릿하게 절제된 색의 사용으로 원근감 표현도 자연스럽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겨울 풍경 그림을 보고는 첫눈에 당연히 아베르캄프의 작품이라 생각했으나 다른 작가의 그림이었다. 몇 번이고 정말 아베르캄프의 그림이 아니라고? 되물으며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여름과 겨울 두 점으로, 아베르캄프와 같은 시기에 전성기를 누린 Jan van Goyen (1596-1656)의 작품이었다. 얀 호이옌은 주로 바다 풍경을 많이 그렸고, 숲, 강, 농촌의 모습등 무려 1,200여 점의 작품을 남기며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준 작가이다. 그는 작품 활동뿐만 아니라 미술 거래도 하고 부동산 투자도 하여 부유하였는데, 마지막에 튤립에 투자한 것이 튤립 파동을 맞으며 막대한 부채를 안았다고 한다.
헨드릭 아베르캄프의 작품 중에서는 런던의 The National gallery에 있는 작품이 제일 예쁘다. 팔각형 프레임에 들어있는 원형 그림으로 제목은 <A Winter Scene with Skaters near a Castle, 1609>이다. 앞에 큰 나무가 이 그림의 중심을 잡아주며 앙상한 잔 가지들이 화면을 풍성하게 채워주며 뻗어있다. 이 그림이야 말로 작은 캔버스 안에 백여 명의 사람이 들어 있는 듯하다. 얀 호이옌의 <Winter, 1625> 과는 구도며 분위기며 프레임까지 무척이나 비슷하다. 이러니 내가 작가의 이름을 보고도 믿지 못한 게 아닐까.
빙하기는 아니지만 추운 시기가 지속되었던 중세의 소빙기 (little ice age)는 17세기 후반까지 지속되었다는데, 이 당시의 겨울이 얼마나 추웠을지 상상이 안 간다. 그림 속 사람들의 옷차림을 하나하나 살펴보니 저 정도 옷만 걸치고 겨울을 살아냈다니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다행히도 다들 장갑은 꼈구나. 온갖 방한복을 다 껴입어도 춥다고 하는 나로서는 이 풍경이 그림이니까 아름답지, 내가 저 시대에 살았으면 추워 죽겠는데 웬 스케이트인가 싶다. 이곳에서 탑승했던 택시의 기사님은 8년째 눈이 쌓일 정도로 많이 오지 않아서 너무 속상하다며 이상기온을 원망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어렸을 때에 아파트 건너편 공터에 겨울이 되면 스케이트장이 생겨서 놀러 가던 생각이 나는데, 요즘 날씨로는 어림도 없다.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의 뒤쪽으로 나가면 넓은 잔디밭 광장을 지나서 반고흐 미술관으로 연결되는데, 겨울에는 광장에 스케이트장이 생겨 아베르캄프의 그림을 보는 듯 아름답다.
여행을 다녀와서 얼마 후에 친정에 갔다가 아빠 방에 헨드릭 아베르캄프의 그림이 걸려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머나, 하고 많은 그림들 중에서 이 그림이 마음에 드셔서 갖다 놓으신걸 보니 우리 부녀 감성이 통했구나, 무척 반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