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리드 티센 보르네미사 국립 미술관 Balthus 기획전
(이재의 글) 발튀스와 소녀그림
마드리드에서의 마지막 날, 우리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서 각자 보고 싶은 것을 더 보기로 했다. 그때 엄마와 나는 티센 보르네미사 국립 미술관을 선택했는데, 그곳에서 만났던 Balthus (1908-2001) 기획전이 정말 기억에 남는다.
나는 파리 오르세 미술관의 드가 작품이나 오랑주리에서 볼 수 있는 르누아르 작품과 같이, 내 기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작품을 제외하고는 웬만한 회화 작품을 보면서 크게 감동받아 사진을 찍거나 뮤지엄샵에서 포스터를 사서 간직하는 경우가 별로 없었는데, 발튀스 전시를 보면서는 정말 많은 사진을 남겼고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은 작은 액자까지 구매했다.
후에 이렇게 마음에 드는 작가가 한 명 더 생겼을 때 두 작가 사이에서 확실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는데,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들이 사용하는 붉으면서도 채도가 낮은 듯한 색감이 내 이목을 끄는 것 같았다. 색감 자체가 매혹적이었기 때문에 발튀스 작품에서 그 어떤 논란의 여지도 느낄 수 없었고, 더군다나 성적인 상징성이 있는지는 알아차릴 수도 없었는데, 이후 석사 과정 중에 발튀스에 대한 에세이를 쓰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많아 그 내용을 나눠보려 한다.
파리에서 태어난 발튀스의 아버지는 유명한 미술사가였고 어머니는 화가였다. 그는 늘 예술가와 작가들이 오가는 환경에서 자랐고, 그의 형 Pierre Klossowski (1905–2001)도 저명한 작가이자 철학자로 성장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독일 시민권을 가지고 있던 이 가족은 추방을 피해 파리를 떠나 스위스에 정착하였고 나중에는 베를린으로 이주하였다. 1917년에는 어머니와 형과 함께 제네바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그의 어머니는 유명한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와 연인이 된다. 릴케는 발튀스의 예술적 재능을 알아보고 그의 첫 작품 출판을 도와준다. 청년기에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프레스코화를 공부했고, 1933년에 다시 파리로 돌아와 스튜디오를 마련하고 정착한다. 이때 파리에서 사귄 친구들이 피카소, 만 레이, 호안 미로, 그리고 가장 절친했던 친구가 자코메티이다. 또다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피난을 다니면서도 작업 활동을 했고, 1938년에는 뉴욕의 Pierre Matisse Gallery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1956년에는 뉴욕의 The Museum of Modern Art (MoMA)에서 전시를 하며 국제적으로 유명해진다.
보통 그림에 어떤 특징이 보이면 우리는 작가의 어린 시절에 관심을 가지고 인과관계를 찾으려고 하는데 그의 생애를 들여다보면 그가 성장과정에서 어떤 특이점을 보였다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았다. 단지 그가 자신의 가족 역사에 대해서 폴란드 귀족이었다는 둥 허상을 주장한 것 이외에는, 별다른 낌새를 느낄 수가 없었다. 같은 시대에 입체파와 초현실주의, 추상표현주의 등의 흐름이 있었지만 그의 스타일은 고전적이었다.
발튀스 작품들은 성적 해석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러한 해석은 주로 그의 그림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젊은 소녀들의 포즈와 표현에서 기인한다. 예를 들어, 그의 작품 중 일부는 소녀들이 성인 여성처럼 포즈를 취하거나, 특정 신체 부위가 강조되는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어 성적인 암시로 해석될 여지를 제공한다. 이러한 해석은 특히 현대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더욱 민감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발튀스 본인은 자신의 작품이 성적인 의도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고 강하게 반박했다. 발튀스는 자기 작품에 대한 이러한 해석을 "완전한 오해"라고 주장하면서, 그의 그림은 순수한 아름다움과 어린 시절의 무죄, 그리고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의 일부를 포착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자 한 것은 소녀들의 심리적, 정서적 깊이와 그들이 처한 상황의 복잡성이며, 그 어떠한 방식으로도 도발적이거나 성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가 없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보기만 하고 의미를 찾아 읽지 말아 달라고 했다. 또한, 작품과 관련하여 자신의 개인적인 삶이 분석당하고 관심 받는 것을 굉장히 싫어해서 그의 가족들에게 미술 평론가나 외부 인사들과 만나 인터뷰하는 것을 금지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궁금해 할수록 발튀스는 사생활을 숨겼으나, 1967년에 35세 연하의 일본인 화가 세츠코와 재혼하면서 세간의 호기심은 정점을 찍는다.
발튀스 작품에 대한 논란은 최근에도 있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Thérèse dreaming, 1938>은 테레즈라는 이름의 소녀가 한쪽 다리를 걸쳐 둔 채로 앉아 있고 소녀의 짧은 스커트가 훌렁 올라가 팬티가 보이도록 묘사 되어있다. 이 작품은 2017년에 성적 해석을 불러일으키며 큰 논란이 되었다. 이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자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측은 발튀스의 작품이 예술적 가치를 지니며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작품을 철수시키지 않고 설명을 추가하여 관람객들이 작품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조치한 사례가 있다.
발튀스 작품의 논란은 예술 작품이 갖는 다의성과 관람객의 주관적 해석 사이의 간극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예술이 갖는 개방성은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지만, 때로는 그 의도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해될 수도 있는 것이다. 발튀스의 경우, 그의 작품에 대한 이러한 해석의 차이는 예술 작품의 수용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복잡한 상호작용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