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주의 컬렉션의 비밀
(앞글: 마티스의 <The Red Studio>에 이어서)
마티스의 오랜 후원자였던 Sergei Shchukin (1854-1936)은 러시아에서 가장 큰 제조 및 도매업을 하는 집안의 아들이었다. 당시 러시아 최고 재력가 집안의 후원을 받다니, 마티스에게는 운도 따랐나 보다. 세르게이 슈추킨 집안에는 여러 명의 미술 수집가가 있었는데 세르게이의 형제 Pyotr Shchukin (1853-1912)는 러시아 고대 예술품과 괄목할만한 인상파 걸작품을 수집했고, 또 다른 형제 Ivan Shchukin도 미술품과 책을 수집했다. 세르게이 슈추킨은 1897년 파리를 여행하면서 처음으로 모네의 작품을 구입하였고, 이때부터 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한다. 그는 모네, 르누아르, 세잔, 반 고흐, 고갱, 앙리 루소, 피카소 등 엄청나게 많은 작품을 수집하였고, 특히 오랜 시간 동안 마티스를 후원하였다. 세르게이는 당시 마티스의 작품 중에서 <The Red Studio, 1911>는 인물이 들어가 있지 않다는 이유로 인수하지 않았고, 대신에 <The Pink Studio, 1911>를 선택했다고 한다. <The Pink Studio>는 현재 모스크바의 The National Pushkin Museum에 소장되어 있다.
세르게이는 1917년 러시아혁명이 시작되면서 모스크바를 탈출하여 파리로 갔고, 남은 생은 파리에서 지냈다. 그는 망명하는 과정에서 궁전 같이 화려했던 모스크바 자택에 그가 평생 동안 수집한 예술품 총 258점을 고스란히 남겨두고 나왔다. 저택과 미술품은 통째로 국가 소유가 되어 박물관으로 이용되다가,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Hermitage Museum과 모스크바의 The National Pushkin Museum에 나뉘어 소장되었다.
아, 이제야 모든 게 이해가 되었다. 몇 년 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을 방문했을 때, 오르세 미술관에 버금가는 인상파 컬렉션을 보고는 문화적 충격을 받았었는데 그 비밀이 풀렸다. 도대체 러시아가 언제 인상파 작품을 수집한 걸까, 엄청난 수집광이었던 예카테리나 2세 (Catherine the Great, 1729-1796)의 뒤를 이어 근대 미술품을 수집한 이는 누구일까, 궁금은 했지만 공부는 하지 않은 채로 여행은 흐지부지 끝이 났었다. 그때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마티스 전시실이 있었는데 세르게이가 남긴 유산이었구나. 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그곳의 벽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있던 마티스의 대작 <The Dance, 1910>와 <Music, 1910>은 잊을 수가 없다.
이 시대 주목할만한 컬렉터 중에는 러시아에서 최고로 성공한 기업인들이 여러 명 있었고, 대부분 서유럽으로 망명하면서 컬렉션을 가지고 나오지 못하였다. 남겨진 그들의 재산은 국가에 압수가 된다. 시대적 흐름이 그랬던 거다. 나는 운이 좋게 러시아를 안전하게 방문할 수 있었던 2018년도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다녀왔고, 이후에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싶었으나 최근에는 또다시 여행 가기 어려운 지역이 되어서 아쉽다. 역사는 계속 흐르고 반복되니,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러시아 미술관에서는 컬렉션 중심으로 관람을 해보고 싶다. 세르게이의 경우에는 마티스와 각별한 관계였어서 그의 저택 공간에 맞춤용으로 그림을 주문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렇게 마티스의 대작이 남아있게 되었다.
1906년경 마티스는 11세 연하인 파블로 피카소를 만나 평생 친구이자 경쟁자가 된다. 나중에는 둘 사이가 틀어져서 피카소는 마티스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젊은 시절 그들은 서로의 예술 세계를 논하기 위하여 살롱에 모여 예술가들과 잦은 만남을 가졌는데, 그 모임의 주최는 미국에서 이민온 작가이자 소설가이자 미술 수집가인 Gertrude Stein (1874-1946)이었다. 파리에 정착한 거트루드 스타인의 가족들-거트루드의 두 남동생 Leo와 Michael, 그리고 Michael의 와이프인 Sarah- 모두는 마티스 그림의 수집가이자 주요 후원자가 되었다.
게다가 미국의 볼티모어에서 온 거트루드의 친구인 Claribel과 Etta Cone자매도 마티스와 피카소의 후원자가 되어, 100점이 넘는 피카소의 작품과 500여 점의 마티스 유화, 조각, 소묘, 판화, 책 등을 수집하였다. 콘 자매는 50여 년간 3,000여 점의 예술품을 수집하였고, 후에 Cone collection은 The Baltimore Museum of Art에 기증되고, 그곳은 마티스 작품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미술관이 되었다.
마티스는 꽤 장수한 화가이기 때문에 그의 긴 인생 여정에서 화풍은 여러 번 바뀌게 된다. 말년에는 여러 차례의 암투병으로 체력적으로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자 그는 침상에 누워서 종이를 오리는 작업을 시작한다. 그는 이 컷아웃 작업에 점점 심취하여 나중에는 벽화 크기만 한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어린아이의 작품 같기도 하지만, 이 시리즈는 현대미술의 최정점을 찍은듯하다.
이곳 SMK의 마티스 전시실에는 그의 인생 마지막 여정중 열정적으로 작업한 컷아웃 기술을 소개한 책 <JAZZ>를 상세하게 볼 수 있다. 그의 컷아웃 모티브는 보면 볼수록 감탄하게 된다. 모티브에 그의 화려하지만 단조로운 색상을 입히면 어떤 조합으로 구성하여도 완벽하다. JAZZ에 나오는 모티브 하나하나는 포스터로도 판매가 되고 있는데 수십 년이 지났어도 이 이상 세련될 수는 없는 디자인이다.
마티스는 나치에 의해 예술 활동에 핍박도 받았고, 가까운 주변 사람들 고통도 목격하였으나 망명하지 않고 끝까지 프랑스에 남아서 프랑스의 자부심이자 아버지가 되어주었다. 그의 막내아들인 Pierre Matisse (1900–1989)는 유대인 및 반나치 프랑스 예술가들이 프랑스를 탈출하여 미국으로 망명하는 과정을 도와주었다. 아버지에게도 미국으로 망명하자고 간절히 얘기했지만 앙리는 듣지 않았다.
미국에 자리 잡은 피에르는 1931년에 자신의 갤러리를 뉴욕에 열고, 1942년에는 망명한 유럽 예술가들을 위한 전시회를 열어 크게 성공하기도 한다. 1989년에 그가 사망할 때까지 유지되었던 갤러리는 유럽의 작가를 미국에 소개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는 아버지 앙리 마티스를 포함하여, 호안 미로, 마크 샤갈, 자코메티, 앙드레 드랭, 발튀스, 레오노라 캐링턴 등을 미국에 소개했다. 그는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유럽에서 보석 같은 작가들을 찾아냈고, 세계 경제의 축이 이동한 뉴욕으로 무대를 옮겨와 작가들을 소개했다. 미국에서 먼저 인정받은 작가들은 거꾸로 유럽으로 명성이 전해지게 되었고, 유럽에서는 뒤늦게 그들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사실상 가장 위대한 작가들의 목숨을 구해주고 작품이 세상 빛을 보게 해 준 데에 피에르의 이름이 빠지지 않는다. 앙리 마티스의 많은 후손들은 지금까지도 미술계에서 비중 있는 활동을 하고 있다. 프랑스 남부 Cimiez(시미에)에 앙리 마티스평생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는 Musée Matisse도 방문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