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주부 성장기
동네엄마로 알고 지내던 한 살 어린 동생이 많이 아프다. 나의 가슴도 너무 아프다.
아이들 학부형으로 만나 알고 지내다가 더 깊이 친해진 건 그 동생이 암이라는 병에 걸리고서부터다. 어느 날 그 동생이 난소암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한동안 연락을 뜸하게 지내던 중이라 너무 놀랐고, 연락이 뜸해서 직접 듣지 못하고 전해 들었다는 것이 너무 미안했다.
그 후로 우리는 더 친해졌다. 수술을 하고 회복을 하고 완치는 아니지만 그래도 머리도 자라고 바깥출입도 가능해지면서 나와 그 동생 그리고 또 한 명의 엄마까지 세 명이서 자주 만나고 매일 톡으로 안부를 물었다.
세 여인의 이름에 모두 '은'자가 들어가서 우리끼리 '은자매'다 '쓰리은'이다라고 톡방의 제목을 정하기도 했다.
해마다 돌아가며 서로의 생일 파티를 챙겼고, 산책도 종종 하고, 카페에서 만나면 하루종일을 떠들어도 끝이 안 날 정도로 즐거웠다.
그러다 세 아이들의 재수가 끝난 겨울에 우리는 가까운 호텔을 잡아 1박 2일 동안 떠들며 재수기간 힘들었던 회포를 풀며 추억을 쌓았다.
나중에 우리 셋이 골프 치러 가자며 나를 골프에 입문시켜 준 친구들도 이 여인들이다. 남편이랑은 안 가도 너희들이랑은 간다며 나는 열심히 골프개인레슨까지 받았다.
하지만 필드를 나가지는 못했다. ㅠ
암이 폐로 전이가 되었다고 한다. 어느 날부터인가 말을 하면 기침을 하더니 나중엔 코에 산소줄을 연결해야 했다. 그래도 우리는 집으로 자주 찾아가 수다를 떨고 그 친구 기분이 다운되지 않도록 했다.
음식을 하면 나누기도 하고, 근처로 영양식 먹으러 가자며 다니기도 했는데 산소줄을 착용한 후는 외출이 힘들어졌다. 그 친구 아파트가 정전이 된다고 해서 우리 아파트로 피난을 시키고 종일 함께 있어주기도 했다.
그러던 중 연락이 두절되었다. 우리는 너무 답답하고 궁금했다. 간간히 톡 보기도 귀찮다는 말을 했기에 처음엔 그런가 보다 했다. 또 아픈 모습 보여주기 싫다는 말을 했었기에 또 그런가 보다 했다.
시간이 꽤 흘렀다. 우리는 서로 걱정을 하고 이런저런 방향으로 생각도 해보며 기다리자고 했다. 또 각자 하는 일이 있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하지만 항상 머릿속으로 그 친구의 안부는 궁금했다.
아침에 전화기를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그 친구의 톡이 와있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톡을 열어보니 그 친구의 남편이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대고 너무너무 긴장이 되었다.
톡의 내용은 남폄임을 밝히며 그 친구가 많이 보고 싶어 하니 병원으로 방문을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병원이름이 원래 그 친구가 다니는 병원이름이 아닌 처음 들어보는 병원이었다.
눈물이 쏟아지려는 걸 부여잡고, 또 한 명의 친구와 통화를 했다. 우리는 병원을 방문했다.
그 친구는 너무너무 말라있었다. 우리가 너무 보고 싶었다고 한다. 눈물을 참으려고 애를 썼다. 친구를 만질 수도 없었다. 살짝만 만져도 손자국이 날 정도로 약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