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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프 Aug 29. 2022

친구의 바다



친구는,

굳이 ‘친구’를 강조하며 첫 번째 손편지를 보내왔었다. 



친구, 지난밤은 몰아치는 폭풍우로 편히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불안한 밤을 보냈다.” “결국 아침이 밝아서 보니, 항구에 늘 눈에 익었던 빨간 뜬 부표 두 개중 하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토록 오랜 세월이 흘러 다른 기억은 거의 다 지워지고 흐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편지의 첫 문장만은 왜 이토록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 해 8월은 강렬한 태양에 맞선 유난히 지치고 힘들었던 시련의 계절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스물한 살 군인은 그 시련의 파도를 온몸으로 맞서다가 힘에 부치면 누군가를 생각하고 그리워해야만 했었다. 그렇게 어린 군인의 간절함으로 인해 비롯된, 친구임을 강조한 담백한 편지가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하얀 이가 드러날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짓게 만들었던, 아담한 항구도시에서 태어나, 나지막한 나무 담장 너머로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 작은 집에 살았던 친구의 첫 번째 바다 이야기였다.



등대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한결같은 모습으로 바다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느 날인가, 뜬금없이 친구는 바다를 떠나고 싶어 했다. “이제 비릿한 바다 내음이 싫어졌다.”  처음엔 권태로운 날들을 보내느라 부리는 가벼운 투정이라 생각했는데 어쩌다 알게 된 사실은 올막졸막한 섬들 사이의 호수 같았던 아름다운 '친구의 바다'가 어느 날 ‘실연(失戀)의 바다’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 후로 한 동안 친구를 위한 위로의 날을 보내고 나서, 그제야 내가 '친구의 바다'를 가슴 설레게 지켜보고 있었던 등대 같은 존재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바다는,

그 속내가 너무 깊어 그 깊이를 쉽게 가늠해낼 수가 없다 가도 격랑이 몰아칠 때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뒤집어 버릴 듯이 격정적(激情的)으로 변해 버린다.


‘친구의 바다'도 그랬을까?’


알 듯 모를 듯 그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았던 친구는 “순간의 선택이 십 년을 좌우하는 것이 과연 냉장고 선전뿐이었던가?”라고 어느 가전제품 광고의 카피라이터를 빗대어 짤막한 편지 한 장을 보내 놓고 선 한 참 동안 소식이 끊겨 버렸다. 

그것은 애써 담백하게 유지되어 왔던 관계에 미묘한 감정의 변화가 생겼음을 의미했지만 그 후로도 친구는 끝내 그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기억은,
시나브로 흐려지거나 때로는 기억의 혼선으로 인해  적당히 왜곡되기도 한다. 특히, 사랑에 대한 기억은 시리게 아픈 기억조차 아름답게 각색하여 책갈피에 갈무리하듯 가슴 한편에 겹겹이 쌓아 두기도 하고, 때로는 한 편의 시가 되어 낡은 노트에서 오랫동안 묵혀지기도 한다.


분명, 그 바다는 ‘친구의 바다’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어쩌면 첫 번째로 가슴 설렘을 느끼게 해 준 ‘설렘의 바다’였는지 모른다

 


“바다 마을 처녀는 

투박한 목소리로 이별을 노래했고

차분한 바다는 

사랑을 삼키고도 파문조차 없었다.


사량도 한편으로 해 넘어가며 남긴

여운의 그림자

어둠이 짙어가며 수놓은 불빛

흐릿하게 느껴지는 바닷물결

시간은,

차츰

위안의 밤까지 인도해 감으로

그들을 

다~ 그리움으로 자리하게 했다.”

 

 - 85’ 바다 마을 중 발췌 -



흔적은,


지나온 흔적은 어디엔 가는 꼭 남아서 먼 훗날, 뒤 돌아보았을 때 긴 시간 수고했노라고 어깨를 토닥거리듯 위로의 토닥임으로 불현듯 떠 오르곤 한다. 설사 거센 파도가 몰아쳐 그 흔적이 다 지워진다 할지라도…


그렇게 ‘친구의 바다’ 흔적도 지워졌다. 
 

그렇게 친구도 지워졌다. 


언젠가는 나도, 모두의 기억 속에서 깨끗이 지워질 날이 있겠지만, 사는 동안, 삶이 깊어지며 깃드는 사막 같은  정서에 온 힘으로 저항하여 만들어야 할 흔적, 그 한 점의  공허한 흔적을 남기기 위해 그렇게 힘내어 또 다른 바다를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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