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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아들 _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초보자의 클래식 일기 6

by 영조

지금은 없어졌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개그콘서트라는 프로그램이 꽤 인기 있었다. 일요일 밤에 방송되던 거라 그 프로그램이 끝나면 '주말 끝, 월요일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개그가 재밌기도 했지만 사람들과 대화에서 소외되지 않으려고 보기도 했다. 그런데 많던 인기가 시나브로 시들더니 결국엔 프로그램이 없어졌다. 그가 재미없어졌다고 말들을 했지만, 재미에 대한 생각도 변했고 재미를 얻는 소스도 다양해졌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건 없으니까.

그중 한 꼭지로 "아빠와 아들" 코너가 있었다. 아빠와 아들이 똑 닮았다는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콘셉의 개그인데, 뚱뚱한 두 개그맨이 아빠와 아들 역으로 나와 모든 일을 “밥 먹으러 가자!”등 엉뚱하게도 먹는 것과 연관 지으며 웃음을 자아내는 코너였다.


예를 들면 아빠와 아들이 캐치볼을 하다가 공을 땅에 떨어뜨린다. 아빠와 아들은 공을 주우려고 허리를 굽히지만 손이 땅에 닿지 않아 공을 줍지 못한다. 그러자 아빠가 미련 없이 하는 말, ‘아들! 밥 먹으러 가자!’하면 아들도 기다렸다는 듯(공에 대한 미련은 일도 없이) '네~'하고 웃으며 아빠를 따라가는 식이다.



아들이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에 맞춰 피아노를 연주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세계적인 거장 피아니스트인 아버지의 연주에 맞춰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젊은 아들의 심정은 또한 어떠할까? 현존하는 피아니스트 중 가장 모범적인 연주를 들려준다는 마우리치오 폴리니 Maurizio Pollini(이탈리아 1942~ )와 그의 아들 다니엘 폴리니 Daniele Pollini(이탈리아 1978~ )의 2014년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실황 이야기다. 처음에는 이들이 부자지간인지 모르고 그저 거장 피아니스트와 젊은 지휘자의 협연인 줄로만 알았다. 인터넷을 찾아보고 나서야 이들이 부자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많이 닮았다.

커튼콜에서 아빠Pollini와 아들Pollini의 모습


보통의 협연에서 오케스트라는 자신들 실력을 과시하려 하고 피아니스트는 주인공으로서 오케스트라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한다.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아빠와 아들'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에게 조금이라도 누가 되지 않으려고 연주와 지휘에 전력을 다한다. 아니, 상대방을 조금이라도 돋보이게 하려고 노력한다. 이렇게 초집중한 연주를 성공적으로 끝내고 아버지와 아들은 격하게 포옹한 후 단원과 관객들에게 인사한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의 손을 꼭 쥐고 들어 올려 몇 번이고 흔들어댄다. 단원들도 흐뭇한 듯 부러운 듯 활과 손뼉으로 축하해 준다. 몇 번씩이나 커튼콜에 응하는 아버지는 ‘얘가 바로 내 아들이오! 잘 났지요?’라고 말하려는 듯 자꾸만 아들을 앞으로 세운다. 그런 그의 얼굴에서는 그야말로 꿀이 떨어진다. 하지만 아들은 '오늘은 아버지가 주인공’이라며 자꾸만 아버지를 앞에 세우고 자신은 뒤에 서려한다.

크나큰 자신의 유명세가 아들의 앞길을 가리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아버지, 이제는 너무 많이 늙어버려 등까지 구부정한 아버지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아들. 이 '아빠와 아들'의 아름다운 케미가 더할 수 없는 감동적인 연주를 만들어냈다. <황제> 명반은 그야말로 차고 넘치지만 이 부자의 연주를 보는 것은 가슴 뭉클한 감동이다.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중 마지막인 5번 <황제>는 서양음악사의 모든 협주곡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이고 베토벤 최대 역작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 기념비적 역작은 그의 생애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탄생했다. 1809년 오스트리아 빈은 프랑스 나폴레옹 군과 전쟁의 참화로 비참했다. 서른아홉 베토벤의 상황은 더욱 절박했다. 귀족들의 빈 탈출로 재정적 후원은 끊겼고 청력은 이미 많이 약해져 있었다. 적군의 포탄이 쏟아질 때에는 책상 밑으로 들어가 베개로 귀를 막고 숨어 있어야 했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최고의 곡이 나온다는 것이 신비롭기까지 하다. 특히 2악장 전반부의 우아하기 그지없는 선율이 어떻게 가능했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베토벤이다.



https://youtu.be/yTLOQGF-c1E

아빠와 아들 폴리니 부자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실황



1악장은 20분이 넘는 긴 악장으로 <황제 >라는 제목에 걸맞게 장대하고 화려하다. 시작부터 압도적인 힘을 쏟아낸다. '꽝~'하고 대포를 발사하듯 오케스트라가 화음을 던지면 피아노가 화려한 연주로 이어받는다. 이렇게 주고받기를 세 번, 임팩트 있는 오프닝으로 관객에게 충격을 주려고 작정한 게 틀림없다. 이어서 현악 파트가 주제를 제시하면 목관이 그 선율을 이어받고 다시 현악 총주가 웅장하게 이어진다. 바이올린이 약한 음으로 스타카토처럼 연주하면 이번에는 호른 두 대가 (멀리서 아련히 들려오는 듯 매력적이면서도 힘 있는) 그 특유의 음색으로 주제를 반복한다. 장쾌한 오케스트라와 그에 지지 않는, 때로는 압도하는 찬란한 피아노, 그 소리의 잔치를 쫓아가다 보면 20분이 금방 간다. 아, 잘 들어보면 웅얼 웅얼 마우리치오의 허밍 소리가 간간히 들린다.


2악장(영상 21:12부터)은 우아하다. 특히 앞쪽 3분가량은 '성스럽다'는 표현이 무색하지 않다. 처음 이 곡을 들을 때 이 부분이 좋아서 여러 번 반복해 들었었다. 지난날의 추억을 아스라이 떠오르게 한다. 만년에 아들과 함께 연주하는 폴리니도 그렇지 않았을까? 어릴 적 아들과의 행복했던 추억들... 누군가 툭하고 건드려 주기만 하면 눈물이 주르륵 흐를 태세다. 2악장은 따로 설명 없이 그냥 듣고 느껴보는 것도 좋겠다.

"어떠신가요? 저와 비슷하게 느끼시나요?"


3악장(영상 28:55부터)은 2악장에서 쉼 없이 이어지는데 과연 베토벤다운 박진감 넘치는 피날레가 압권이다. 차분했던 2악장에서 다시 격렬한 1악장으로 돌아간 느낌이다. 피아노가 내려앉을 듯 힘차게 건반을 두드리며 돌진한다. 마치 작곡가가 '각자의 실력을 맘껏 뽐내며 즐기듯이'라는 지시어를 악보에 써놓은 듯,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는 화려한 소리의 색깔을 쏟아낸다. 둘 다 신났다. 드디어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는 상대가 아니라 하나가 된다.



Pollini 부자의 연주와 반대로 거장 지휘자와 젊은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들어보자. 정명훈(1953년생)이 지휘하는 원 코리아 오케스트라와 조성진(1994년생)의 협연이다. '원 코리아 오케스트라'는 연령, 성별, 소속 등을 초월하여 전 세계에서 다채로운 활동으로 인정받고 있는 재능 있는 한국 음악가들이 한시적으로 함께 모여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다. 젊음의 패기와 거장의 노련함이 잘 어우러진 2017년 롯데콘서트홀 실황이다.


https://youtu.be/qP9gE8Enxfo

정명훈이 지휘하는 원 코리아 오케스트라와 조성진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실황



악장 설명 참고 [더 클래식, 문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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