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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서 광명으로 _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

초보자의 클래식 일기 5

by 영조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내 인생도 역시 그랬다. 비교적 순탄했던 내 삶 최초의 큰 변화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아버지의 갑작스런 사고사에서 비롯했다.

아버지의 삶은 마무리되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소 멸 했 다. 인생의 큰 그림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내 나이 딱 스무 살에 닥친 아버지의 죽음은 엄마는 물론 나와 온 가족의 삶을 표류하게 했다. 거의 모든 것이 바뀌어 갔다. 어떤 일은 갑작스레, 그리고 어떤 일은 시나브로.


당시 많이 들었던 위로의 말이 "다 운명이라고 생각해야지 어쩌겠냐"는 것이었다.


'운명'이란 말은, 감당하기 힘든 사태를 만났을 때 그 엄청난 사태를 순순히? 받아들이라는 주술과 같다. 그러나 이 주술은 체념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엄청난 사태를 받아들이고 나서 앞으로 한 발짝 내디디면 새로운 삶이 있다는 긍정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짧은 유서에도 그와 같은 내용이 있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일부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사랑하는 가족에 대한 당부인데, 짧고 단호해서 명령과도 같다.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 각자의 삶을 살라는...



음악의 성인(聖人)이라는 별칭으로까지 불리는 베토벤은 매우 불행하게 살다 간 사람이다. 아버지는 나름 실력 있는 궁정 테너 가수로 일했지만 돈벌이는 신통치 않았고 나중에는 술주정뱅이가 되어 베토벤을 괴롭혔다. 그는 술 때문에 자주 경찰서에 끌려갔고 그럴 때마다 어린 베토벤이 경찰서에 가서 사정을 얘기하고 집으로 빼내 와야 했다.


이런 아버지를 피해 베토벤은 17세에 음악공부를 위해 오스트리아 빈으로 갔다. 모차르트를 만나서 레슨을 받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2개월 만에 어머니가 위중하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고향 본으로 다시 돌아왔다. 얼마 후 어머니는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야말로 지지리도 운이 없었던 것이다.


베토벤은 어머니의 장례를 끝내고 그럭저럭 5년을 본에서 지내다가 다시 짐을 싸메고 빈으로 갔다. 그로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베토벤은 빈에 정착해서 지냈다. 술주정뱅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본으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교향곡 5번을 본격적으로 작곡한 1807년 서른일곱의 베토벤. 음악에 상당한 재능이 있었지만 모차르트와 같은 신동은 아니었다. 그는 열악한 가정환경과 어려움 속에서도 혹독한 훈련과 노력으로 유럽 음악의 수도 빈에서 드디어 하이든과 모차르트를 이을 차세대 스타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베토벤의 청력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나빠지고 있었다. 의사로부터 청력을 완전히 잃을 수 있다는 경고도 받아 놓은 상태였다. 음악가가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엄청난 사태에 직면하고 있던 거였다. 운명이었다. 설상가상 베토벤이 있던 오스트리아 빈은 나폴레옹의 침공에 점령되는 등 세상 또한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이래저래 견디기 어려운 시련의 시기였을 것이다.


가혹한 운명에 굴하지 않은 베토벤은 '어둠과 고난에서 광명으로!'라는 자신의 모토를 음악으로 만들었다. 글로 쓰자면 대하소설로도 힘들 일을 30여 분의 응축된 음악으로 구현한 것이다. 바로 가혹한 운명에 체념하지 않고 한 발짝 더 내딛겠다는 결연한 자기 암시인 것이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명료한 곡이다.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지휘한 빈 필 <운명>(1974년 녹음) 정명훈이 지휘한 원코리아 오케스트라 <운명>(2017년 라이브)



https://youtu.be/RKcAAA1O2sc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지휘한 빈 필의 <운명>


https://youtu.be/NWWbA5H5pEs

어느 음반에도 뒤지지 않는 정명훈이 지휘한 원코리아 오케스트라의 <운명>


1악장 Allegro con brio(힘차고 빠르게)은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는 그 '빠바바 밤~ '의 네 음으로 시작한다. 이 짧은 동기는 마치 운명을 휘어잡듯 곡 전체에서 반복되며 마력을 발휘한다. 예상치 못한 사태에 맞닥뜨린 인간의 모습을 웅장하고도 격렬하게 나타낸다.


2악장 Andante con moto(느리지만 활기차게)은 1악장과는 사뭇 다르게 느리고 따스한 선율이 고통받는 인간을 다독이며 위안을 주는 듯한 악장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웅장함을 느낄 수 있다.


3악장 Allegro(빠르게)은 스케르초 악장이다. 첼로와 콘트라베이스의 저현으로 시작한 후 호른이 변형된 운명의 동기 '빠바바 밤~ '을 장렬히 연주하며 투쟁의 기운을 북돋운다. 중간에 첼로와 베이스가 일사불란하게 시작하고 바이올린이 합세하여 연주하는 부분이 재미있다. 3악장과 4악장은 쉬지 않고 이어서 연주되는데 4악장으로 넘어가기 전 아주 조용히 연주하는 부분은 곧이어 4악장에서 터질 팡파래를 숨죽여 기대하게 하는 폭풍전야와 같은 긴장감 넘치는 부분이다.


4악장 Allegro(빠르게)은 드디어 승리의 환희와 광명을 마음껏 즐기는 시간이다. 어둠과 비애를 넘어섰다. 고통스런 운명을 극복한 인간 승리의 노래다. '나 승리했다!'고 대놓고 자랑하며 마음껏 즐기고 춤을 추어야 한다. 4악장 마지막은 가만히 앉아서 감상하지 말고 모두 일어나 주먹을 불끈 쥐고 오케스트라와 함께 춤을 추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감당하기 힘든 벅찬 감동이다.



악장 설명 참고 [풍월당 아카데미 2017. 황장원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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