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자의 클래식 일기 4
드디어 ‘피아니스트들의 피아니스트’ 짐머만의 연주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빈필을 지휘하는 번스타인과 짐머만의 환상 케미(특히 마지막 부분을 반드시 봐야 한다)가 압권인 베토벤 '황제'가 너무 좋아 수없이 많이 봤었던 터라 현장 공연을 본다는 것에 흥분되었다. 그것도 2018년 말에 새로 개관한 아트센터인천에서. 아트센터인천은 내가 사는 동네에 있기 때문에 서울까지 가야 하는 수고를 덜 수 있어 좋기도 하다.
예매 오픈 시간에 맞춰 사이트에 접속했지만 몰려든 사람들로 예매 좌석은 클릭조차 되지 않고 남은 좌석은 점점 줄어들었다. 결국은 예매 실패, 다행히 며칠 후 다른 사이트를 통해 들어가 누군가 취소한 표를 예매하는 데 성공했다. 좌석은 2층 왼쪽 앞이어서 피아니스트의 등 뒤쪽이지만 좋고 나쁘고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공연 당일 아내와 딸과 함께 기대감으로 들떠서 공연장으로 갔다. 드디어 무대 조명이 켜지고 짐머만이 열렬한 박수 속에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단정하게 인사하고 악보를 펼쳐 놓았다. 그리고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브람스 피아노 소나타 3번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명필가의 일필휘지랄까? 옷매무새를 만진다든가 손가락을 풀어 본다든가 하는 예비 동작이 전혀 없었다. '모든 준비는 완벽하니 이젠 연주야!'라고 말하듯이. 우리가 앉은 자리에서는 짐머만의 등과 이미 수북하니 백발이 된 뒷머리 그리고 낮은 음을 칠 때의 왼손 모습만 간간이 볼 수 있었다.
브람스 Johannes Brahms(독일 1833~1897)는 3곡의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했는데, 이곡은 그의 나이 스무 살(1853년)에 완성한 마지막 소나타다. 보통 전형적인 소나타는 3악장 또는 4악장으로 이루어지지만 이 곡은 5악장까지 있는 큰 규모의 작품이다. 약관의 나이에 자신의 탁월한 음악적 능력을 과시?한 것이다. 이 곡에 대한 여러 해설들을 보면 '브람스의 젊은 날의 초상'이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젊은 날 브람스의 경험과 심경을 잘 보여준다는 의미인 듯한데, 앞으로의 가능성이 기대된다는 뜻도 담긴 것 같다. 더 많이 들어보면 알 수 있으려나?
이십대 젊은이들의 도전을 칭찬하고 시행착오를 격려해 줘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천재들의 끼는 이십대 초반에 발휘되는 경우가 많다. 꼰대의 시선으로 '너희가 뭘 알아!'라고 하는 순간 그 너희들의 천재성은 평범함으로 바뀌는 것이다. 조성진이나 BTS를 보면 알 수 있다. 조성진은 스물한 살(2015년)에 쇼팽 콩쿠르에서 1등을 차지했고, BTS 멤버 7명 또한 모두 이십대다.
이어서 쇼팽 Frederic Chopin(폴란드 1810~1849)의 스케르초(Scherzo). 스케르초의 원래 의미는 '해학' 또는 '농담'이다. 그래서 스케르초를 굳이 우리말로 하자면 '해학곡'이라고 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스케르초는 템포가 빠른 3박자이며 명랑하고 경쾌하며 리드미컬한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이 스케르초는 원래 독립적인 장르가 아니었다. 보통 4악장으로 구성된 음악 장르인 교향곡, 소나타, 현악 4중주 등에서 주로 3악장에 쓰이던 하위 개념이었다.
예를 들면 1악장 Allegro con brio(빠르고 생동감 있게), 2악장 Marcia funebre (Adagio assai)장송행진곡(아주 느리게), 3악장 Scherzo (Allegro vivace)스케르초(아주 빠르고 생기 있게), 4악장 Finale (Allegro molto)마지막(매우 빠르게)와 같은 식이다.
위에서 들었던 브람스 소나타 3악장도 스케르초다. 그런데 쇼팽은 이 스케르초를 따로 떼내어 '하위'가 아닌 '상위'의 하나의 음악 장르로 만든 것이다. 피아노라는 악기의 특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쇼팽은 이런 재미난 특징을 지닌 스케르초를 하나의 장르로 독립시켜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었나 보다. 아무튼 이런 천재 쇼팽 덕분에 피아노 음악의 장르는 엄청나게 넓어지고 음악적 경지도 이루었으니, 연주자들은 어떨지 몰라도 듣는 우리에게는 축복이다.
같은 조국을 가진 두 사람 쇼팽과 짐머만, 짐머만은 완벽한 테크닉과 정교하면서도 시원한 연주로 감동을 주었다. '손가락에 피아노 건반이 붙어 있다.'는 표현이 과장만은 아닌 듯했다. 명불허전(名不虛傳), 이름이 널리 알려진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와 실력이 있다.
크리스티안 짐머만 Krystian Zimerman(폴란드 1956~)은 폴란드의 음악적 전통이 있는 가정에서 태어나 열여덟 살의 나이(1975년)에 쇼팽 콩쿠르에서 1등을 차지하면서 명성을 얻어갔다. 같은 대회에서 스물한 살의 나이(2015년)에 한국인 최초로 1등을 차지한 조성진은 “짐머만의 쇼팽 연주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두 천재는 사십 년 차이를 두고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두 사람의 연주를 비교해 들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하다.
짐머만은 완벽을 추구하는 무척 예민한 피아니스트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그는 모든 리사이틀에 자신의 피아노를 직접 공수하여 연주한다고 한다. 너무 예민한 거 아닌가? 그런데 좋게 보면 자신에게 딱 맞게 튜닝된 익숙한 악기로 연주하여 관객들에게 최상의 연주를 들려주려는 프로 정신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인지 인간적인 면모가 보였다. 심지어 앙코르 곡을 연주하기 전에 악보를 뒤적거리며 찾는 척을 하는 등 어설픈 아재 개그를 보여주기도 해 웃음을 자아냈다. 세월과 연륜이 만들어준 둥글둥글함이랄까?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난 듯 인간적이고 여유 있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