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조 Oct 08. 2021

시간의 향기_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초보자의 클래식 일기 12

  우리가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 "시간이 없다"는 말은 말이 안 된다. 시간은 그냥 존재한다. 그것도 충만하게. 단 한순간이라도 시간이 충만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다만 우리가 그 충만한 시간 속에 머무르지 못할 뿐.



  『피로사회』로 유명한 재독(在獨) 철학자 한병철이 쓴 『시간의 향기』라는 책이 있다. 제목이 아주 매력적이다. 책은 작얇은데(182p.) 내용은 깊고 흥미롭다. 부제목 '머무름의 기술'이 책의 내용을 짐작케 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 사건에서 저 사건으로, 이 정보에서 저 정보로, 이 이미지에서 저 이미지로 황급히 이동한다."(1) 시간이 빨리 흘러간다는 느낌은 "사건이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한 채, 즉 경험이 되지 못한 채 빠르게 다음 사건으로 넘어가 버리기"(2) 때문이다. 이미 하이퍼링크와 SNS 등은 "지리를, 아예 땅 자체를 증발"(3)시켰고 시간을 흐름이 아니라 순간의 클릭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 결과 "계속 흘러가는 시간의 선 위에 배치"(4)되던 사건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점들로 흩어진다."(5) 문제는 일정한 방향성도 없이 날아다니는 점 위에서는 사실상 머무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지속의 경험이 대단히 희귀한 것"(6)이 된 것이다.


  저자 한병철은 이와 같은 오늘날 당면한 시간문제(과잉 활동으로 인한 머무름의 부재)를 극복할 대안으로  '사색의 시간'을 제시한다. 이미 '비(非) 사색적 삶'이 그저 당연한 일상이 된 현실에서 말이다.



  이 책의 한 꼭지에서는 '향인(香印)'이라는 향을 내는 시계를 설명하고 있다. 원리는 간단한데 무척 매력적인 도구다. 모기향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듯한데, 다만 모기향이 나선형 모양이라면 향인은 복(福) 자와 같은 글자 모양으로 되어있다. 그래서 이 향인이 일정 시간 동안 타고나면 완전한 글자로 ''이라는 문양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동안

  향기는 공간을 채우고 시간이 그 향기에 물든다.
이제 '시간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사색할 수 있다.



  바흐 Johann Sebastian Bach(독일 1685~1750)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사색의 시간으로 침잠할 수 있는 곡들 중 하나이다.


  이 곡의 제목에 등장하는 골드베르크 Goldberg(1727~1758)는 바흐보다는 40여 년 뒤에 태어난 음악가로 클라비어(하프시코드 또는 쳄발로라고 하는데 피아노의 조상 격인 악기) 연주자였다. 그는 드레스덴 주재 러시아 대사인 카이저링크 Keyserlingk 백작에게 고용되어 매일 밤 그의 집에서 클라비어를 연주했다. 불면증에 시달리던 카이저링 백작이 그의 연주를 자장가 삼아 잠을 청했던 것이다. 이 백작은 바흐 음악을 무척이나 좋아해서 바흐가 궁정 음악가가 되도록 많은 도움을 준 후원자이기도 했는데, 어느 날 바흐에게 잠을 잘 오게 할 수 있는 음악을 작곡해 달라고 요청했다. 바흐는 자신의 아내를 위해 작곡했던 <안나 막달레나 바흐를 위한 소곡집>의 한 구절을 떠올렸고 그것을 주제로 변주곡을 작곡했다.


  골드베르크의 연주로 바흐의 변주곡을 들은 카이저링크 백작은 이 작품에 깊은 애정을 보이며 자주 연주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곡은 연주자의 이름을 따서 <골드베르크 협주곡>이라는 제목이 붙게 되었다. 이렇게 붙여진 제목 덕분에 '골드베르크'라는 이름은 바흐만큼은 아니어도 오늘날까지 상당히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수면을 위해 만들어진 곡이라는 말만 듣고 잠자리에서 이 곡을 틀었다간 낭패를 볼 수 있다. 오히려 머리가 명징지기 때문이다. 아마도 수면용으로 작곡되었다는 것은 설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그 위대한 바흐가 한치도 산만하지 않으며, 들을수록 머리가 맑아지는 곡을 자장가작곡했을 리가 없다.

  

  박종호의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중 어느 애호가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감상법을 그대로 옮겨 본다.

  그날이 돌아오면 당연히 일찍 귀가한다. 가족들과 저녁을 먹고 아이들은 가급적 일찍 재운다. 아, 그뿐만 아니다. 아내도 일찍 재운다. 그리고 화장실을 다녀온다. 이제 오디오가 있는 작은 방으로 혼자 들어간다. 문을 잠그고 전화선을 뽑고 휴대전화기도 끈다. 그리고 불도 끈다.
  의자에 좌정하고 앉아 오디오를 켜고 플레이어에 레코드 판을 올려놓는다. 조심스럽게, 드디어 스위치를 넣는다. 이제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듣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멈추어서는 안 된다. 단숨에 다 들어야 한다. 온몸의 감각을 모두 곧추세운 채, 건반악기의 한 음 한 음을 명철하게 따라간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주제(아리아) - 주제를 변형시킨 30개의 <변주곡> - 주제(아리아)라는 3개의 커다란 틀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니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총 32곡의 건반악기(피아노) 독주곡으로 연주시간이 약 50여 분에 이르는 긴 곡이다. 맨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아리아 부분을 여러 번 들어 보면 "아~, 주제로 삼을 만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아하고 영롱하다.


  변주곡이란 음악 형식은 하나의 주제가 계속 변형되며 반복되는 음악이다. 그러니 다른 곡들처럼 클라이맥스 또는 피날레를 향해 치고 가는 맛은 없다. 그러나 조용히 이 곡을 듣다 보면 자신의 내면으로 회귀할 수 있다.



  <골드베르크 변주곡> 명반으로 글랜 굴드 Glenn Gould(캐나다 1932~1982)의 연주를 빼놓을 수 없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글렌 굴드'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글렌 굴드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라고 말할 수는 있을 듯한 피아니스트다.


글렌 굴드가 피아노 치는 모습(왼쪽)과 1981년 녹음 CD 자켓


  그는 글 읽기를 배우기도 전에 악보부터 읽기 시작했다고 하는 음악 천재였는데 피아노의 기인으로 알려져 있다. 1955년 <골드베르크 변주곡> 녹음을 위해 뉴욕의 스튜디오에 나타났을 때의 일화가 유명하다. 그는 더운 날씨에도 외투와 목도리를 했으며 베레모와 장갑까지 끼고 나타났다. 또 어릴 적에 아버지가 직접 만들어준 흔들거리는 의자까지 직접 가져왔다. 연주가 시작되기 전에는 뜨거운 물에 두 손을 담가 손가락을 풀었다. 특히 연주할 때는 허밍 소리를 내서 녹음 전문가들을 애먹였다. 실제로 굴드의 음반을 듣다 보면 이 허밍 소리를 덤으로 들어야 한. 그는 연주할 때 왜 웅얼웅얼 소리 내느냐는 질문에 '내 연주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고요.'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했다고 한다. 이렇게 녹음한  음반은 음악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음반 중 하나가 되었고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했다.



  굴드는 마흔아홉 살인 1981년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또다시 녹음했다. 뇌졸중으로 사망하기 1년 전이었다. 1955년 스물세 살에 녹음한 초 스피디한 연주(연주시간 39분)보다는 한참 느릿하고 여유로운(연주시간 52분) 또 하나의 명반이다.



https://youtu.be/qo6VfM0PSlQ

글렌 굴드가 1981년에 녹음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https://youtu.be/aEkXet4WX_c

글렌 굴드의 녹음 연주 모습

(1) 한병철 씀.  김태환 옮김, 『시간의 향기』p. 61.

(2) 같은 책 p. 52.

(3) 같은 책 p. 46.

(4) 같은 책 p. 36.

(5) 같은 책 p. 42.

(6) 같은 책 p. 65.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