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럼증과 손떨림은 올해로 여든여섯인 엄마를 오래도록 괴롭혀 왔다.그나마다행인 것은 증상이 좋아지지는 않지만 빠르게나빠지지도 않고 있다는 것이다.매일 한 주먹씩 드시는 약 덕분이다. 주치 의사도 더 악화되지만 않도록 관리하자고 한다.
오늘이 바로 정기 진찰을 받고 약을 타는 날이다. 무슨 큰 특혜라도 베풀 듯 하룻밤 같이 자 드리고? 아침 일찍 함께 병원으로 향한다. 의사를 보는 시간은 고작 5분 내외. 하지만 왔다 갔다 기다리고 이것저것 하고 약국에서 약도 타고 하면 결국 반일 연가를 내야 하는 일이다. 오늘도 병원에 들러 진찰하고 약 타고 다시 집에 모셔다 드리고 점심때가 다 되어서야 출근한다.
엄마 걱정과 이런저런 생각에 한참을 넋 놓고 운전하다가 라디오에 손이 간다. ‘좀 일찍 켤걸’. 라디오에서는 처음 클래식을 좋아할 때 많이 들었던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타건이 한 음 한 음 정확하고 박력 넘치는데도 뻣뻣하지 않고 귀에 쏙쏙 들어온다. 오케스트라 연주는 유려하고 피아노와 호흡도 척척 맞는다. 거친 듯하지만 사운드는 명료하고 싱싱하다. 예사롭지 않은 연주다. 지금까지 많이 들었던 어떤 연주에도 뒤지지 않는다. 연주가 끝나자 그야말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뭐지? 연주에 대한 진행자의 설명을 놓치지 않으려고 소리를 키웠다.
제1회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 실황 연주
피아니스트는 반 클라이번 Van Cliburn (미국 1934-2013)이고 오케스트라는 키릴 콘드라신 Kiril Kondrashin (러시아 1914~1981)이 지휘하는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다. 이게 바로 음악적으로는 물론, 문화적 정치적으로도 세계에 일파만파의 충격을 몰고 왔었다던 그 연주였다. 음악으로 사상의 차이나 정치적 냉전 구도를 극복할 수 있다는 평화와 희망의 메시지를 주었다고 극찬받았다던.
1958년 구 소련에서 콩쿠르 우승 후 귀국한 클라이번으로 문화적으로 열등감에 빠져있던 미국은 난리가 났었다(왼쪽). 제 1회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 실황 음반
제1회 차이콥스키 콩쿠르는 미소 냉전이 한창이던 1958년 구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렸다. 그런데 참가자 중 실력이 뛰어난 미국인 청년 반 클라이번이 있었다. 내성적인 데다가 말까지 더듬는 이 미국 텍사스 촌놈에게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물론 단연코 뛰어난 실력 때문이었다. 연주곡은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과 소련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반동? 예술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이었다. 냉전으로 두 나라가 팽팽하게 긴장하던 1958년에 적대국 미국 촌놈이 언감생심 '러시아 피아니즘'에 도전장을? (차이콥스키 콩쿠르보다 훨씬 먼저 시작한 쇼팽 콩쿠르의 역대 1위 수상자를 보면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다. _ 글 맨 아래 참고) 당시 소련은 국가 주도로 음악영재 교육 시스템을 운영하였고, 여기서 선발된 최고의 음악도들을 콩쿠르에 우승시켜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에 소련 음악계의 우월함을 자랑하려고 했었다.
자신들의 음악적 우월성을 세계에 자랑하려고 안방에서 개최한 제1회 콩쿠르. 그리고 심사위원 또한 공산주의 소련에서 동원 가능한 최대의 화려한 인물들이었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작곡가 1906~1975), 에밀 길렐스(피아니스트 1916~1985),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피아니스트 1915~1997), 예브게니 므라빈스키(지휘자 1903~1988), 레프 오보린(피아니스트 1907~1974, 제1회 쇼팽 콩쿠르 우승자) 등.
그러나 소련의 청중들은 미국인 반 클라이번의 뛰어난 연주에 열광했다. 심사위원들 또한 클라이번을 우승자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대국 미국인을 1등으로 결정했다는 사실을 최고 권력자 흐루시초프에게 말해야 하는 심사위원장 에밀 길렐스. 그는 자기가 말하면서도 “아, 나는 이걸 말하고 노동 수용소에 가겠구나” 하고 생각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흐루시초프는 “그 미국인이 정말 제일 잘 치는 거 맞소?”하고 물은 뒤 그의 수상을 허. 락. 했단다. 클라이번의 압도적 연주가 정치와 이념을 무력화시킨 것이다.
이런 스릴 있는 제1회 차이콥스키 콩쿠르의 우승자 클라이번은 우승 당시의 지휘자 키릴 콘드라신과 함께 미국 순회공연과 음반 녹음 등을 함께 했으나, 너무나 큰 관심과 부담에 정신적으로 무너지며 우울증과 편집증세, 그리고 무대 공포증을 겪었다고 한다. 버티고 버티던 그는 결국 1970년에 은퇴했다. 천재적 재능을 길게 발휘하지 못한 비운의 피아니스트였던 것이다.
다행히 바로 그 음원을 디지털 리마스터링 한 CD를 구입할 수 있어서 기쁘다. 이제 음반 도착을 기다리는 두근두근 행복한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