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엘비라 마디간'(1967)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2악장을 대중음악처럼 유행시켰다. 어디선가 2악장의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오면 사람들은 '아~, 엘비라 마디간이네!' 하고 생각했다. 이렇게 영화 '엘비라 마디간'은 음악이 되어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의 별칭이 되어버렸다.
또 다른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와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 역시 그랬다. 모차르트 음악이 영화를 빛냈고 영화는 모차르트 음악을 대중화시켰다.
서커스단의 줄타기 소녀 엘비라 마디간은 귀족 출신의 젊은 육군 장교 식스틴과 사랑에 빠진다. 이미 아내와 두 아이를 둔 식스틴은 전쟁을 혐오하여 탈영했고, 엘비라는 서커스단에 얽매인 삶이 뻔했다. 둘은 자유를 찾아 도주한다. 그러나 사랑의 도피행각은 금방 현실의 벽에 부딪히기 마련. 돈은 떨어지고 숨어 다니는 일도 쉽지 않다. 허기진 엘비라는 산딸기를 따먹고 들풀을 뜯어먹기도 한다. 결국 두 사람은 마지막 피크닉을 종교의식처럼 치르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죽음으로 완성하기로 한다.
풀숲으로 피크닉 나온 둘은 와인을 나누어 마시고 눈으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며 포옹한다. 엘비라를 껴안은 식스틴의 한 손은 피크닉 바구니 속의 권총을 찾아들고 엘비라의 관자놀이를 겨눈다. 하지만 차마 쏘지 못한다.
할 수 없어.
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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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없어.
하세요. 다른 선택이 없어요.
그때 온 데 모를 하얀 나비 하나가 날아든다. 엘비라는 홀린 듯 쫓아가 두 손 모아 나비를 잡는다. 그리고 다시 날려 보내려는 순간 화면은 정지한다.
이어서 총성 한 발,
그리고 또 한 발.
출처_www.imdb.com
인상파 화가의 그림을 보는 듯한 빛과 풀숲 장면들 그리고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2악장의 서정적인 멜로디가 이들의 불륜을 아름답게 만들었다.
모네의 그림 'Relaxing in the Garden, Argenteuil'(정원에서의 휴식, 아르장퇴유 마을) 부분(좌)과 영화 '엘비라 마디간'의 한 장면
모차르트(오스트리아 1756~1791)는 스물아홉 살이었던 1785년 <피아노 협주곡 20번, 21번, 22번>을 연이어 발표했다. 물론 3곡 모두 완성도 높은 작품들이다. 특히 21번은 20번이 나온 지 한 달 뒤에 열리는 예약 연주회에서 자신이 직접 연주할 곡으로 작곡하였다.
당시 연주회 고객들은 귀족과 18세기 말에 떠오르던 신흥 부르주아지들이었는데 이들은 거의 고정 멤버들이었다. 이들의 후원이 절실했던 모차르트는 매번 똑같은 레퍼토리로 단골 멤버들을 실망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따라서 분위기를 바꾸고 색다른 느낌의 곡들을 발표해야 했을 것이다. 신이 내린 천재 모차르트도 가족의 생계유지라는 고달픈 현실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21번 C장조가 20번 d단조의 어둡고 격정적인 느낌과 전혀 다른 밝고 청초한 느낌을 주는 곡으로 탄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2악장은 모차르트 특유의 서정과 애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명반은 영화 '엘비라 마디간'에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으로 사용된 게자 안다 Geza Anda (헝가리 1921~1976)의 1961년 녹음과 프리드리히 굴다 Friedrich Gulda(오스트리아 1930~2000)의 1974년 녹음을 꼽는다.
여기에는 손열음(1986~)의 연주를 소개한다.
아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모차르트를 가장 좋아했어요. 모차르트 음악은 항상 이중적이고 다면적이고 한 번에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합니다. 아무리 짧은 모차르트의 음악도 오페라 같다고 생각해요. 그러면서도 ‘천의무봉’ 같은 완벽한 모차르트의 매무새, 그 자체의 미학이 너무 탁월하죠. - 피아니스트 손열음
그녀는 2011년 제14회 차이콥스키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2위를 차지했고 동시에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최고 연주자상'을 거머쥐었다. 그때 연주한 곡이 바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이었는데 이제는 그녀의 '시그니처' 곡이 되었다. 특히 섬세한 터치와 리듬감으로 자아낸 2악장의 우아하고 격조 있는 아름다움은 반짝이는 아침 이슬처럼 투명하고 영롱하다.
자신의 말대로 '천의무봉 같은 완벽한 모차르트의 매무새, 그 자체의 미학'을 탁월하게 표현했다.
손열음은 2016년 4월 내한한 지휘자 네빌 마리너 Neville Marriner (영국 1924~2016)와 함께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을 협연했다. 두 번의 협연을 마친 노장 마리너는 손열음에게 “당신의 모차르트 연주는 특별해요.”라고 말하면서 자기와 함께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7곡을 모두 녹음하자고 제안했다. "지금 시작해야 50대에 끝낼 수 있지요."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그해 6월에는 영국 런던에서 <피아노 협주곡 21번>을 단 하루 만에 녹음했다. 교향악단은 당연히 네빌 마리너가 60년 전에 창단한 ‘아카데미 오브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 The Academy of St.Martin-in-the-Fields였다. 하지만 이것이 전설적인 지휘자 마리너의 마지막 녹음이 되었다. 4개월 뒤인 10월 그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것이다.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을 담으려던 음반 제작도 당연히 중단됐다.
2년 뒤인 2018년 손열음은 마리너의 유작(遺作) 녹음 <피아노 협주곡 21번>과 함께 솔로 연주곡인 <C장조 피아노 소나타 10번>, <C장조 리종에서 잠들다 주제에 의한 변주곡>, <c단조 환상곡> 등 3곡을 담아 ‘아름다운 미완’의 CD를 출시하여 거장 마리너를 추모했다.
2018년 손열음은 마리너의 유작(遺作) 녹음 <피아노 협주곡 21번>에 <c단조 환상곡>등 3곡을 추가한 CD로 거장 마리너를 추모했다.
2011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을 연주하는 손열음
2011년 14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연주 장면으로 2021년 7월 27일 기준 유튜브 2천만 뷰를 달성했다.(2014년 등록)
차이콥스키 콩쿠르 7년 뒤인 2018년 10월, 한층 성숙하고 여유로워진 연주를 보여주는 손열음
한층 성숙하고 여유로워진 연주를 보여주는 손열음의 2018년 10월 연주
1악장 Allegro maestoso (빠르고 장엄하게) 00:11~
행진곡을 연상케 하는 빠르고 밝은 연주로 시작한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게 되는 관현악 총주를 지나 목관의 유도로 드디어 피아노가 등장해서(연주 시작 2분 정도 후) 주제를 연주한다. 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마치 한 몸인 듯 어긋남 없이 주고받는 선율을 따라가노라면 어느새 시작 부분에서 나왔던 첫 동기로 조용히 마무리한다.
2악장 Andante (느리게) 14:48~
첼로의 저음 피치카토와 '쿵작작 쿵작작'하는 현의 셋잇단음표 연주를 배경으로 제1 바이올린이 꿈을 꾸듯 주제를 풀어놓는다. 그리고 피아노가 이어받아 노래하는 듯한 서정적 선율을 이어간다. 나비를 쫓아 뛰어가는 엘비라의 천진한 모습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애틋함이 교차하는 우아하고 감미로운 악장이다.
3악장 Allegro vivace assai (매우 빠르고 생기 있게) 21:40~
오케스트라가 빠르고 경쾌하게 시작하면 피아노 솔로가 밝고 유쾌한 분위기를 더한다. 이후 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서로 조응하며 빠르게 달려 나간다. 피아니스트의 현란한 기교를 감상할 수 있는 피날레 악장이다.
커버 이미지 출처 www.imdb.com
악장 설명 참고 [더 클래식, 문학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