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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조 Aug 04. 2022

6411번 버스 _ 그리그 <솔베이지의 노래>

초보자의 클래식 일기 32

6411번 버스는 서울 구로동을 출발해서 강남 개포동까지 긴 노선을 왕복하는 버스이다. 새벽 4시에 출발하는 이 버스의 첫차는 강남에 있는 빌딩을 청소하기 위해  출근하는 노동자들로 가득 찬다고 한다.

'출발 FM과 함께'를 켜놓고 출근하던 중 어느 청취자의 사연이 소개되었다. 내용을 모두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자차 운전 대신 버스를 타고 출근하니 두 손이 자유로워서 글을 올릴 수 있어 좋다'라고 했던 듯하다.  버스에 이야기가 나오자 진행자 이재후 아나운서가 고(故) 노회찬을 짧게 소환해 냈다. 이어서 그리그의 <솔베이지의 노래>를 선곡해 틀어주었다.



용접공 노동자 경력이 있는 정치인 노회찬(1956 ~ 2018. 7. 23.). 그는 속 시원한 사이다 발언으로 유명했는데 그의 어록의 정점은 일명 '노회찬 6411'로 알려진 연설이다.


그는 이 연설에서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 역시 평범한 이웃인 청소 노동자들을 언급하며 정당의 역할과 정치인의 존재 이유를 쉽지만 명확하게 제시했다.


이분들(노동자)이 그 어려움 속에서 우리 같은 사람(정치인)을 찾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들 눈앞에 있었습니까? 그들의 손이 닿는 곳에 있었습니까? 그들의 소리가 들리는 곳에 과연 있었습니까? (중략) 사실상 그동안 이런 분들에게 우리는 투명정당이나 다름없었습니다. _노회찬의 연설 중에서


그의 말은 촌철살인이었으되 상대를 비아냥거리거나 깎아내리지 않았다. 말을 꺼내놓고 나중에 주절주절 그 '의도'를 설명하거나 '해명'을 하지 않아도 되는 담백하고 투명한 말이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말에는 해학과 온기가 있었다.


그의 말은 뒤가 같았으며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정치인이었지만 그의 말은 ""이지 않았다. 투명인간 노동자들을 인식할 수 있었던 그는 투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또한 첼로를 켤 줄 아는 정치인이었다. 집안이 그다지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아버지가 '공부를 잘하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악기 하나쯤은 연주할 수 있어야 한다.'며 악기 연주를 권했다고 한다. 그는 정치를 통해 어떤 사회를 만들고 싶냐는 질문'모든 국민이 악기 하나쯤 연주할 수 있는 사회였으면 좋겠다.'라고도 말했었다.


2005년 노회찬은 어설프지만 그리그의 <솔베이지의 노래>를 첼로로 연주했다.



<솔베이지의 노래>는 노르웨이의 문호 헨릭 입센 Henrick Ibsen(1828 ~ 1906)의 희극 '페르귄트'를 바탕으로 역시 노르웨이 출신 작곡가 에드바르 그리그 Edvard Grieg (1843 ~ 1907)가 작곡한 부수음악(연극 등에 붙여지는 음악) <페르귄트 모음곡>에 나오는 노래이다.


'페르귄트'는 노르웨이에서 민담으로 전해 내려오는 철없는 몽상가 페르 귄트 Peer Gynt의 황당한 일대기를 입센이 정리하여 묶어낸 희극이다.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 극의 내용을 짧게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페르(Peer)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몰락한 지주의 아들이다. 그는 천성이 게을러서 집안을 재건해 보자는 어머니 오제(Aase)의 간절한 부탁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과대망상에만 젖어 지내고 있다. 그에게는 참한 애인 솔베이지(Solveig)가 있었는데도 어느 날 마을 결혼식장에서 다른 남자의 신부 잉그리드(Ingrid)를 납치하여 산속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얼마 후 잉그리드를 버리고 산속 마왕(魔王)의 딸과 유희를 즐기다가 간신히 도망치기도 한다.


산에서 돌아온 페르는 집으로 돌아와 솔베이지와 함께 살지만 다시 망상에 빠져 결국 그녀를 남겨두고 다시 세계 각지를 유랑한다. 모로코와 아라비아를 떠돌면서 사기를 치고 또는 예언자 행세를 하며 큰돈을 벌었다가 빈털터리가 되기도 하는 등 방랑 생활을 이어간다. 이윽고 머나먼 신대륙 미국까지 건너간 페르는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을 발견하여 거부가 되었다.


이제는 늙어버려 그리운 고향으로 향하는 페르 배에 금은보화를 가득  귀국길에 오른다. 하지만 배는 고국 땅 노르웨이가 눈앞에 보이는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난파당하고 간신히 목숨만 건진다. 무일푼 거지가 된 늙은 페르는 솔베이지가 고 있는 언덕 오두막에 찾아든다. 긴 세월 기다림에 백발이 솔베이지는 아직도 페르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 솔베이지의 무릎에 머리를 누인 늙은 페르는 그녀의 자장가 노래를 들으며 눈을 감는다. 



노르웨이의 국민적 극작가로 추앙받던 입센으로부터 희곡 '페르귄트'의 부수음악 작곡을 의뢰받은 그리그는 꽤 오랜 시간 작곡을 망설였다고 한다. 자신이 깊이 존경해 마지않는 선배로부터 의뢰받은 작곡을 망설였던 이유는 무엇일까?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희곡 '페르귄트'의 내용이 자신의 작곡 스타일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다른  하나는 당시 입센과 쌍벽을 이루던 노르웨이의 문학가 비외르손 Bjørnson(1832~1910)과의 관계 때문이라는 설이다.


190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비외르손은 나중에 입센과 사돈지간이 되었지만, 그 둘은 경쟁과 선망 그리고 질시가 섞인 복잡한 애증의 관계였다고 한다.   대선배의 중간에서 어느 누구의 편도 들 수 없었던 그리그 입센의 작곡 의뢰를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난처한 처지였던 것이다.


결국 1874년 31살의 그리그는 그의 고향인 항구 도시 베르겐에 틀어박혀 1년 동안 작곡에 매진하여 총 23곡이나 되는 부수음악을 완성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876년에 오슬로 국민 극장에서 초연하여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는 극과 음악의 성공에 고무되어 23곡의 부수음악 중에서 8곡을 골라 관현악 모음곡을 만들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즐겨 듣는 <페르귄트 모음곡 1, 2>인데 아래와 같이 각각 4곡씩 총 8곡으로 되어 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사랑받는 곡이 '아침 기분(Morning Mood)'과 '솔베이지의 노래 (Solveig's Song)'이다.   


<페르귄트 모음곡 1>

1. 아침 기분(Morning Mood)

2. 오제의 죽음(Aase's death)

3. 아니트라의 춤(Anitra's Dance)

4. 산속 마왕의 동굴에서(In the Hall of the Mountain King)


<페르귄트 모음곡 2>

1. 잉그리드의 비탄(Ingrid's Lament)  

2. 아라비아의 춤(Arabian Dance)

3. 페르 귄트의 귀향(Peer Gynt's Return)

4. 솔베이지의 노래(Solveig's Song)



'아침 기분(Morning Mood)'은 모로코 해안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는 아침 기분을 읊은 것으로 플루트와 클라리넷이 여는 아침 기분이 상쾌하면서도 장엄하게 펼쳐진다.


 https://youtu.be/g2-a63dCPT0



솔베이지의 노래(Solveig's Song)는 기약 없이 집을 떠나 방랑하는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가 구슬픈 맬로디에 애잔한 가사를 노래하는 망부가(望夫歌)이다.


https://youtu.be/LLXXdVlGRjk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또 겨울이 가면 봄이 오겠죠
그리고 여름이 오고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가겠죠

그러나 언젠가 그대가 돌아오실 거라 굳게 믿고 있어요
전 확실히 알아요
그래서 난 약속대로 그대를 기다릴 겁니다
난 기다릴 거라 약속했어요

아....



표지 사진 _ 헤르베르트 블룸슈테트가 지휘한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페르귄트 모음곡> CD 표지


참고   [이 한 장의 명반, 안동림]

           [더 클래식 둘, 문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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