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나는 유공자 3편
오랜 망설임 끝에 드디어 부모님께 편지를 올렸다.
"저는 나라의 부름을 받고 이곳 월남에 파견되었습니다. 아주 아주 안전한 곳에서 잘 지내고 있으니 안심하십시오".
당시, 부모님의 슬픔이 어떠했을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이즈음 월맹군의 공습이 더욱 심해졌다. 국내에서는 연일 베트남 전황을 톱으로 보도했다고 한다.
그 유명한 "안케패스 작전"에서 비록 고지는 탈환했지만 1 증대에서 100여 명이 지원 나가 겨우 29명만이 살아 돌아왔다.
귀대한 그들이 헬기에서 내리자마자 땅바닥에 엎어져 통곡하는 모습은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었다.
그즈음 상부에서 명령이 내려왔다.
월맹군의 공격이 더욱 심해질 예정이니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여 부모님께 유서를 쓰라는 것이었다.
손톱, 발톱, 머리털, 심지어 눈썹 까지도 뽑아 지급된 비닐봉지에 담고 , "아버지 어머니 불효자를 용서해 주십시오.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공산주의와 싸우다 영광스럽게 갑니다".
대충 이렇게 써서 봉투에 넣고 풀로 부친다음 제출했다.
귀국 후 친구들한테서 들은 얘기는 나의 가슴을 더욱 미어지게 했다. 일본에 사는 친척으로부터 헌 옷가지 등을 부쳐왔는데 송장이 영어로 쓰여 있었단다. 영어를 모르시는 어머니께서 그걸 들고 혹시나 아들의 사망통지서가 아닌가 하고 울면서 동네방네 물어보고 다녔다고 한다.
드디어 나는 1년간의 파란만장했던 전투생활을 마감하고 귀국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조국 대한민국 삼천리 금수강산이 그렇게 아름답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비쩍 말라 버리고 , 새까맣게 변해버린 아들의 얼굴을 연신 비비며,
"살아와 줘서 고맙데이, 살아와서 고맙데이"하시던 어머님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우리가 철수하고 얼마 안 되어 자유월남이 패망하여 수백만 명이 숙청되고 백만 명이 넘는 보트피플이 되어 떠돌아다닌다는 소식을 듣고 짠한 느낌이 들었다. 용맹스러운 우리 따이한이 있을 때는 땅굴 파고 숨기 바빴던 그들이었는데, 부패하고 무능한 관료들과 베트콩의 집요한 버티기로 결국 패망하고 말았지만, 전쟁을 기화로 우리나라 국방은 더욱 현대화할 수 있었고 경제발전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월남의 패망을 보고 먼 나라의 일이라고만 치부해 버리는 머저리들이 있는가 하면 , 낯선 이국 땅에서 월맹 정규군뿐만 아니라, 밤에는 민간인 낮에는 베트콩인 그들과 목숨 걸고 싸우고 있을 때, 어쩌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 화상들이 일부 베트남 민간단체의 주장만 듣고 민간인 학살이 있었느니 어쩌니 하면서 주제넘게 떠드는 걸 보면서 당시 베트남 상황과 오늘의 우리 현실이 비교되어 소름이 돋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당시 참전자 총 325,867명 중 전사자 5,099명, 부상자 10,962명을 포함 대부분이 크든 작든 고엽제 후유증을 앓고 있다. 혹시라도 우리들의 명예에 한 점이라도 억울한 일이 없기를 간곡히 바랄 뿐이다.
그러나 나는 운 좋게도 살아남아 얼마 전에 다낭 호이안 패키지여행을 가서 호이안강 유원지 바구니배를 타봤다. 강유원지 전체가 마치 한국의 어느 축제장에 온 것 같았다. 새삼 내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게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우리 가요 "내 나이가 어때서" "찬찬찬" 등을 부르며 엉덩이 춤까지 추면서 열심히 재롱? 떠는 그들을 보며 세월의 아이러니를 실감했다.
천 원짜리 지폐를 팁으로 던져주는 내가 55년 전 저들의 땅에서 자유를 위해 목숨 걸고 싸웠던 용맹스러운 따이한 이란건 모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