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회피법
“온 가족들이 나한테만 기댔지만 나는 기댄 적 없어.”
길을 떠도는 들개 같은 부모와 그 안에서 중심을 잡고 나아가는 언니, 그런 언니를 보며 정답을 찾는 나. 언니는 못 배운 우리 부모, 고물상에 물건을 갖다 주며 돈을 버는 먼지가 까맣게 내려앉은 작업복을 입고 집에 들어오는 부모를 보면서도 꿈을 꿨다.
예체능에서 두각을 보이던 언니는 이미 현역으로 서울의 명문대를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전공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며 과감히 고3 때 진로를 바꿨고 재수를 결심한다. 20살의 언니는 아직 차가운 새벽에 일어나 학원비를 벌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고 으슬으슬한 저녁 제일 마지막까지 학원에 남아있다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의 지원도 없었는데 예체능을 한 언니, 참 대단하지. 엄마는 언니에게 난 뒷바라지 못해주니 지방의 국립대학교나 들어가라고, 언니는 학원에서 충분히 서울의 명문여대에 들어갈 실력이라 했다며 인서울을 꿈꿨지만, 결국 고향에 남았다.
언니가 대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나와 언니는 떨어진 실타래처럼 한없이 멀어진다. 학부생 때부터 언니는 활동을 시작했고 주목받는 신인이 되었다. 매일 출장을 다니며 집에 없었고, 그러다 작업실을 핑계로 집을 나갔다. 방 하나를 대학 갈 때까지 같이 쓰며 밤마다 말 거는 소리에 잠을 깨우던 자매는 이제 닿기 힘든 선이 생겼다. 점점 얼굴 보기도 일상이야기하는 것도 년에 손을 꼽게 됐지만 그리운 마음을 토로하다가도 입을 막아야 했다. 언니에게 중요한 건 일, 연인, 친구 제일 마지막이 가족이니까. 오랜 팬은 우상을 멀리서 응원해야 한다.
대학을 준비하던 나도 언니를 보며 꿈을 꿨다. 글을 쓰는 작가. 하지만 부모를 보며 생긴 ‘안정감’과 ‘평범함’의 거대한 결핍과 욕구는 결국 나를 전문직의 길로 이끌었다. 내가 대학생이 되면서, 한때 같은 세상을 공유했던 자매의 세상은 둘로 나눠진다.
누구보다 독립적으로 보였던 언니도 기댈 곳은 필요했던 걸까, 언니는 끊임없이 남자친구가 있었고 자취를 하면서 남자친구와 반동거를 했다. 이해를 하지 못하는 나에겐 결혼을 전제로 하는 거라며 부모에게 남자친구를 소개했지만, n번째가 되자 더 이상 '결혼전제'라는 단어는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언니가 남자를 좋아하는 것도, 남자 없이 못 사는 것도 알지만 결국 언니는 선을 넘겼다. 나도 얼굴을 아는 애인이 있는, 속 얘기를 유일하게 털어놓던 남자인 친구를 건드려 놓고 며칠 안 지나 새로운 남자친구가 생긴 것이다. 당시 난 며칠 전 직장 내 성추행을 당해 정신적으로 위태로웠고 언니를 찾아갔다. 언니를 찾아온 나에게 크리스마스이브라서 남자친구와 외박할 테니 귀찮게 굴지 말란 언니의 대답. 내가 의지할 수는 없게 굴면서 어떻게 유일하게 속얘기를 털어놓는 친구를 잃게 만드나, "넌 정말 남자한테 미쳤구나?" 안전기지가 모조리 무너진 난 한없이 추락했다.
언니는 끝내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고 2년간 언니의 연락처를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서로 데면데면한 게 익숙해질 때 다시 언니는 연락처를 알려줬다.
남편과 동거하던 시절, 남자친구였던 남편과 크게 싸우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잠깐 고향에 내려왔다. 언니의 허락을 받고 어렵게 들어올 수 있었던 나의 고향집. 이곳에 쉬러 내려왔다는 나에게 모호한 표정으로 “신기하네, 나에게 이곳은 그런 곳이 아니거든.” 그러며 “넌 여전히 눈치 없고 부정적이구나."
전형적인 회피형 애착인 언니에게 고향집은 그저 월세를 아낄 수 있는 방법이었고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이다. 나는 눈치 없이 언니의 바운더리 안으로 들어온 것이고 여전히 언니는 의지할 수 없는 존재다.
그래도 고향집이 언니집은 아니지 않나, 비밀번호까지 바꾸며 허락받아야만 들어올 수 있는 게 정상인지 모르겠다. 이기적이고 못된 인간.
언니에게 더 이상 의지하지 않은지 수년이 흘렀다. 이제 언니의 어깨가 가벼울지, 속상한 마음이 들다가도 어릴 때부터 어른으로 살 수밖에 없던 언니가 본인을 지키기 위해 가족을 밀어낼 수밖에 없었다는 걸, 언니를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이제는 언니가 언니나이에 맞춰 편하게 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