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쏟아진 물
아무도 나를 지켜주지 않아. 근데 나도 나를 지키질 못해. 그러니 나는 날 포기해.
돌변하는 아빠, 나를 욕하고 때리고 괴롭히는 엄마, 결정적인 순간 날 외면하는 언니. 그리고 너무 어린 나. 어린 나는 나를 지키지 못해.
“왜 그것도 모르니?” 한심하게 쳐다보지 마.
알려준 적 없잖아. 가르친 적 없잖아. 기다려준 적 없잖아.
내가 작은 아이였을 때부터 놀라 소리를 지르거나 울음을 터트리면, 엄마는 손부터 날렸다.
“시끄러!”
부모는 흥분한 아이를 폭력으로 잠재웠고 성장한 아이는 감정을 다물고 감정을 여는 방법을 모르게 된다.
묻어둔 수많은 기억을 조금씩 내 손으로 파헤쳐 본다. 찢기고 타버리고 밟힌 기억의 밑바닥. 얼핏 보게 되니,
마음이 너무 아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아파.
자꾸만 계속 울게 된다. 지하철에서, 회사에서, 소파에서, 침대에서, 거리에서. 소리 없이 운다, 아무도 모르게. 입은 굳게 다물고 눈물샘만 열릴 뿐이다.
그렇게 하루에 몇 번씩 몇 시간을 울어도 난 괜찮다. 집에 갈 수 있고, 아무렇지 않게 일을 할 수 있고, 집안일을 할 수 있고, 남편과 일상이야기를 할 수 있다.
잘하고 있다. 다만 이 기억들이 나를 덮쳐 버릴까 봐 무섭다. 판도라의 상자처럼. 그러니 조금씩 천천히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열 것이다.
방 둘, 주방 겸 거실 하나, 화장실 하나. 그 작은 집에서 있던 많은 일들.
식탁이 없는 집은 밥을 먹을 때마다 바닥 위에 항상 상다리를 펴야 했다. 상다리를 피고 나면 엄마는 하나둘 음식을 가져와 나르고 밥과 국을 떠서 언니와 나에게 올려다 놓으라고 시켰다. 그리고 수저와 컵. 엄마는 밥을 먹을 때 물을 마시지 않았다. 그래서 냉장고에서 꺼낸 물통에서 따른 세 잔의 물컵, 물컵을 옮겼다.
나는 자꾸만 물컵을 쏟았다. 물컵을 옮기다가도, 물을 마시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자꾸만 손에서 미끄러지고 물컵을 치게 되고 물컵은 쏟아졌다.
물컵이 쏟아지면 구타당한다.
엄마에겐 자비란 없고, 엄마의 성난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맞고 나면 쏟아진 물을 닦는다.
미숙한 아이는 부주의한 실수를 반복하고, 미숙한 엄마는 폭력을 반복한다. 반복되는 생활.
물컵은 항상 왼쪽에 둔다. 오른손잡이인 나는 오른쪽에 두면 자꾸 물컵을 치게 되니까. 카페에서 물컵을 쏟으면 당황하지 않고 티슈로 닦는다. 그리고 새 음료를 시킨다.
당황하지 말자. 대처할 수 있다. 당황하면 나는 먹잇감이 된다. 절대 당황함을 보여선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