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명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 나의 죄목은 비밀번호 분실죄다. 디지털 기기는 정확한 숫자조합을 요구하며 에러 음을 계속 울린다. 내가 만든 나의 집에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이 되었다. 나를 모르냐고 애원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난감하다. 이 순간 내 집은 타인의 공간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비밀번호만이 현관을 통과해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프로세스 process였다. 기억으로는 나와 연관된 여러 숫자 중 분명히 잊지 않을 조합으로 만들었던 여섯 자리의 숫자였다. 코드화된 숫자만이 나를 증명하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기억해야 했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간신히 집에 들어갔으나, 그날의 긴장과 불안을 다시 떠올려본다.
오래전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환자인 어머니의 주민등록번호부터 확인해야 했던 경험이 있다. 경황없는 중에 쉽게 기억해 낸 것은 어머니와 나의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같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어머니와 나의 번호가 동일하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병원에서의 모든 업무는 온라인으로 연결되어 있다. 환자의 긴급한 상황을 알릴 수 있는 것도 보호자의 빠른 대처와 상황설명이다. 어머니의 침상에 적혀 있던 숫자는 환자의 본인 인증과 병명, 치료 방향 등을 확인해 주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진단명은 상세불명의 우울에피소드 F32.9다. 질병에 대한 체계적인 통계와 분류를 세분화하여 숫자로 코드화된 것이다. 우울증도 세분화된 유형으로 복잡해졌기 때문에 숫자 코드로 분류하게 되었으리라. 어머니는 상세불명의 우울에피소드 F32.9라는 숫자 안에 갇혀 오늘도 일상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현대인의 삶은 복잡다단複雜多端하다. 때로는 슬픔과 상실감 앞에 감당하지 못하는 좌절로 쉽게 벗어나지 못하기에 누구라도 어떤 숫자의 우울 코드에 해당될지 모른다. 어머니의 건강에 대한 불안과 나의 또 다른 문제로 인한 우울은 내 마음속에도 무겁게 자리 잡고 있다. 나의 인생 차트에 앞으로 몇 개씩의 건강 불안 코드를 더 받아야 할까.
어느 날 회사의 인터넷 주소가 바뀌었다. 업무가 잠시 중단되었다. 주말에 사무실과 현장의 전기공사가 있었다. 업체에 보낼 서류를 스캔하고 전송해야 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파일이 보이지 않았다. 직원들과 업무 프로그램이 연결되지 않아 네트워크 상에서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당황해 전문가를 불렀다. 서로를 연결하는 주소인 인터넷 I.P가 전화번호와 같은 기능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집 주소나 전화번호는 임의대로 바뀌지 않지만 I.P 주소는 어떤 문제를 감지하면 스스로 주소를 바꾸기도 한다. 컴퓨터 네트워크 상에서 나의 위치를 알리거나 편리한 정보를 전해준다. 이렇듯 편리한 기능도 숫자와 밀접했다.
숫자로 자신을 표현한 이상의 시 「오감도」다. 그중 시제 4호 안에는 ‘환자의 용태에 관한 문제 진단 1931.10.2. 책임의사 이 상’이라는 내용과 숫자들이 거울 안에 뒤집힌 채 나열되어 있다. 명확히 해석되지 않아 모호한 숫자의 배열이다. 누군가는 폐결핵을 진단받았던 이상의 진단명이라 했던가. 1~9, 0은 모든 조합을 만들 수 있는 숫자다. 이상은 이 시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복잡한 듯 연결되어 있는 거꾸로 뒤집힌 숫자의 이미지를 다시 한번 찾아본다. 그는 숫자를 뒤집어 아픈 자신을 표현한 것인가. 아니면 그만이 풀 수 있기에 누구도 풀지 못할 비밀 코드를 설정한 것인가.
숫자들은 세분화된 현대사회에서 일상생활의 편리와 영역을 넓혀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인과 연관되는 숫자들을 기억하고 있다. 나만의 고유한 번호를 갖게 되면 그에 따른 책임도 주어진다. 그것은 또 다른 나이며 어떤 상황에서 나를 증명해 주기 때문이다.
숫자 안의 나를 생각한다. 아날로그 시대를 거쳐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내게는, 던져진 주사위처럼 우연인 듯 부여받은 숫자의 조합이 계속 생성되고 있다. 주민등록번호, 전화번호, 통장번호, 비밀번호, 4대 보험 가입 번호, 아파트 호수, 자동차 번호…. 자고 일어나면 하나 더 늘어난 인식의 기호와 만난다. 내게 주어진 하루를 허투루 마뚜루 보내지 말라 함인가. 어쩌면 그것들은 내게 있어 지문처럼 통과의 열쇠가 되어 주기도, 생의 흔적으로 남겨지기도 한다. 언젠가는 무의미하게 지워져 버릴지도 모른다.
르네 마그리트의 <골콩드>의 화폭에서 겨울비가 내리듯 멈춰진 인물들을 나의 모습으로 환치해 본다. 실제의 나 자신으로 인식되는 몸은 고정되어 언제까지나 하나뿐일 것이다. 그러나 숫자들이 또 다른 나를 만들고 있지 않은가. 대표적인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주민등록번호를 적어 본다. 숫자에 담긴 의미를 하나씩 찾아본다. 주민등록번호뿐 아니다. 카드번호나 물품주문번호, 택배송장번호 등 내 주변의 숫자 비[雨]는 매일 마그리트의 화폭에서처럼 줄기차게 쏟아져 내린다.
지금 이 순간도 디지털시계는 숫자를 바꾼다. 일상은 나와 연관된 숫자들보다 무관한 숫자들로 가득하다. 숫자 안에 내포된 많은 정보들은 나라는 인간을 객관적으로 증명해야 할 코드다. 그것들을 모아 비밀 노트에 기록한다. 나라는 존재만으로 나를 증명할 수 없을 때 나를 인증하기 위해, 필요할 때 꺼내볼 수 있도록 보관한다. 오늘도 숫자 비[雨] 속을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