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지도

by 최희숙


바람이 되고 싶은 날이다. 구름은 물결이 되어 푸른 하늘에 음영을 담아 하얀 몸빛을 띄우고 있다. 오늘 날씨는 맑음이다. 반복되는 일상에 지칠 때쯤 가끔 길을 나선다. 그러면 무겁게 이끌고 갔던 마음의 한구석을 가볍게 비우고 올 수 있기 때문이다.
도시를 조금 벗어나면 시야를 끌어당기는 송전탑에 거미줄 같은 줄다리가 있다. 태풍이 강력하게 휩쓸고 지나간 뒤여서인가. 가슴 아픈 피해 현황을 방송으로 접할 때마다 자연재해가 얼마나 무섭게 일상을 허물어 내려앉게 할 수 있는가를 실감한다. 거인 같은 송전탑이 무너지면 어쩌나 하는 기우杞憂가 문득 가슴에 바람을 일으킨다. 내 얘기를 듣고 있던 친구는 “송전탑 안에 바람의 길이 있어 괜찮다.” 한다.
바람의 길이 보일 리 없다. 그리 얘기하는 그는 이미 자신만의 바람의 길을 만난 것인지 모른다. 송전탑을 다시 바라본다. 철재 구조물의 정형화된 모양이 마치 송전탑의 온몸에 바람을 위한 길을 조각해 놓은 것 같다. 강력한 태풍을 막아서지 않고 그대로 보낼 수 있으니 저리 당당한 자태로 서 있나 보다.
어찌 송전탑뿐이랴. 내 불안의 물음은 다리를 볼 때도 이어진다. 예측할 수 없는 바람을 계산하고 저리 위풍당당하게 길이 되어주고 있는지. 오랜 기간의 축적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바람의 강도를 계산하고, 아무리 강력한 태풍이라도 극복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리라. 그러기 위해 바람의 지도가 그려지지 않았을까 싶다. 계산하기 위해서는 미리 여러 가지 상황 변화에 따른 판단이 필요하다.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불어올지 모르는 바람을 견디고 이겨내는 방법을 배워 익숙해져야 한다. 많은 경험이 쌓여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어디쯤에선가 바람의 길목이었을 길은 직선이 아닌 곡선이다. 강풍에도 유연하게 대응하며 바다 위에서 길이 되어주고 있는 다리를 건넌다. 나를 새로운 길로 안내하고 있다.
하늘에도 바다에도 바람의 길이 있다. 하늘을 바라보려면 바다로 가야 한다. 바다의 어디쯤에서 바라보면 하늘은 바다와 한 몸이다. 하늘의 구름이 바람에 밀려 느리게 유영遊泳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다가도 언제 고요하였는가 싶게 매서운 눈빛을 번득이는 짙은 구름을 몰고 와서 한바탕 울음을 쏟고 가기도 한다. 어느 날은 잔잔하게 흐르는 물 같기도 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변덕을 부린다. 오늘의 하늘이나 바다는 어제와 또 다르다. 끝없이 모습을 바꾸어가며 반복되는 지구의 수레바퀴이다.
바다에 서면 하늘이 유난히 더 잘 보인다. 같은 장소일지라도 하늘과 바다는 한 번도 같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바람이 구름과 파도로 그리 변덕스럽게 조화를 부리는 것인가. 거친 파도가 방파제 바위에 세차게 부딪는다. 바위만이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운다. 무거운 추를 달았건만 빠른 물살에 낚싯줄이 힘없이 흘러간다. 오늘은 바다가 컨디션을 회복해 쉽게 자리를 내어줄 것 같지 않다.
물때 따라 물고기가 들어오고 나간다. 그 길에는 바람도 함께 해 주어야 한다. 같은 물때의 날에 이곳에서 물고기를 몇 마리 낚았다. 오늘은 낚싯대만 드리울 뿐이다. 바람의 길은 물고기에게조차 같은 곳으로의 회귀를 허락하지 않는다. 물고기들도 그들만의 바람의 길을 지도로 갖고 있을지 모르겠다. 바람은 머물지 않는다. 그러기에 막힘없이 흘러갈 길이 필요하다. 하늘과 바다는 있는 그대로 바람에게 온전히 길을 내어주었다. 오늘은 다른 길로 연결되어 있나 보다. 한 마리의 물고기도 만날 수 없었지만, 또 다른 날에는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내게도 바람의 지도가 있을 것이다.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온전히 몸으로 견디며 때론 깊은 상처를 입기도 했다. 상처를 감싸고 스스로 치유할 수 있기도 했지만 덧나고 흉터가 되기도 했다. 고통의 순간도 지나고 나면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간다. 내 지나온 시간 속에 바람이 길을 내고, 내 안에 만들어 놓은 지도를 가끔 꺼내어 들여 다 볼 수 있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기에 가끔 바람이 되어 또 다른 바람을 만나고 싶은지 모르겠다. 지금도 여전히 바람이 내게 새로운 길을 만들고 있음을 알게 된다.
바람은 스스로 길을 만들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오늘 나는 어느 곳이라도 헤집고 다닐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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