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옇게 흐린 하늘을 키 큰 삼나무가 장벽처럼 솟아 오전인데도 새벽 어둠을 만든다. 제주 올레 14-1코스 종점에 있는 조랑말 모양의 올레간새는 초록 카스테라 같은 녹차밭을 굽어보는 듯 서서 가파른 돌무더기 저지 곶자왈 입구로 들어가는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울퉁불퉁한 현무암 오르막길을 지그재그로 올라 장벽같이 서 있는 삼나무 몇 그루를 왼쪽으로 돌아가면 사람 한 명이 간신히 ㄷ자 형태의 통로를 돌아 들어가야 하는 목장의 쇠파이프 문이 나타난다. 이런 통로의 구조는 말을 방목하는 제주 목장에서 흔히 보게 되는데 사람들은 통과하되 허리가 긴 말은 통과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눈 내리는 1월보다도 봄이 가까운 2월 말인데 바람은 더 매서워 오설록 녹차밭에서 윙윙거리고 곶자왈을 가득 메운 키 큰 나무들은 바람에 흔들려 빗질하는 소리를 냈다. 분명 오설록 쪽 녹차밭에서는 한기를 막느라 모자를 눌러쓰고 점퍼 지퍼를 목까지 채워 올렸는데 저지 곶자왈 방목장의 문을 통과하자 훈훈하면서도 습한 바람이 얼굴을 매만져 주고 있었다.
제주도 서쪽 한경면 저지리에 위치한 이 곶자왈은 화산암 지형 위에 형성된 원시림으로, 수풀과 덩굴식물, 바위, 용암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숲이다. '곶자왈'이라는 말은 덤불과 나무 등이 뒤엉킨 숲을 뜻하는 제주어인데, 곶은 덤불이나 나무라는 뜻이고 자왈은 덤불이나 관목들이 우거진 거칠고 험한 땅을 의미한다. 제주에서 곶자왈은 사람이 들어가기 어려운 곳으로 여겨졌고, 실제로 개발이 어려운 지역이기도 해서 자연 그대로의 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왔던 곳이다.
방목장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따라 걸으면 어른 허리 높이로 무더기진 현무암들이 줄지어 쌓여 있다. 이것을 제주에서는 잣성이라고 하는데 방목하는 말이나 소가 방목장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울타리 기능을 한다. 우리가 걸어갈 올레코스는 드문드문 잣성들이 흩어져 있고 용암이 흘러간 자국이 선명한 현무암 암반들을 뒤덮고 나무와 덩굴들이 하늘을 가리며 자라고 있었다. 곶자왈의 바닥은 어른 허벅지 같은 나무뿌리들이 거미줄처럼 퍼져 지진이 난 것 같은 울퉁불퉁한 바닥의 위태로운 바위들을 감싸며 사방을 붙잡고 있는 듯하였다. 흔들리는 현무암 잔돌들과 이끼 낀 나무뿌리를 등산 스틱으로 찌르듯이 확인해 가며 단단한 암반 위로 한 걸음씩 내디뎌 가는 과정은 중도 실명한 내가 점자를 처음 배우며 한 점 한 점의 위치를 더듬어 읽는 심정이었다. 내 앞에는 미로 같은 곶자왈에서 방향을 잡고 이끌어 가는 자원봉사자 박 선생님이 계셨고 뒤에는 박 선생님의 지인이신 안 선생님께서 내 발 주변 지형들의 상황을 설명해 주며 따라오고 있었다. 저시력 시각장애가 있는 내 눈에는 짙은 안개가 가득 낀 어두운 밀림을 희미한 그림자를 따라 걷는 느낌이었다. 곶자왈의 검은 바닥은 깊은 계곡의 절벽 같았고 앞에 가는 안내자의 그림자 같은 형태를 놓치면 암갈색 기둥 같은 나무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했다. 밤새 내린 비로 이끼 낀 현무암 돌들은 축축했고 진흙처럼 물컹거리는 흙 사이에서 흔들거렸다. 여러 번 내리막길에서 미끄러질 뻔했는데 간신히 등산 스틱으로 버텨 용케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어깨와 목은 뻐근하였고 종아리는 후들거렸으며 발목은 시큰거렸다. 걸은 지 삼십 분 정도가 되자 온몸은 땀으로 축축했고 이마를 타고 내린 땀방울로 눈은 따끔거렸다.
내 상태를 눈치채신 듯 박 선생님은 잠깐 물 한 잔 마시고 가자고 제안하셨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배낭을 내려놓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 순간 은은하고 맑은 향기가 내 곁을 스치고 갔다.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펴보니 어른 허리 정도의 높이로 작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동전만 한 연초록 잎들이 가득한 가운데 우윳빛 작은 꽃들이 점점이 박혀 피어나고 있었다. 얼굴을 가까이하니 물기 가득한 꽃잎들 사이로 달큰한 향기가 은은했다. 마치 햇살 가득한 바닷가 수풀 사이에 무더기로 핀 임동덩굴 꽃향기 같았다. 이 꽃이 말로만 듣던 백서향인지 선생님들께 묻자 어떻게 알아봤냐시며 맞장구를 쳐주셨다. '꿈속의 향기로운 사랑'이라는 꽃말을 지닌 백서향은 제주 남서쪽의 몇몇 곶자왈과 일본 규슈 지방에서만 자라는 상록활엽관목으로 2월 말과 3월 초에 개화한다. 이 식물을 설명하면서 박 선생님은 곶자왈 같은 자연환경에서만 자생하기 때문에 이식이나 인공재배는 어려워 환경부에서 멸종위기 야생생물로 지정해 보호하고자 애를 쓰고 있으나 곶자왈의 개발과 탐방객들의 무분별한 채취로 인해 개체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며 안타까워하셨다.
백서향 설명을 마친 뒤 선생님은 내 손을 잡고 우뚝 솟은 주변의 나무줄기들을 만지게 해주었다. 어른 두 명이 손을 잡고 안아도 다 안지 못할 만큼의 큰 나무들 기둥에는 촉촉하고 부드러운 초록 이끼들이 가득했다. 그 이끼들을 쓰다듬자 연약한 어린 짐승의 보드라운 털을 만지는 것 같았다. 선생님은 내 손을 조금 더 이끌어 둥근 나무줄기의 다른 쪽 면을 만지게 해주었다. 콩나물 대가리를 반으로 짜개어 놓은 것 같은 동그란 초록 작은 잎들이 나무줄기 한쪽 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마치 나무줄기 위에 작은 밀림이 펼쳐진 듯하였다. 선생님은 남쪽 지방의 숲속에서 자생하는 콩짜개라는 식물이라고 하시면서 특히 제주 곶자왈에서 많이 볼 수 있다고 하셨다. 주변을 둘러보자 우리는 구불구불하게 휘어진 아스팔트 같은 현무암 암반 위에 서 있고 초록 이끼와 콩짜개 식물을 온몸에 휘감은 나무들이 암반 주변에 가로수처럼 늘어서 있었다. 암반 양쪽에는 포탄이 터져 움푹 패인 것 같은 넓은 구덩이 모양의 저지대가 펼쳐져 있었다. 그 안쪽에는 폭발의 잔해 같은 검은 현무암 조각들이 연초록 이끼로 뒤덮여 풀밭 같았고, 그 사이에 이름 모를 넝쿨과 관목들이 안개꽃 다발과 같은 백서향들과 뒤엉켜 무성하였다. 박 선생님은 이곳이 곶자왈의 허파라고 할 수 있는 숨골이라고 하셨다.
숨골은 제주 지역 방언으로 공기나 물이 지하로 드나드는 구멍, 또는 지하 용암동굴과 연결된 통로를 뜻한다. 곶자왈처럼 용암이 흘러내린 자리에 식은 껍질 아래로 용암동굴이 생기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동굴 천장이 무너지거나 땅이 꺼져서 구멍이 생기면 그게 바로 숨골이 된다. 박 선생님은 지난밤처럼 비가 많이 내리면 빗물이 이 숨골을 통해 땅속으로 빠르게 스며들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바닷가에서 용천수로 솟아난다고 하셨다. 즉, 제주도에서는 곶자왈의 숨골이 지하수의 주요 유입 통로가 되어 집중호우에는 홍수를 막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또한 숨골은 지하에서 여름에 차가운 공기가 올라오고, 겨울에는 따뜻한 공기가 올라와 지상과 지하의 공기가 순환하는 곳이라고 하셨다. 이로 인해 곶자왈은 사계절 내내 일정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할 수 있다. 또한 숨골은 생태 피난처 역할을 감당하는데, 기후 변화에 민감한 생물들이 이 숨골 주변에서 서식하며 살아남는다. 백서향 같은 희귀 식물들이 숨골 근처에서 자생하는 것이 그 예이다. 이러한 숨골 덕분에 곶자왈에서는 아열대 식물과 온대 및 한대 식물들이 공존할 수 있게 되었다.
숨골 앞에 앉자 터지고 녹아내려 결국 무너져 버렸던 내 지난 시절이 떠올랐다. 실명과 이후의 실직. 닥쳐온 경제적 어려움과 방황. 이어지는 불안과 우울 속에 관계는 엉망이었고 삶은 끝없을 것 같이 표류했다. 문득 어떻게 그 상실의 계절들을 견뎌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연두색 이끼처럼, 또한 억세고 단단한 저 나무와 넝쿨들같이 내 상실들을 덮어주고 붙잡아 함께했던 수많은 인연들이 떠올랐다. 부둥켜 함께 웃고 울었던 가족들, 가슴을 열어내 필요에 귀 기울여 들어 주고 손 내밀어이끌어 주던 지인들, 고비마다 내 눈과 손이 되어 헤쳐 나가게 해준 봉사자와 지원인들... 내 삶의 숨골이 되어준 수많은 인연들을 뒤돌아보던 그때, 연두색 나뭇잎을 사르락거리며 물기 어린 백서향 향기가 나를 감쌌다. 숨 쉬는 지금, 어느새 맑게 갠 푸른 하늘이 내 눈에 비쳐 들었다. 그 순간 햇살을 타고 맑은 새소리 같은 무엇인가가 또르륵거리며 볼을 스치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