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 피폐한 로맨스
사람은 신이 아니다.
갑자기 왜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냐고?
만약 인간이 신처럼 당연히 일어나야 할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다면
이 세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나.
이미 무슨 일이 벌어질지 다 아는데.
그 일어날 일이 자신에게 유리하지 않은 일이라면
누가 그 일이 일어나도록 하겠는가.
하지만 웃긴 건.
그렇게 되어 일어나야 할 일이 부작위에 의해.
즉,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건 운명도 숙명도 아닌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거 아닌가.
예를 들어.
지금 이 상황에 대해 말해보면 이렇다.
만약 서성호와 지소영이 아주 오래전부터 몸을 섞고 있었고
나는 그걸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해보자.
그럼 난 서성호가 지소영을 소개해 주었다고 해서 그녀를 만났을까?
당연히 안 만났겠지.
내가 쓰레기통도 아니고 왜 남이 갖고 놀던 쓰레기를...
그런데 쓰레기라고...
하아... 내가 이런 더럽고 추잡한 생각을 하고 있다니...
사실 따지고 보면
쓰레기는 나에게 첫 순결을 바친 지소영이 아니라.
이 여자 저 여자 아무 여자나 만나 몸을 섞은 나지.
후우...
그래 그건 그거고.
만약 지소영이 아주 문란한 삶을 살던 내가.
바로 전까지 조현영을 만나 거의 매일 그 짓거리를 하던 나를 말이다.
서성호가 소개해 주었다고 만날 수 있을까?
당연히 아니겠지.
지소영이나 나나.
우리 둘은 다 신이 아니니까.
그래서 우린 2년 전 서성호의 소개로 그렇게 만났고.
바로 어제 우린 하나가 되었다.
하아...
그러고 보면 나와 하나가 된 여자는 지소영 하나가 아니다.
지소영은 내가 첫 남자 일 수도 있지만.
난 지소영에게 첫 남자가 아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여자를 만나 몸을 섞었다.
그 짓거리를 하지 않으면
단 한순간도 살 수 없을 것처럼 말이다.
그런 내가 지소영이 서성호와 몸을 섞었는지 안 섞었는지나 따지고 있는 건.
정말 한심한 짓거리지.
그러고 보면
지소영이 신이 아닌 것이 너무나 다행이다.
나의 더러움을 알지 못하니까.
결국 나와 미래를 꿈꾸고
결국 나에게 자신이 여자로서 남자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걸 가장 더럽고 쓰레기 같은
나에게 준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래 난 신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신이 되어서도 안된다.
만약에라도 지소영이...
아주 만약에라도 말이다.
서성호와...
아니 서성호가 아닌 다른 남자와 몸을 섞었다고 해도...
난 지소영을 조금도 비난할 수 없다.
아니 비난해서도 안되지.
조현영 말대로.
난 흙탕물에서 놀던 더러운 놈이다.
그 과거 때문에 난 절대 깨끗해질 수 없는 놈이지.
그런 내가 지소영의 아주 작은 흠결을 문제 삼는다는 건.
강도살인을 한 중범죄자가
아주 가벼운 절도를 한 범죄자를 비난한 것보다
더 말이 안 되는 것이긴 하지.
아닌가...
둘 다 범죄니까.
그냥 둘 다 나쁜 거니까...
아아 모르겠다.
모르겠다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김미숙에게 모든 것을 조종당하고 휘둘리던 지소영과
헤어지려 마음먹었던 나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지소영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생기다니...
하지만 이상하게 내 생각을 어떤 식으로 정리하고자 해도.
한 사람 때문에 그건 절대 불가능했다.
바로...
... 서성호...
그래 그 인간 때문에 난 지금 이렇게 머리가 터질 것처럼 복잡한 것이다.
호스트 바에서 일하며 수많은 여자들에게 더러운 짓거리를 하던 놈이다.
그런 서성호는 나에게 자신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
거기다 날 조현영 엄마에게 바칠 제물로 만들려던 그런 나쁜 놈이다.
더군다나 나에게 수많은 여자를 제공하던 놈이다.
난 그걸 넙죽넙죽 받아먹었고...
그러다 내 운명은 조현영과 사귀는 바람에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그리고 서성호를 통해 지소영을 만났고...
"이런 젠장... 젠장... 나도 깨끗하지 못한 주제에 왜 이리... 자꾸 남에게 비난의 화살을 쏘는 거야... 네가 그렇게 잘 났어? 최성근 말해봐. 네가 남을 비난할 정도로 그렇게 잘 난 거냐고? 소영이를 의심할 정도로 넌 깨끗한 놈이었냐고? 최성근... 어서 말해. 말해보라고!!!"
난 괴로웠다.
그래 너무 괴로웠다고...
나 스스로가 떳떳하지 못하니까.
자꾸 지소영이 서성호와 몸을 섞은 사이가 아니기만 바란다.
어젠 난 소영이와 하나가 되었다.
만약 그 전이나 그 이후에.
서성호나 서성호가 아닌 남자와 소영이가 몸을 섞은 것이 드러난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난 갑자기 내 더러운 과거가 떠 올랐다.
수많은 여자들과 셀 수 없이 몸을 섞던 내가...
무슨 자신감으로 소영이에게 나하고만 몸을 섞으라고 강요하는 건가...
"하하하. 이거 정말 미친놈이네... 최성근... 야! 최성근... 정신 차려!!!"
신호에 걸려 멈춘 사이.
난 핸들을 손바닥으로 탁탁 치며 소리 질렀다.
"그래. 나 혼자 이런다고 답이 나오는 게 아니야."
난 차 안에서 소영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오빠."
"나 지금 집으로 가고 있어."
"그래? 그럼 얼른 와."
지소영은 이 시간까지 잠을 잤는지 목소리가 많이 잠겨 있었다.
"지금까지 잔 거야?"
"응, 몸살이 난 것처럼, 온몸이 맞은 것처럼 아프고. 배랑 허벅지 등도 막 당겨."
"그래... 그럼 약이라도 좀 사갈까?"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오빠가 너무 날 막 다뤄서 그러지. 난 처음인데... 오빠가 날 너무 심하게..."
"미... 미안해..."
"됐으니까. 조심해서 운전해 와."
"그... 그래."
지소영과 통화를 마치고 나니.
참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 날 이렇게까지 걱정해 준 건.
작은 엄마 외에 처음이다.
하지만 작은 엄마는 아버지의 여자다.
아무리 작은 엄마가 날 걱정해 주고 잘해주어도.
그건 어디까지나 아버지와의 연결 선상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오로지 나만 걱정해 주는 사람.
그래 날 걱정해 주는 사람이 생긴 것이다.
2 년이나 지소영과 사귀었지만.
솔직히 소영이에게 큰 매력을 느끼거나.
성적 매력을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헤어지려고 했던 거고...
그래 그러고 보니
김미숙의 존재는 소영이와 헤어지려는 핑계나 구실에 불과했다.
하지만 어제를 기점으로
나와 소영이는 완전히 다른 인생이 펼쳐지게 되었다.
그런데 난 오늘도 조현영을 만나 몸을 섞었다.
조현영은 내 가슴에 난 상처를 보고 날 걱정해 주며
지소영이 내 가슴을 흥분해 물었던 곳에 밴드를 붙여 주었다.
그렇게 보니까.
조현영도 지소영만큼이나 날 아끼고 있는 거다.
하지만 내가 지소영에게 자꾸 마음이 기우는 것은
조현영과의 결정적 차이점이 있어서다.
지소영은 내가 첫 남자.
조현영은 내가 그녀를 거쳐갔던 많고 많은 남자 중 하나일 뿐.
그래 그래서 난.
1년 내내 만나기만 하면 몸을 섞던 조현영 대신
지소영과의 미래를 꿈꾸는 건지도 모르겠다.
더러운 걸로 따지면
솔직히 난 지소영 보다는 조현영이 더 어울리긴 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지소영이 살고 있는 원룸에 도착했다.
"응???"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지소영의 차인 비틀이 오늘 아침만 해도 없었는데.
... 지금은 있었다.
난 소영이 차 옆에 차를 주차하고 난 뒤.
비틀에 다가갔다.
그런데 그 안에 소영이가 아닌 다른 여자가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분명 몸살이 나 지금까지 자고 있는 거 같았는데.
그 짧은 시간에 공업사에 가서 차를 가져온 건가?
그런데 운전석에 앉은 여자는 누구지?
뭔가 안면이 매우 익숙한 것도 같은데...
그때였다.
운전석에 앉은 여자와 눈이 마주친 난 갑자기 몸이 멈춰버렸다.
"이제 왔네."
그녀는 김미숙이었다.
차에서 내린 그녀는
마치 내가 그녀와 아주 오래전부터
아주 친한 사이였던 것처럼.
아니 그것보다 몸을 섞었던 애인 사이인 것처럼 날 대했다.
"왜... 남의 차에... 타고 있어요?"
"흥. 이 차?"
그녀는 계속해서 내게 말을 놓고 있었다.
그녀의 반말은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매우 나빴는데.
이건 마치 조현영이나 지소영처럼
나와 몸을 섞은 여자만이 할 수 있는
아주 가까운 사이에서 하는 말투 같았기 때문이다.
"..."
"뭘 그렇게 놀라? 이 차 원래 내 건데."
"???"
"소영이가 하도 차를 빌려 달라고 해서 빌려 준 거야. 이 답답한 사람아."
"뭐... 뭐라고?"
어차피 그녀가 먼저 말을 놓았다.
거기다 난 그녀보다 나이도 많다.
이런 무례에 대해 내가 예의를 지킬 필요는 전혀 없었다.
"병신 새끼... 차에선 하지도 못하더니..."
"뭐... 뭐라고... 벼... 병신 새... 새끼?"
"그래. 병신이지."
참 어이가 없었다.
그녀가 내게 하는 말은
아주 친하고 친밀한 정도가 깊은 사이에서만 사용하는 말투를 썼기 때문이다.
"여긴 왜 온 거야?"
이왕 이렇게 된 거.
지소영을 뒤에서 조종하던 악녀 김미숙에게 반말을 했다.
"나에 대해 기억이 안 나나 본데... 내가 그 기억을 아주 선명하게 나게 해 주려는 거지."
"뭐? 선명한 기억? 그게 뭔데?"
"큭큭큭. 병신 새끼... 서울대까지 나왔다는 새끼가 그렇게 기억력이 없어선... 아무리 술을 많이 먹었어도 나랑 섹스를 수도 없이 한 사인데... 그걸 몰라."
"뭐... 뭐라고..."
난 어이가 없었다.
하도 어이가 없으니까. 말도 제대로 안 나왔다.
"미숙아...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데 그 모습을 언제 나왔는지 지소영이 바라보고 있었다.
엄청나게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지소영.
"무슨 소리긴... 이 남자는 원래 내 남자란 거지."
"어어..."
김미숙은 갑자기 미친 건지 날 두 팔로 강하게 안았다.
당황한 나...
황당한 지소영...
그리고 날 안고는 승리자처럼 웃고 있는 김미숙...
우린 원룸 주차장에서 그렇게 모두 멈춰버렸다.
48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