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팀장 23, 망각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축복일지도?
저의 팀 인원은 26명이라 본사 조직 중에서도 제법 큰 조직 중 하나입니다.
그러다 보니 조직관리 측면에서 팀장은 상당한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전 인원과 사업계획이나 목표관리를 위한 면담을 할 경우, 인당 1시간 미만을 할애한다고 해도 최소 4일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 정도이니까요.
안타까운 소식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팀 인원이 26명이다 보니 자질구레한 걱정이나 문제가 발생되기 마련입니다.
어느 날 한 직원이 면담을 요청해 왔습니다.
내용인즉슨 아내가 유방암 판정을 받아 곧 항암치료 후 수술을 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제 아내도 유방에 몽우리가 만져져 혹시 암인가 하여 CT도 찍고, 맘모톰 시술도 받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조직검사 결과 악성종양이 아니라 양성으로 판정을 받아서 가족들이 한 시름 놓았던 기억이 있어서인지, 직원 아내의 유방암 판정이 남의 일이 아닌 것 같더라고요.
직원의 아내는 1년 정도의 항암치료 후 암 조직이 줄어들어 수술도 했고, 재발을 막기 위해 추가 항암치료도 잘 진행이 되었다고 합니다. 저도 팀장에서 실장으로 진급하는 동안 아무런 문제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추가적인 병변 소견이 없어, 5년째 되던 해에 유방재건술을 위해 정밀 검진을 했는데,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진단결과 유방에서 시작한 암이 폐와 간, 뼈까지 전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난 5년 동안 추적 관찰하면서 아무런 이상도 발견 못하다가, 갑자기 암이 전이되어 4기라고 합니다. 당사자뿐 아니라 직원도 황당할 뿐 아니라 심한 정신적 충격도 받은 모양이었습니다. 이렇게 전이된 암은 수술이 어려워 방사선 및 항암치료, 그리고 의료보험도 안 되는 신약을 사용하는 등 투병생활이 이어졌습니다. 직원은 아내의 병간호를 위해 업무 중 자주 자리를 비워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같은 업무를 하는 동료들의 지원 덕분에 큰 무리 없이 치료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나아지기는커녕 전이가 더 심해지더니, 예상 생존기간이 3개월이라는 최후 진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한테 면담을 하자고 한 것입니다.
남은 기간 아내와 같이 있고자 퇴사하겠습니다
직원이 저를 찾아와 아내의 남은 기간을 같이 하기 위해 퇴사를 하겠다고 말하는데, 뭐라 할 말이 없었습니다. 아내의 문제뿐 아니라 아이들도 돌봐야 하는 상황임을 들으니 충분히 이해는 갑니다.
마음이 심란하고 무겁기가 그지없었지만, 생각나는 대로 솔직히 말했습니다.
"꼭 퇴사를 해야 하나?"
"아내의 남은 생 동안 같이 있어주고 싶은 생각은 충분히 이해한다. 정말 미안한 얘기지만 아내가 떠나간다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인데, 그럼 그 이후에는 아이들과 함께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생각은 안 해봤나?"
"아내가 떠난 후 상실감과 우울감이 밀려올 텐데, 집에서 하루 종일 그 생각으로 지내는 것보다 차라리 회사에 있으면 있는 동안은 그런 감정은 줄어들지 않겠냐? 그러니 다시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이 직원은 본인으로 인해 지금까지 동료들이 많이 고생했는데, 앞으로 더 빠져야 하는 상황에 대한 미안함이 정말 컸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동료들에 대한 미안함이 합쳐져, 퇴사라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보입니다.
도와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
일단은 무조건 퇴사할 생각만 하지 말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고 한 후, 바로 사업부장을 찾아가서 일련의 상황을 설명하였습니다. 당시 사업부장은 외국인 임원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봐도 참 정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한국인만 정이 많은 것은 아니더군요). 직원의 상황을 듣고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지원이 무엇인지 물어보더군요. 제가 갖고 있던 생각은 이 직원을 아내의 남은 생의 기간 동안 100% 재택으로 전환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코로나 팬데믹이 끝났을 때라 회사의 방침 상 더 이상의 재택은 시행되지 않는 상황이었으니, 100% 재택을 결정하기는 큰 부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외국인 임원은 본인이 책임을 질 테니 100% 재택을 승인하더군요. 문제가 생기면 사업부장이 책임을 지겠지만, 저 역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당시로서는 이 방법이 최선이라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정(情)은 가장 한국적인 정서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인들의 인간관계와 마음의 질을 이해하기 위해 꼭 알고 넘어가야 할 개념이지만, 딱히 외국인에게 설명하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국민과자인 초○파이의 광고카피를 보면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인 것처럼 말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 수가 있는지, 참 '정'이란 것은 매우 주관적이라 생각됩니다. 상대의 의견이나 상태보다는 본인이 해주고 싶은 마음이 더 앞서는 것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할아버지는 손자가 오면 깊숙하게 간직했던 초코○이를 넌지시 건네주나 봅니다.
사업부장과 협의한 데로 이 직원을 100% 재택으로 전환을 시켰습니다. 이후 3개월이 지나 4개월이 되는 시점에 안타깝지만 직원의 아내는 멀리 떠나갔습니다.
그러고 보니 4년이 지났네요. 지금도 그 직원 앞에서는 '죽음', '암', '아내'와 같은 단어를 잘 꺼내지 않고 있습니다. 직원이 싫다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런 단어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미안한 감정이 생기더군요.
우연한 기회에 저녁식사 자리가 마련되었는데, 어찌하다 보니 아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순간 살짝 당황을 했는데 그 직원은 오히려 담담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아직도 가슴은 아프지만 그때보다는 한결 아픔이 덜 하다고요. 그러면서 요 근래 혼자서 일본과 대만 여행을 다녀왔다면서, 여행 관련 에피소드를 재미있게 이야기합니다.
인생의 대부분을 함께 살아온 배우자가 더 이상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정신적 충격은 굉장합니다. 심리학자들은 배우자의 사망이 살면서 겪게 될 가장 큰 공포이자 상처라고 언급합니다.
미국 정신의학자인 토마스 홈즈 박사가 개발한 스트레스 측정 척도에 따르면...
배우자의 사망은 '100점', 이혼 '73점', 별거 '65점', 가족이나 친지의 죽음은 '63점', 정년퇴직은 '45점'으로 단연코 배우자의 사망이 최고의 스트레스입니다.
곧 정년퇴직인데 이 스트레스는 아내의 사망에 비하면 반도 안되네요 ^^.
'시간이 약이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배우자의 사망, 가족이나 친지의 죽음, 정년퇴직 등 살면서 경험하는 모든 심리적인 아픔은 시간이 지나면서 괴로웠던 일과 아픔이 무뎌지고 서서히 잊힌다는 의미입니다. 즉, 시간이 우리의 상처와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약'이니, 시간이 지나면 우리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치유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망각'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축복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예전 일을 생각하면서 글을 시작했는데, 끝으로 오니 마음 한편이 짠해지는 느낌이네요.
전임 실장님이 술 마시면 저에게 늘 하시던 말이 생각나네요.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
누구한테 하는 말일까요? 저에게 하는 말인지, 본인에게 하는 말인지~
오늘도 펭귄의 짧디 짧은 다리로 달리고 달리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