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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모든 일은 성공이던 실패던 끝나기 마련입니다.

제가 2000년 초에 새로운 조직으로 발령을 받으면서, 나름의 모토(Motto)로 생각한 것이 바로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였습니다. 직장 생활 10년 차인데 새로 맡은 일은 생각도 못 해본, 나름 첨단기술 쪽 업무라 어려움이 많았던 때입니다.

[위성+인터넷 교육]

뭐 대충 위성+인터넷을 활용하는 교육 관련 업무였는데, 당시에는 위성은 대부분 군사용으로 사용되었고, 민간에서는 방송용 정도로만 활용되었기 때문에 굉장히 낯선 일이었지요. 우선 일일 회의를 할 때마다 내용의 대부분이 이해할 수 없는 용어(Ku&Ka band/LNB/Set-Top Box/변조와 복조 등)들이라 이 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매일 회의 후 늦은 시간까지 남아서 인터넷 검색을 통해, 하나둘씩 내용을 익혀나가는 것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매일 늦은 퇴근을 하면서 생각한 것이 '이런 어려움도 언젠가는 지나갈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다 생각난 것이 바로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것입니다.

어디서 보니 미국 심장 전문 의사 로보트 엘리엇의 저서 <스트레스에서 건강으로 - 마음의 짐을 덜고 건강한 삶을 사는 법>에 나온 명언이라고 하네요. "you might as well enjoy the pain that you cannot avoid. or Enjoy it if it's unavoidable", 어찌 보면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를 그대로 영문화시킨 것이라 확 와닿기는 합니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삶의 고통을 줄이고, 적극적으로 살라는 인생 처방전인데요. 살면서 어찌할 수 없는 일을 만나면 피하지 말고 내 인생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어려운 일들이 생기면 발전을 위한 시련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지요. 딱 저의 현재 상황에 들어맞는 말이라 바로 저의 모토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한글로는 동일하지만 영문으로 다른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When life gives you lemons, make lemonade)'를 더 좋아합니다. 우리 말로는 뭔가 결연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비해, 영어로는 재미있게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외국에서는 레몬(Lemon)에 대해 '실망스럽거나 원하지 않은 결과'를 의미하더라고요. 미국에 레몬법(Lemon Laws)도 '자동차 교환 및 환불 제도'를 말하는데 '달콤한 오렌지인 줄 알고 샀는데, 시디신 레몬이었다'라는 비유로, 비싼 자동차에 문제가 생겼을 때를 차를 레몬에 비꼬아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낯설고 어렵다고 느껴졌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름 내용을 이해하니, 다소 부담이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업체와의 회의에서 제가 아는 내용과 다르면 질문도 하고 토의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용어나 업무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되었음을 느꼈지요. 하지만 일의 진척은 생각보다 지지부진하여 동일한 보고서를 거의 3개월째 수정 또 수정만 하고 있습니다. 매번 느끼지만 똑똑하지만 결단력이 없는 상사와 일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계속 보고서를 수정만 할 뿐 보고할 때를 계속 놓치고 있었습니다.

[돌다리가 맞나? 확인하기]

그래서 이 분의 별명이 '돌다리'입니다. 다른 의미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돌다리'라고 말해도, 이 분은 그게 맞는지 국과수에서 분석한 결과가 꼭 필요한 분이라는 뜻입니다. 매번 돌다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돌다리를 부순 후 검사를 받다 보니, 어느덧 돌다리가 모두 없어져 더 이상은 건널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상황으로 보시면 됩니다.

이러다가는 프로젝트를 적기에 완성시키지 못할 수 있다는 걱정, 그리고 답답한 상사에 대한 짜증이 커졌습니다. 하지만 수정하고 또 수정하고, 관련팀에 설명하고 또 설명하고, 회의를 통해 지원을 부탁하고 하는 시간이 싫지 만은 않았습니다. 이제는 눈 감고도 보고서를 수정할 수 있고, 누군가 손가락으로 배를 푹 찌르면 입에서 보고서 내용이 술술 나올 정도로 업무가 내재화되었네요.



과거 업무를 돌이켜 생각해 보면 업무를 주도할 때가 신이 나고 재미있었던 것 같습니다. 남이 하는 일의 들러리로 있는 것은 일하는 재미도 반감하고, 업무에 대한 열정이나 관심도 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업무를 주관하면 머리도 복잡하고, 일도 많아지기 때문에 꺼려지는 게 사실입니다. 특히 연관된 관련 부문이 많을수록 업무 조율의 대상 및 범위가 커져, 한 자리에 모이기도 의견을 조율하기도 어려워집니다.

제가 맡았던 프로젝트도 전사를 대상으로 한 프로젝트이다 보니 기획, 인사, 총무, 재경, 관제, IT, 교육 등 거의 모든 부문으로부터 협조가 절실하였던 상황이었습니다.

[그 일은 반댈세~]

그러나 어느 한 곳 쉽게 도와주겠다는 팀은 없었고, 지원이 어렵거나 불가능하다는 팀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최고 경영층의 지시가 아니었다면, 저 역시도 이 프로젝트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을 겁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최고 경영층의 지시를 뒤에 업고 무지하게 열심히 부탁하고 싸우고 했었네요. 심지어는 관련팀장 면전에서 심한 말을 해서 선배로부터 호되게 혼나기도 했습니다. 그리나 술 한잔 하는 자리에서는 "속 시원하게 잘했다"라고 하더군요.



역시 모든 일은 시간이 지나면, 성공이던 실패던 간에 종료는 됩니다. 위성과 인터넷 시스템, 방송국, 제반 시설의 설치가 완료되고, 시험 테스트를 거쳐 방송 오픈만 남은 상황입니다. 그동안 많은 시련도 있었지만 즐기면서 마무리가 된 프로젝트라고 생각합니다.

몇 년 뒤 초고속통신망(ADSL)이 깔리기 시작하면서, 구축했던 위성인터넷 시스템은 약 4년 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정말 열심히 노력해서 구축한 것이지만 시대의 변화에 따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를 통해 얻은 것은, 마치 주문처럼 외웠던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문구였습니다.

힘들고 어려워서 포기하고 싶을 때 마음속으로 생각해 봅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그러다 보면 어느덧 일은 마무리가 될 것입니다.


오늘도 펭귄의 짧디 짧은 다리로 달리고 달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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