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조용한 퇴사'는 누가 만들었나?

조직 분위기 망치기 프로젝트 

요즘에 '조용한 퇴사(quiet quitting)'라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듣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과거에도 이러한 유형의 근무태만, 태업 또는 나태 등은 있었습니다. 다만 예전에는 개인의 역량 부족, 개인의 조직 부적응, 특이한 개인의 성향 등으로 치부하여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직원들이 열심히 일을 하였기 때문에 크게 조직에 영향을 미치지도 않았고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조용한 퇴사' 또는 '진급하기 싫어요'를 회사가 조장한 면도 있습니다. 

지금은 '명예퇴직, 희망퇴직, 조기퇴직'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방법도 바뀌기도 했습니다만, 제가 팀장으로 있었던 2010년 대에는 '저성과자 해고'라는 방법을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물론 진짜 역량이 안 되는 저성과자도 있었지만, 정년퇴직하기 3~7년 정도 남은 차장이나 부장을 대상으로 악용된 면도 있습니다.

저성과자를 회사에서 내보내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보통 회사에서 '권고사직'을 유도하는 것인데, 이 경우 본인이 싫다고 하면 일이 복잡해집니다. 정 안되면 '해고'라는 최후의 수단을 쓸 수 있지만 대부분 소송으로 가기 때문에, '해고' 또한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고 해고를 위해서는 '이 사람은 어떤 사유로 직무수행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회사가 입증을 해야 하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공정하고 객관적인 자료가 필요했습니다. 당시에 선배사원 중 몇 분은  '저성과자'에 포함되시면 "기분이 나빠서, 회사가 싫어져서, 부하직원 보기가 창피해서"와 같은 이유로 스스로 조용히 나가셨습니다. 하지만 부당하다고 느낀 신 분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회사와 싸워나가시기도 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한 7년 정도 이런 일이 반복되었던 것 같네요.



재가 모셨던 상사분도 '저성과자'로 분류되면서 제가 난감한 입장이 되었습니다. 이 분은 성격이 좀 거시기(남과 잘 못 어울리고, 까칠하고, 부하직원을 괴롭히는 경향)해서 그렇지 맡은 업무는 잘 처리하고 있어, 팀장 입장에서는 도움이 되는 몇 안 되는 직원이었습니다.

인사팀에서 불러 본사로 올라가 보니 저 말고도 6명의 팀장들이 있더군요. 인사팀에서는 '저성과자'에 대해 선정사유/관리방안/향후 진행사항 등을 설명하여 주더라고요. 듣고 있는 내내 찐 고구마 대여섯 개를 물 없이 먹은 것 같았습니다. 

팀장이 할 일은 저성과자로 선정된 직원의 업무 행태를 일일 보고하는 것입니다. 아예 전용사이트도 만들어 들어가 보면, 매일 근무행태 중 하나를 선택한 후 부가적인 사항을 입력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날은 깜빡 잊고 퇴근하고 있었는데, 전화가 와서 오늘 중 반드시 입력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보안(?)을 위해 사내망 전용으로 만들어져 있어 외부에서는 접속이 안된다고 하네요. 다시 회사로 복귀해서 입력을 하고서야 퇴근할 수 있었습니다.



매일 팀장은 저성과자의 근무에 대해 평가를 해야 합니다. 선택할 보기 중 좋은 내용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출근을 늦게 함", "맡은 바 업무를 제대로 못함", "직원들과 어울리지 못함", "불만을 조성한다", "동료 또는 부하직원을 괴롭힌다", "근무시간 중 자주 자리를 떠난다" 등등입니다. 

아! '기타'라는 항목이 있기는 한데 이걸 많이 쓰면 또 안된다고 하네요. 사실 '기타'를 선택하고 "맡은 바 업무를 잘 수행하고 있음"이라고 여러 번 입력하니까, 인사에서 "그렇게 입력하면 안 된다"라고 하더라고요. 사실을 사실대로 작성해도 안된다고 하니 정당한 방법은 아니네요.


저성과자로 선정된 분이 눈에 띄는 이상한 행동을 하거나 굳이 문제를 일으킬 필요가 있을까요? 

누군가 자기를 항상 지켜보며 '직무수행능력'이 부족하다는 자료를 수집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이걸로 부족한지 반년에 한 번씩은 회사가 근로자에게 개선의 기회를 제공해 준다는 명목으로, 2주에 걸쳐 '역량 향상 교육'이라는 것을 보냅니다. 물론 객관성 확보를 위해 외부의 전문교육업체를 활용하지요. 교육시간은 업무시간과 같지만, 많은 과제를 내서 늦은 시간까지 괴롭히는 방식을 사용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 교육 후에는 과제물 수행과 평가 결과를 가지고, '개선의 여지가 없다'는 정당한 해고 근거를 확보하고요. 

그리고 월에 한 번씩은 인사팀에서 찾아와 면담을 합니다. 일종의 당근을 제시하면서 퇴사를 권합니다. 

"회사에서 일정 금액의 위로금을 지급하겠다", "자녀 학자금은 대학 졸업까지 지급해 주겠다", "'권고사직'으로 처리하면 실업급여도 받을 수 있다", "명예사원증은 제공하겠다" 등등인데 옆에서 듣고 있는 저도, 저런 조건을 수락할까 싶을 정도의 조건만 제시하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회사의 이런 '저성과자' 관리 또는 처리 방법이, 차츰차츰 직원들 사이에 퍼져 나갑니다. 소문이 안 날 거라고 인사팀도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직원들이 '저성과자' 관리를 보면서 남의 일로 느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진짜 '저성과자'가 아니어도 진급하여 관리자가 되고, 나이가 들면 저기에 포함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갖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러니 사원, 대리 중 일부는 아예 관리자인 과장으로 진급을 포기 또는 거부하는 현상이 생겼습니다. 좋은 말로 진급을 유도하여도 돌아오는 말은, 언제 저렇게 될지 몰라서 진급을 안 하겠다는 것입니다. 직접 '저성과자' 프로그램에 조금이나마 발을 담그고 있는 팀장으로서 "넌 걱정 안 해도 된다"라는 말을 못 하겠더라고요. 저 역시 팀장에서 내려오고 나이가 들면, 저런 꼴을 당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서질 않았으니까요.



지금 생각해 보니 '조용한 퇴사' 또는 '진급하기 싫어요'는 근래에 두드러지고 있는 것뿐이지, 과거부터 쭉 있어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쭉 이어질 미래 진행형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설령 우수한 인재를 뽑아도 이러한 '조기퇴직 또는 조기명퇴'와 같은 분위기를 계속하여 경험한다면, 열정은 차츰 식고 불안감은 커져 어느덧 '조용한 퇴사'의 대열에 섞이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오늘도 회사는 이른바 '저성과자', '일 못하는 직원(일못러)', '나이 든 직원'을 내보내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강구하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성과를 내야 하는 회사 입장에서 '저성과자'는 고민거리이고, 골칫거리 일 것입니다. 

하지만 인원을 줄이기 위해 공정하지 않은 잣대를 사용하는 것은 문제를 확대 재생산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과연 인사는 공정한 잣대가 있기는 한가요? 무척 궁금합니다.  


오늘도 펭귄의 짧디 짧은 다리로 달리고 달리고 ~

작가의 이전글 이상한 나라의 팀장 6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