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색을 안 하면서 생기는 여유와 즐거움!
아버지의 흰머리
아버지는 몸이 많이 편찮으셔서 거동하시기 어려울 때까지 염색을 하셨습니다.
625 때 혈혈단신(孑孑單身) 월남하신 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시다 보니, 75세를 훌쩍 넘기신 나이에도 직장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계속 염색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두피에 좋다는 염색약을 마다하시고 오로지 양*비 염색약만 고집하셨습니다.
요즘은 마치 샴푸 하는 것과 같이 슥슥 발라주면 편하게 염색할 수 있는 염색약도 있고, 천연헤나 제품과 같이 부작용이 적은 제품이 있는데 말입니다.
항상 어깨에 염색약으로 얼룩덜룩해진 보자기를 걸치시고, 거울 앞에서 칫솔에 염색약을 묻혀 혼자서 염색을 하셨습니다.
간혹 작은 거울로 보이지 않는 뒷머리 쪽이 어려울 때만 우리들에게 칠해달라고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어렸을 때는 그냥 흰머리가 있어서 염색을 하시는구나 하는 생각만 했지 다른 생각은 못했네요.
나의 흰머리
흰머리는 유전적 요인이 있어서인지 저도 10대 중반부터 흰머리가 간혹 보이기는 했습니다.
결혼 후 30대 중반까지는 아이들에게 흰 머리카락 1개당 10원씩 용돈을 주면서 뽑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수북이 뽑힌 흰머리카락을 보니 계속 이렇게 하다가는 남아나는 머리카락이 없을 것 같아서...
저도 30대 후반부터 염색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달에 한 번씩 이발을 하면 바로 집에 와서 염색을 하여야 했습니다.
염색을 안 하면 나이 들어 보이기도 했지만, 남의 시선에서 흰머리가 보이는 것이 불편해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발 후 집으로 오는 내내 남들에게 보이는 흰머리가 신경이 쓰였고, 조바심을 내면서 집에 왔던 기억이 납니다.
딸아이의 결혼식 이후 문득 염색을 계속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염색할 때마다 두피도 따갑고 머리도 여러 번 헹궈야 하고, 수건도 항상 검게 물드는 등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이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남에게 보이는 머리색의 '다름'에 대한 부담이 더 컸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내일 모래 60세인데, 이제는 염색으로 나를 숨길 필요가 있을까?
염색을 중단하며
그래서 딸아이 결혼식 후 염색을 중단하였습니다.
처음 한 달은 검은색이 바래고, 머리털 뿌리부터 흰색이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다시 깔끔하게 머리를 다듬었습니다.
두 달째가 되니 염색한 부분의 색이 빠져 갈색으로 변했고, 머리를 들추면 염색이 안된 흰머리카락이 반 정도 올라왔네요.
다시 깔끔하게 머리를 다듬었습니다.
세 달째가 되어도 염색한 부분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색이 바랜 부분으로 인해 얼룩덜룩하게 보이는 게 영 지저분한 상태입니다.
다시 깔끔하게 머리를 다듬었습니다.
모두 6개월이 지난 후에야 본래의 제 머리카락의 색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제 바람과 달리 완벽하게 멋진 백발이 아니라 흰색과 검은색이 8:2 정도로 섞인 형국입니다.
저는 아직도 회사생활 중입니다.
정년이 1년 정도 남아있습니다.
처음에는 동료들이 왜 염색을 안 하냐고 물어보기도 하고, 염색을 하는 게 더 보기가 좋다고 하기도 하고...
제가 보기에도 염색을 하는 것이 깔끔하기도 하고, 젊어 보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다시 염색을 할까 하는 생각도 여러 번 하였습니다.
하지만 꾹 참고 견디고 있고, 앞으로도 염색할 생각은 없습니다.
아들 녀석의 결혼식에도 이 머리로 가고자 합니다.
참 희한한 게 과거에는 흰머리가 보이는 게 부담스러웠는데, 지금은 염색 안 한 머리로 잘 돌아다니고 있으니 말입니다. 모든 게 마음먹기 나름인가 봅니다.
흰머리를 통해서 본 나는?
남의 시선이 아닌 저 자신의 시선으로 거울의 저를 바라봅니다.
전과 달리 흰머리에 검은 머리가 듬성듬성 섞인 회색머리의 중년인 제가 있습니다.
숨기고 싶지 않습니다. 제 흰머리를...
숨기고 싶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같은 흰머리를...
숨기고 싶지 않습니다. 제 나이를...
보이고 싶습니다. 제 자신을...
보이고 싶습니다. 나이 먹음의 멋있음을...
보이고 싶습니다. 시간 흐름의 자연스러움을...
오늘도 펭귄의 짧디 짧은 다리로 달리고 달리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