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팀장 17, 서툰 영어로 의사소통했던 좌충우돌 프로젝트
지금도 영어를 썩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영어 회화학원도 수년간 다녔고, 외국인 임원과도 2년 이상 근무하다 보니, 나름 영어로 미팅이 가능한 수준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11년 전에는 생존영어 수준을 조금 넘어설 정도였지, 해외업체랑 업무를 같이 협의하고 수행할 정도의 실력은 아니었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
처음 팀장이 되었을 때 기존 업무를 개선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습니다.
제가 이 팀에서 7년 정도 일을 하면서 느낀 점 중 하나는 개선 속도가 너무 느리고, 현실에 안주하는 경향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 팀 초기 설립 인원들이다 보니, 하던 일에 워낙 익숙해서 불편함을 느끼거나 개선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빠르게 변화하면서 회사는 글로벌기업을 향해 가고 있는데 비해, 너무 우물 안 개구리와 같다고 할까요.
우리가 만족하면 남도 만족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으로, 하루하루를 동일한 방식으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팀 역량 향상에 대한 아이템을 직원들과의 면담을 통해 찾고자 했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과 같이 별 다른 개선방안을 생각하는 팀원은 거의 없었습니다.
깨달음의 시작
경쟁사 비교 분석 및 업무 관련 박람회 등을 참석하면서, 느낀 것은 바로 팀 업무의 데이터베이스화 및 체계화였습니다. 지금까지 주로 수작업 방식으로 일을 하다 보니, 반복되면서도 불필요한 업무가 많았습니다. 흔히 복사&붙이기와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지요. 저렇게 반복되는 작업을 시스템화한다면 현재 업무 중 상당 부분을 줄일 수 있고, 절약한 시간을 업무 개선을 위해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것이지요.
하루는 코엑스에서 진행되는 콘텐츠 관련 콘퍼런스에 몇몇 직원들과 함께 참석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때 문서 제작의 효율성을 높인 '문서 작성 글로벌 표준 DITA(Darwin Information Typing Architecture)'라는 것을 처음 접했습니다. 그런데 왜 다윈(Darwin, 종의 기원을 통해 진화론 주창)이란 이름이 들어갔는지 궁금해서 찾아보니, 아마 DITA가 진화론의 원리인 전문화와 상속의 개념을 활용하여 문서의 유형을 정의하고 확장해서 그런 것 같기는 합니다.
여하튼 비록 이름은 생소했지만, 우리에게 딱 적합한 업무 시스템으로 판단이 되었습니다.
해당 업무를 수행하는 직원들도 이런 시스템이 도입된다면, 큰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갖더군요.
이제 도입의 필요성과 당위성은 알겠는데, 누구랑 일을 해야 하는지가 관건이었습니다.
새로운 도전의 첫걸음
처음에는 당연히 한국업체 하고 같이 일을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한국에 도입된 지 얼마 안 된 방식이라 그런지 업체도 많지 않았고, 미팅을 해봐도 마음에 드는 업체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유럽법인을 통해 DITA 관련업체를 소개받게 되었습니다.
소개받은 곳은 우리가 흔히 베네룩스 3국이라고 말하는 국가 중 하나인 벨기에(Kingdom of Belgium) 업체입니다.
처음 메일로 연락할 때만 해도 확실하게 일을 시작하는 게 아니라서 그냥 관련된 정보만 요청했는데, 바로 한국으로 와서 설명을 하고 싶다고 하네요.
어! 갑자기 훅 들어오니까 순간 당황은 되었지만, '오겠다는 사람은 절대 안 막는 게 제 모토(Moto)'라서 "기회가 되면 와라"하고 회신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지나서 조만간 한국에 와서 만나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외업체와 첫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처음 만난 벨기에 업체의 사장은 생각보다 크고 잘 생겼더군요.
나중에 알고 보니 벨기에 남성 평균 신장이 181㎝ 정도라고 하는데, 이 양반은 190㎝ 이상이더군요. 제가 173㎝이니 같이 있으면 아버지와 어린 아들 정도의 차이라고 느껴집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앉은키는 저랑 비슷해서 가능하면 앉아서 이야기를 했지요.
미팅만 1년 이상
이렇게 시작된 DITA 시스템 도입에 대한 미팅은, 계약이 완료될 때까지 1년 이상이 걸렸습니다.
업체는 자신만의 시스템이 있고, 해당 업무에 대한 충분한 경험과 전문인력이 이미 확보되었으니 걱정하지 말고 같이 일해보자고 합니다. 하지만 한 번도 접하지 못했던 시스템을 바로 받아들이기는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1년여간 무려 20차례 이상의 미팅을 가졌습니다(전화통화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시간이 충분하면 하루 종일 미팅을 했었고, 시간이 부족하면 늦은 밤 식사를 하면서도 미팅을 했습니다. 미팅은 업체 사장과 단독으로 하거나, 전문가를 대동하거나 하는 식으로 점점 깊이를 더 해갔습니다.
모르는 내용은 다시 묻고 그래도 이해가 안 되면 화이트보드에 그림과 글씨를 쓰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먼저 그려진 그림 위에 다른 색 마커펜으로 첨삭을 하고, 틀린 내용이면 지우고 다시 그리고 하는 일을 지겹도록 반복했습니다. 그러면서 DITA라는 생소한 시스템을 알아갔고, 우리가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를 배워갔습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정말 '맨땅에 헤딩'하듯이 미팅을 한 것 같습니다.
미팅이 회를 거듭될수록 DITA에 대한 이해는 높아졌고, 심적 부담감은 적어지면서 기대감은 상승했습니다. 희한한 것은 이렇게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면서 계속 시간이 흘러가는데도, 상대 쪽에서는 계약을 빨리 하자고 독촉을 안 하더군요. 그냥 이해를 시키기 위해 설명하고 추가 질문이나 요청 사항이 있으면, 다시 답변을 가지고 와서 설명하는 식으로 대응하며 우리의 결정을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한국 업체였으면 서로 말도 통하고 정서도 통하니, 좀 빠르게 진행하면 안 되겠냐고 했을 것 같습니다.
드디어 계약, 그리고 시작
1년 넘게 토론과 협의를 거치고, 파일럿 테스트도 해보고, 실무자 한 명을 벨기에 현지로 보내서 실사까지 한 후에야 계약이 체결되었습니다. 5년 계약 및 옵션으로 추가 2년 연장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기념사진도 찍으니 실감이 나더군요.
이제부터 새롭고 낯선 업무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토록 많은 협의와 테스트까지 진행했었지만, 역시 새로운 시스템에 적응하기까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워드프로세서와 달리 사용하기 어려운 것도 문제였지만, 낯선 시스템을 사용하기 꺼려하는 분위기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동화로 인한 편리함을 이해하면서 분위기도 점차 반전이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계약 후에도 업체와의 미팅은 매 분기마다 정례적으로 진행이 되었고, 문제가 있거나 협의할 사항이 생기면 추가 대면미팅 또는 전화미팅 등을 통해 지속적인 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새롭게 도입한 시스템은 지금 생각해 보면 '절반의 성공'이었습니다.
왜 절반의 성공인가?
우리말로 해도 어려운 새로운 업무를 영어로 소통하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시차가 있어 급한 일이 발생하면 신속하게 대응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새로운 시스템에 대한 내부의 거부감을 없애는 것도 순탄하지 않습니다.
업체가 다 된다고 하면 60~70% 정도만 된다고 믿어야 하더라고요.
일을 시작하다 보면 계속 수정하거나 추가할 일이 생기는데, 업체는 그때마다 추가 비용을 요구합니다.
생각해 보면 꼭 해외업체라서 문제가 있는 것은 '소통이나 시차의 문제'이지, 나머지는 국내업체도 똑같더라고요. 특히 다 된다는 말을 그대로 신뢰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운 시스템 등장
벨기에 업체와 일을 한 후, 어느덧 7년이 넘어 계약을 갱신할 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업체들이 속속 나타났고, 훨씬 향상된 시스템으로 제안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실장이 된 후 팀장의 의견을 들어보니 "벨기에 업체의 시스템은 여러 문제가 있지만, 쉽게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니 새로운 시스템으로 변경하자"는 것입니다.
실무자의 의견을 종합한 후 팀장이 확신하고 요청한다면,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실장은 수용하는 것이 맞습니다. 제가 봐도 새로운 업체의 새로운 시스템이 보다 효율적이고 안정적으로 보이기는 했습니다.
결국 벨기에 업체에서 국내 업체의 시스템으로 변경이 이루어졌습니다.
다행히도 벨기에 업체도 바로 수긍하고, 자신들이 지금까지 쌓았던 데이터를 전달해 주었습니다.
애초 계약조건이 그렇기는 했지만, 아주 쿨(Cool)하게 지원해 주니 한결 마음이 편했습니다.
제가 비록 실장에서 내려오기는 했지만, 아직도 벨기에 업체 하고는 다른 건으로 협업은 계속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회의차 한국에 들어오면 만나서 차 한잔하거나, 저녁을 먹으면서 예전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참 별로인 영어실력으로 많은 미팅을 했었고, 하루 종일 다리 아프게 서서 화이트보드에 '괴발개발(고양이 발과 개의 발)' 쓰면서 이해를 높였고, 늦은 시간에 한국에 도착하면 새벽까지 술을 마시면서 의견을 좁혔습니다.
해외업체와 수년간 일을 하면서 느낀 점은, 한국업체와 마찬가지로 믿음과 신뢰가 쌓이면 언어소통의 문제는 그리 큰 걸림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렵다는 선입견을 갖지 않고, 업무만 생각한다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오늘도 펭귄의 짧디 짧은 다리로 달리고 달리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