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데 가보긴 처음이다. 경험 삼아, '박람회'라는 하나의 인생의 재미요소가 될지 모르는 것의 뚜껑을 열어보러 갔다. 물론 다른 박람회가 아니라 카페&베이커리 박람회여서 간 것이 크다. 그리고 국제도서전에 못 간 것이 아쉬웠던 차에 인스타그램에서 박람회 사전등록 마지막날 광고게시물을 우연히 보고 바로 사전등록을 했다. 좋은 게 정말 많은데 정보에 접근을 하냐 못하냐의 차이가 너무 큰 거 같다는 걸 또 한 번 느꼈다.
(지난 학기 올 A+를 맞고도 장학금 신청을 따로 해야 하는지를 몰라서 장학금을 못 받고, 성적이 4.3 정도 되면 지금 있는 기숙사가 아닌 다른 기숙사에 1인실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도 몰라서 못했다.더 적극적으로 구하고 찾았으면 알 수 있었을 거다. 이것들을 계기로 이를 조금 갈았다.)
다행히 마감직전에 한 사전등록의 혜택으로 교통비만 내고 박람회 구경을 하고 왔다. 자기 객관화가 잘 됐기 때문에 혼자 가는 것을 선택했다. 누구랑 같이 갔으면 내가 보고 싶은 만큼 보지 못하고, 돌아다니고 싶은 만큼 돌아다니지 못했을 게 뻔하다. 그리고 그런 호기심들을 충분히 충족하지 못했을 때 내가 느낄 짜증이나 거슬림은 다른 불만족스러운 상황들의 짜증이나 거슬림보다 좀 더 커서 잘 숨기지 못했을 것이다.
학여울역에서 내려서 다리를 건너면서 양재천 사진을 찍었다. 처음 와본 곳에 있으면 늘 여행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러던 중 취업했던 청년에게서 카톡이 와서 청년과 카톡 상담을 하면서 SETEC으로 걸어가는 길의 무료함을 달랬다. 근로장학생이라는 신분과, 적성에 맞는 근무지였던 덕에 안전하고 행복하게 일을 한 나와는 다르게 이 청년은 정말 울타리 밖 야생의 회사에서 많은 고초를 겪고 있는 모양이었다. 답을 제시하려는 잔소리꾼의 입을 틀어막고 공감하는 말만 했다. 그게 내가 요즘 이곳저곳에서 배운 것이다. 근데 가끔씩은 정말 그게 맞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분명히 예전에는 감언만 하는 간신배들 말고 고언, 직언하는 충신들도 곁에 두라는 말이 대세였던 것 같은데. 하지만 나도 감언을 통해 용기를 되찾았기 때문에 일단 그렇게 하고 있다.
도착하니 사람이 생각보다 아주 많진 않아서 좋았다. 최대한 오전 중으로 빨리 도착한 덕분인지 입장 줄도 짧았다. 앞에 3~4명 있었던 것 같다. 사전등록하고 받은 QR코드를 찍고 입장팔찌를 받았다. 신이 나서 이 팔찌는 밤에 샤워할 때까지 차고 있었다.
일단 입장해서 눈치를 보니 다들 시음을 하거나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 나도 시음하러 다녔다. 첫 부스는 굉장히 다양한 수제청을 하나하나 다 시음잔에 따라주시면서 설명까지 자세하게 해 주신 친절한 분이 계셨던 '달콤한 그녀'라는 곳이었다. 단 걸 좋아하는 내 입맛에는 너무 잘 맞았고 독특한 청도 꽤 있었는데 전부 맛있었다. 먹자마자 사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지갑사정과 쇼핑모멘텀에 대한 우려로 참았다. 집에 돌아와서 맛있었던 업체들 검색해 보다가는 살 걸 그랬다고 후회를 하긴 했다. 박람회라고 싸게 팔긴 하셨더라.
박람회는 위험하다! 아이템들이 즐비하기 때문에 창업이라는 소재를 타이쿤 관점에서 보게 만든다. 그냥 구경하러 갔다가 없던 창업 욕구까지 샘솟는 걸 느꼈다. 그리고 아무래도 사업자들한테 대는 물건들이어서 그런지 베이커리 쪽으로는 큰 감흥이 들지 않았다. 양산형과 냉동의 한계는 아직 극복 중인 것으로. 그리고 내가 아침을 먹는 학생 식당에 있는 카페에 납품하는 업체를 만나서 반가웠던 기억도 난다.
'어글리레몬'이라는 부스에서는 인스타 이벤트를 하길래 참여하고 시트러스 스무디를 받았다. 처음에는 이런 일들이 해보고 싶어도 할 줄 몰라서 못 했고, 그런 일들이 반복되는 것에 지쳐서 처음 용기를 냈었다. (누군가에게는 정말 하찮은) 첫 도전을 성공해 봤을 때부터는 같은 일에 아무런 감정적 어려움도 느끼지 않게 되었다. 그냥 이미 너덜너덜해진 개인정보 데이터를 제공하는 대가로 공짜로 뭘 얻어서 이득 본 감정만 드는 것이다. 이것도 크게 보면 바람직한 일은 아니긴 하다.
'장희도가'에서 먹은 세 가지 술 모두 맛있었다.
'유자발전소'에서 먹은 완도유자 음료베이스 맛있었다.
'달콤한그녀'에서 먹은 것 모두 맛있었다. 심지어 바질토마토 맛이나 민트맛도 맛있었다.
'헬레닉와인'에서 먹은 사모스 안테미스 맛있었다. 샀다, 현장에서. 빈두랑 같이. "이걸 5년 발효시키면 이거야~" 하면서 나눠 마시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룩아워티'에서 먹은 우바 홍차 살구향 티 베이스가 들어간 밀크티가 다른 티 베이스가 들어간 밀크티들보다 월등히 맛있었다. 속으로 '어 이거 맛있잖아?' 하고 다음 차례인 망고 얼그레이 티 베이스가 들어간 밀크티를 먹고 있는데 내 바로 뒷사람도 일행에게 "어 이거 맛있다."고 한 걸 보면 맛있긴 했나 보다. 홈카페 메뉴에 밀크티 배리에이션 용으로 사서 쓰면 좋을 것 같았다.
'셀플러스 스튜디오'에서 먹은 음료파우더로 만든 것들도 종류가 다양해서 재밌었고 레시피도 알려줘서 좋았다.
인터넷에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의 조합으로 만드는 음식이나 음료들도 많지만 저런 제품들 알아놨다가 필요할 때 활용하면 너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부작용은 카페에서 음료 사 먹을 때 원액이나 분말의 가격이 생각날 수 있다는 것이 있겠다.
아무리 작은 시음잔이라고 하더라도 15도짜리 와인이나 전통주를 계속 홀짝홀짝 마시니 미약한 취기가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다 헬레닉 와인과 맛짱(말린 대추, 견과류 취급) 앞을 지나갈 때 마주친 여자 둘이 흥이 오른 말투로 "안주다, 안주." 하면서 땅콩을 한쪽 손바닥에서 반대쪽 손으로 한 알씩 집어서 입에 넣고 있었다. 그걸 보고 정말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하면서 나도 시식 땅콩을 몇 개 집어서 입에 털어 넣었다. "안주다, 안주."라고 말하는 아무 가면도 쓰지 않은 고등학생 소녀 같은 말투, 친한 친구한테만 보여주는 잠옷바람같이 내추럴한 그 말투에 나도 친구로 끼고 싶어졌던 것 같기도 하다.
구경도 충분히 한 거 같고, 이젠 나도 내 친구들과 합류해도 될 것 같은 시간이 됐을 때쯤에 와인을 샀다. 와인이 포장된 상자를 오른손에 들고 서울무역전시컨벤션센터를 나와서 역으로 갔다. 정말 아주 즐겁고 유익한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