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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메, 대학 생활 단상

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 99번째

by 온호

룸메


문을 쾅 안 닫아서 좋고

의자를 빼놓고 안 다녀서 좋고

일찍 자서 좋고

일찍 일어나서 좋다

말을 잘 안 걸어서 좋고

내가 말을 걸면 그래도 웃을 줄 알아서도 좋다


냄새가 안 나서 좋다


쫓기는 것 같지도 않고

눈치 보지도 않고

자기 것을 분명히 하고 있어서 안정돼 있는 느낌이 나서 좋다


코를 작게 골아서 좋다.




며칠 전 아침이었다. 이번 룸메와의 생활에 내가 굉장히 만족하고 있다는 기쁨에, 뭐 때문에 그런 큰 만족감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 이유들을 하나씩 떠올려보며 저장글에다가 메모를 남겼다. 1번, 2번 룸메가 나를 힘들게 했던 것들을 하지 않는 점이 좋았나 보다.


새로 올 룸메에 대한 걱정을 적지 않게 했었다. 첫 번째 룸메, 두 번째 룸메와는 모두 갈등 없이 지냈고, 편한 부분도 많았지만 혼자 내적으로 힘든 부분도 많았다. 이번 세 번째 룸메는 어떻게 더 바랄 수 있을지 모를 정도로 라이프스타일과 성향이 잘 맞는다. 간절히 바라고 빌었던 덕분일까.


섬세하고 똑똑하다. 말 안 해도 센스가 있으면 알아서 보고 따라올 수 있도록 기숙사 생활 요령들을 몇 가지 흘렸더니 잘 주워서 따라오고 있다. 지시나 요구를 한다는 건 은연중에 위와 아래가 생기는 느낌이라 그 느낌을 불편해할까 봐 말하기가 어려운데, 다행이다. 그냥 보여주고 따라 하고. 서로서로 불편할 게 없다.


어제는 저녁 공부를 마치고 들어온 룸메에게 내가 추석 귀성과 관련해서 먼저 말을 걸어봤는데 그랬다가 사적인 이야기를 처음 하게 됐다. 본가는 어디인지, 전공은 무엇인지, 나이는 몇 살인지 등. 첫 번째와 두 번째 룸메와는 이런 이야기를 처음 만난 날, 마치 의무를 수행하는 것처럼 본 자리에서 모두 했었다. 나는 그런 일이 어쩌면 룸메들에게 나에 대한 어떤 인식을 심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이번에는 그러지 않아 보기로 했다. 결과가 어떻게 달라지나.


지금 상태는 아주 친밀하고 격 없는 사이까지는 아니지만 서로에 대해 불편할 것도 없는 좋은 사이다. 적당한 거리 덕분이든 차갑고 따뜻한 것의 비율 덕분이든 룸메도 기숙사 생활에 아주 만족하고 있는 걸 보니 내가 잘하고 있나 보다.

룸메는 나와 대화를 하면서 고학년 특유의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반존대를 쓰기도 했다. 나는 그게 나를 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이 느껴져서 좋았다. 내 가벼운 농담에 웃으면서 유쾌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리고 아마 본인이 휴학을 좀 했었던 것인지 나한테 "휴학은 안 하신 거죠? 군휴학 말고는?"하고 물어봐 오기도 했다. 휴학은 제적이 될 때까지 차고 넘치도록 했지만 그냥 "아니요, 좀 많이 했어요. 사실 저는 재입학이에요. 작년 2학기부터 다시 학교를 다니는 중이에요." 정도로만 이야기했다. 내 사정을 이야기한 것은 저게 전부다.


사연 있고, 속이 어두운 인간을 연상시킬만한 정보를 주기보다는, 그냥 지금 보이는 대로 웃으면서 직접 만든 레몬차를 권하는 붙임성 좋고 친절한 룸메이트로 지내고 싶었다. 그래서 내 나이를 물어볼 때도 호쾌하게 "비밀"이라고 했다. 그 바람에 나도 룸메의 나이를 물어볼 수 없었고 룸메도 굳이 자신이 몇 살인지 밝히지 않았지만, 몰라도 관계에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이게 더 나은 것 같다.


룸메는 자기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다가 재입학이라는 단어에는 생각보다 많이 놀란 것 같은 표정을 보였는데 그 모습도 잘 생겼었던 기억이 난다. 단순히 잘생긴 게 아니라 맑은 눈과, 선한 느낌이 나는 인상이 특히 좋은 것 같다.



대학생활 단상


1.

교양 건물 1층에서 경희극장 소속 배우를 봤다. ㅅ발음이 잘 안 되지만 애교 부리는 연기로 관객들의 웃음을 끌어냈던 키 큰 남자. 연극을 통해 얼굴을 알게 되자마자 우연히 학교에서 마주치는 일이 생긴 것이 신기했다. 근데 이런 일은 지난 학기에도 정말 많았다. 아마 내가 얼굴을 잘 알아봐서 그런 것 같다.


어제도 이런 일이 하나 또 있었다. 기숙사 1층에서 하늘색 케이블 니트 카라티와 흰 바지를 입은 사람을 봤었는데 몇 시간 있다가 <무대 위의 세상;연극, 오페라, 뮤지컬>이라는 교양 과목 강의실에서 만났다. 성악과라는 것을 추가로 알게 됐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이런 알아보는 일들은 모두 내가 혼자서 일방적으로 하는 것이다. 그래도 인식하게 되면, 만나는 일은 언제든 벌어진다. 신기하다.


2.

지난 학기에 팀플을 같이 했던 학생들을 한 강의에서 만나기도 했다. <마케팅 전략>에서 같은 조였던 두 명과, <리더십 개발>에서 같은 조였던 두 명을 <보험학원론>에서 만난 것이다. 내 뒷자리에서 나를 쿡쿡 찔러서 돌아보게 만들고는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던 그 열 살 차이 나는 학생들 덕분에 나는 밝은 대학생활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팀플 때 성실하게 하길 잘했구나, 친절하게 하길 잘했구나. 먼저 마음 열길 잘했구나.


3.

<무대 위의 세상;연극, 오페라, 뮤지컬>은 100% 이론 강의였는데 갑자기 공연 실습이 추가됐다. 교수님도 당황해하셨다. 예술을 감상하는 식견을 키워보자는 심산으로 신청한 강의인데 플레이어가 되어야 하는 것이 당황스러웠다. 드랍을 할지 말지 고민을 하다가 지난 학기에 <가창실기>도 A+를 받았으니까 그냥 감수하기로 했다. 얼마나 후회할지는 모르겠다. 끝에는 그래도 환희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걸 경험으로 안다.


4.

<경영세미나>라는 강좌명의 전공선택 과목에서도 재밌는 일이 있었다. 지난 학기 <경영특강>이었다가 이번 학기 <경영세미나로> 변경되면서 수잔나가 수강신청을 한 것이다. 수잔나는 지난 학기에 <경영특강>을 수강했기 때문에 당연히 동일 강좌(내용은 또래코칭으로 동일하다)일 때는 재수강 사유가 없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돼서 수잔나랑 한번 더 한 학기를 같이 보내게 되었다.


5.

도서관은 오후 5시까지 밖에 근무를 못한다. 유치원과 여러 가지 차이가 있다. 꿀인 곳일수록 학생들 근태가 불량해지기 때문인지, 출근부작성이나 업무기록 관리가 더 철저하다. 애초에 유치원은 근태가 불량해질 기회조차 없고.


5시에 퇴근을 하니 6시까지는 뭔가 여가시간으로 써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침 도서관 앞이라 산책길로 바로 연결되기도 했다. 그래서 오늘은 오후에 산책을 가봤다. 그랬더니 평화의 전당에서 GES(Game Esports Seoul) 행사를 하고 있었다. 이벤트에 참여해서 마법사 모자도 받고, 270g짜리 팝콘도 받고, 에너지드링크도 받았다. 우연히 아프리카 TV BJ를 바로 앞에서 보기도 했다. 다 처음 해보는 경험이라 재밌었다. 하지만 공짜 좋아하는 거지근성에 대해서 95년생에게 일갈을 듣기도 했고 매일 글을 쓰는 것이 중요하다는 노하우도 배웠기 때문에 얼른 경험 수집을 마무리하고 산책을 마저 했다.




그리고 제안하기가 왔다고 해서 메일을 확인하니 누군가 내 글을 읽고 따뜻한 말씀을 보내오신 일이 있었다.

배설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누군가에게는 반가운 글이 되었나 보다. 글을 쓴 보람까지 내가 느껴버려도 괜찮은 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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