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생명사랑 밤길 걷기

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 100번째

by 온호

내가 자살예방에 진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주말에 하는 프로그램에만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참가한 것이다. 오히려 나는 누군가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마감하길 간절히 원한다면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방금까지.


"나는 것을 선택할 순 없었지만 가는 것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의 존엄이다."


매일같이 죽는 것 말고는 다른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던 시기에 내가 만든 말이다. 나는 당시 내 고뇌를 한 줄로 정리했던 저 문장을 퍽 마음에 들어 했다.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줬으니까.


글을 쓰면서 문장에 ctrl+B를 해놓고, AI는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져서 질문란에 복사 붙여 넣기를 했다. 그리고 AI가 제시한 답변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이 문장은 인간의 삶과 선택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각 부분을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1. "나는 것을 선택할 순 없었지만"

- 이는 우리가 태어나는 환경, 시간, 장소, 부모 등을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 우리의 출생과 초기 환경은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결정됩니다.

2. "가는 것은 선택할 수 있다"

- 반면, 우리의 인생 방향, 결정, 행동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 이는 우리가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지고 방향을 정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졌다는 뜻입니다.

3. "인간의 존엄"

- 이 선택의 자유가 바로 인간의 존엄성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라고 말합니다.

- 환경이나 운명에 구속되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을 존엄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 문장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습니다:

1. 자유의지의 중요성: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2. 책임의 중요성: 우리의 선택은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하므로, 그에 따른 책임이 따릅니다.

3. 개인의 가치: 각 개인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모든 인간은 존엄합니다.

4. 극복과 성장: 출발점은 선택할 수 없어도, 그 이후의 여정은 우리가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문장은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의 자유를 인식하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지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다운 삶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난 단 한 번도 "가는 것"을 삶을 떠나는 것이 아닌 삶을 사는 것으로 생각했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충격을 받았다. AI의 답변을 보고 내가 만든 문장을 새로운 관점에서 다시 읽어보니 그렇게 읽는 게 더 타당한 것 같았다.


이번엔 "가는 것"이 자살의 의미일 때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물었다. 그러자,


1. 철학적 관점: 자살을 최후의 자유 선택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일부 철학자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철학적, 윤리적 전통은 생명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여기며 자살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2. 윤리적 고려: 자살은 개인의 선택이지만 그 영향은 가족, 친구, 사회 전체에 미치며 따라서 순수한 개인의 선택으로만 볼 수 없는 복잡한 윤리적 문제를 내포합니다.


3. 심리학적 관점: 대부분의 자살 충동은 일시적이며, 정신 건강 문제나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과 연관됩니다. 이는 "선택"이라기보다는 도움이 필요한 위기 상황으로 볼 수 있습니다.


4. 존엄성에 대한 재고: 인간의 존엄성은 생명 그 자체에 내재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삶을 지속하며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더 큰 존엄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라고 한다. 울림이 있다. AI는 이미 영성을 갖췄다고 생각한다는 내 주장도 이런 부분들에 근거하고 있다.


나는 대한민국 탑게이 홍석천이 자살과 관련해 했던 이야기를 몇 년 동안 기억하고 있다. 커밍아웃 후 모든 걸 잃고 가족들에게도 이해받지 못해 한강에서 뛰어내리려 갔던 그는 전 연인과의 통화로 생각을 고쳐먹었다고 했다. 마포대교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똥이 마려워서 급하게 화장실을 찾아 해결을 했더니 자기도 모르게 '아, 살 것 같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어쩌면 인간은 똥 마려울 때 제때 똥만 싸도 살아갈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사람은 선택할 수 있다. 모든 희망적인 말들을 들을 때는 자신을 가르치려는 말이나 상대의 우월감, 위선으로 들을 것인지 아니면 나를 향한 사랑이 담긴 위로로 들을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 그것들은 대게 섞여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자신이 선택해서 받아들인 부분이 모두 진실이 될 수 있다.


요즘 『사랑의 쓸모』라는 책을 읽었다. 작가가 스피노자의『에티카』에서 인용한 부분이 있다.

"증오는 증오의 보복에 의하여 증대되고 반대로 사랑에 의하여 제거될 수 있다. 사랑에 의하여 완전히 정복된 증오는 사랑으로 변한다. 그리고 사랑은 이전에 증오가 없었던 경우보다 한층 더 크다."


'내가 내 태어남과 삶을 증오했던 것이 내가 내 삶을 더 크게 사랑할 수 있게 해 준 셈이구나.'


그도 그런 게, '살아있어서 좋다.'라는 생각을 해본 것은 평생 살면서 요즘이 처음이다.


그러니까 선택하시라. 무얼 볼 것인지. 저쪽 진영에 설 것인지, 이쪽 진영에 설 것인지. 여기 진영에 있는 것은 의외로 속 편한 일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내 계급은 갓 전입 온 이등병이기 때문에 동기들이 많이 필요하기도 하고, 항상 수적 열세로 고생하는 진영인만큼 전우가 많아질수록 좋다.


아무 생각도 없이 참여했던 행사에서 많은 의미를 찾았다.



10대 청소년 자살률 10만 명당 7.2명

대한민국 하루 평균 자살 사망자수 35.4명




쳐다보니까 쓰다듬으라고 처음으로 다가와 준 고양이에게,

영화교환권 소모에 일조해 주신 두 분에게,

영화 보러 같이 못 가서 미안했는지 간식을 제공해 주신 분에게,

처음 만난 나에게도 숨 쉬듯 따뜻한 말을 해주는 초능력을 가진 분에게,

나를 성장시켜 주는 분에게


감사한 하루였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룸메, 대학 생활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