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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세상이 찬란하더라니

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 101번째

by 온호

"유소견"


건강 검진 결과 흉부 엑스레이에서 유소견이 나왔지만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기침을 하고 있던 때에 검사를 받아서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래도 난생처음 해보는 건강검진을 제대로 즐겨보고 싶기도 했고, 혹시 모르니까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자 싶기도 해서 결과 상담을 받으러 갔다. 상담이 끝나고 컴퓨터 단층 촬영(computerized tomography)을 했다. 그리고 오늘 건강관리협회에서 전화가 왔다.


"CT에서도 유소견이 나와서요, 결과 상담을 받으러 와보시겠어요? 예약 가능한 날짜가..."


나는 안내받은 두 날짜 중에서 가장 가깝고 가능한 날짜인 21일 토요일 오전으로 예약을 했다.


전화를 끊고 다음 강의를 위해 이동을 하면서 혹시 큰 병일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언젠가 의사한테 "약이 안 들으면 대학 병원에 가야 한다."는 말을 들었던 때처럼 겁을 먹었다. 그때는 약이 들었고 대학 병원 갈 일 없이 해프닝으로 마무리가 됐었다.


'어쩐지 전에 없이 온 세상이 아름답고 찬란하더라니. 사람은 죽기 전에야 변한다더니 내가 죽을 때가 돼서 변했던 게로구나.' 하고 한 명이 청승을 떨었다.


'그때처럼 해프닝으로 지나갈 거야.' 다른 한 명이 어깨를 쓰다듬으며 안심시켜 줬다.


찝찝한 마음으로 강의를 듣고 나서, 학교 서점에서 사야 하는 교재를 두 권 샀다. 66,000원. 이게 대학 다니는 맛이지. 14년 전과 달리 교과서를 살 일이 거의 없었던 요즘, 오랜만에 쓴 맛을 봤다. 심각한 폐병이라면 그깟 교과서 값이 무슨 대수일까.


책을 사고 기숙사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지나가는 길에 있는 노천극장 농구장에 갔다. 며칠 전부터 코트에 농구공 두세 개가 비치되어 있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심각한 폐병이라면 좋아하는 공놀이로 시간 좀 낭비하는 게 무슨 대수일까.


작년 12월에 10년 만에 한 농구에 이어 다시 9개월 만에 하는 농구다. 혼자 가볍게 영점이나 잡아보다가 들어가려고 하이포스트에서 슛을 좀 쏘고 있는데 갑자기 하프코트 3대 3을 하게 됐다. 15분 뛰었는데 죽을 것 같았다. 심각한 폐병이라면 농구하다가 한 번쯤 졸도해 보는 게 무슨 대수일까.


'뭐가 대수냐. 뭐가 대수냐. 이렇든 저렇든 뭐가 대수냐. 그냥 해버려라.'


나는 귀엽다. 기관지 확장증 가지고 이렇게 청승을 떨 수 있다니 말이다.





『사랑의 쓸모』를 다 읽고 독서 기록까지 한 다음 읽기 시작한 『노인과 바다』를 오늘 다 읽었다. 의지. 불굴의 의지. 그리고 받아들이는 것.


브런치글도 10개 정도 읽었다. 한 작가분의 7개의 글과, 구독되어 있는 다른 작가분들의 새로 올라온 글을 3개 정도 읽었다. 저번 금요일 강의에서 미얀마 학생들이랑 팀이 됐더니 미얀마라는 단어가 눈에 잘 들어왔다. 세상은 늘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어제 이불을 세탁한 덕에 포근함 최대치인 침대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글을 읽으며 쉬었다.


좀 쉬고 나선 스픽을 하고, 『안나 카레니나』를 읽었다. 작년에 독서를 시작했을 때와 다르게 요즘은 고전에 집중하고 있다. 난 이제 내 두려움이 무엇인지 안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 남들이 아는 것을 모른다는 것,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면서도 그것을 하지 않는 것. 그래서 지금은 문학에 집중하고 있다.


토요일에는 늦을까봐 역으로 뛰어가다가 가창실기 팀원이랑 수잔나를 만났었지. 횡단보도 앞에서 한 명, 개찰구 앞에서 한 명. 뛰었기 때문에 만난 거라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세상은 늘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아, 그리고 내년에는 생명사랑 밤길 걷기 자살예방 캠페인에 35.4km로 참가할 것이다. 또, 100번째 글의 소재가 우연히 그렇게 된 것도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 때문이다. 참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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