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숙사 세탁실에서 건조기 먼지망을 비울 때마다 늘 떠오르는 순간이 있다. 먼지망을 꺼냈을 때 먼지가 없었던 순간이다. 나는 작은 번거로움을 면피하게 되어서 즐거웠던 순간, 동시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앞서 건조기를 사용했던 사람이 먼지망 속 먼지를 긁어모아 버리고 갔다는 것이니까.
그건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내 앞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앞사람이 사용해서 생긴 먼지를 버린 후 사용한다. 그리고 자신이 사용해서 생긴 먼지는 뒷사람에게 맡긴다. 기숙사 세탁실의 풍습은 그게 당연한 것이었다.
먼지망을 비워준 그 배려에 나는 너무나도 편했다. 먼지망을 비우지 않고 바로 빨래를 말릴 수 있다니. 감동을 받았던 나는 그 후로 그 사람을 따라 하고 있다. 건조기 사용 전과 후로 두 번 먼지를 긁어내야 하지만 내 뒷사람은 귀찮은 일을 한 번 면하는 기쁨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무심한 남학생들이 먼지망이 비워져 있는 일을 얼마나 알아차릴는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그러다 보면 지금과 순서가 바뀌어서, 자신이 사용한 후에 먼지망을 비우고 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풍습이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2. 팀플
지난 학기 <리더십개발> 같은 조였던 학생이 <보험학원론> 강의가 마치고 나가는 길에 팀플을 같이 하자고 제안해 왔다. 아직 팀 구성하는 시기가 아닌데도 미리 간택받아서 기뻤고, 이 일이 내가 믿을만한 팀원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것이라고 여겨져서 기뻤다. 그러고 보니 교수님의 프라이빗 공간에서 같이 와인까지 마셨던 사이이기도 하다.
금요일 빼고 매일 보는 지난 학기 팀원도 있다. 2000년생인데 붙임성이 꽤 좋아서 내가 초고학번인 것을 아는데도 옆자리에 와서 앉기도 한다. 한 번은 이야기를 나누다 이 분이 나에게 "배움에 나이가 어딨겠습니까." 하고 말을 해서 나는 "어린 대학생들이 지금처럼 좋은 얘기를 많이 해줘서 학교 다니는데 도움이 많이 됐다."고 그랬다. 그랬더니 "지난 학기에 워낙 하드캐리 하셔가지고 나쁜 소리 나올 게 없죠." 하고 속 보이는 말을 했다.
내가 하드캐리까지 한 것은 몰랐기 때문에 그 말에 기분이 좋아졌다. 근데 그 하드캐리라는 것을 하는 동안 받은 스트레스로 나는 처음으로 10원짜리 욕을 여과 없이 글로 남겼었기 때문에, 마음 한 구석에서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3. 보이는 사람
도서관에서 같은 시간에 일하면서 알게 된 여학생이 <무대 위의 세상> 강의실로 들어올 때 그 여학생은 보이는 사람이 되었다. 보이지 않는 사람은 무채색이거나 배경같이 느껴지는 사람이고, 보이는 사람은 무언가 내가 가진 다른 정보와 결부시켜 인식되는 사람이다. 이런 현상이 반복되는 것이 나는 재밌다.
지난 학기 <투자론>에서 늘 모바일 게임을 하던 키 큰 남학생과 오늘 <경영세미나, 또래코칭>에서 대화를 하게 됐다. 한 학기 동안 중국인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한국인이었다. 축구를 좋아하고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나이도 나와 6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하프라이프 알릭스라는 VR FPS 게임을 사기 위해 돈을 모으고 있는 것이 요즘 생활의 활력소가 되고 있다고 했다.
지난 학기 <가창실기>에서 엄청난 존재감을 드러내던 남학생은 <무대 위의 세상> 수업에서도 비슷했다.
사람들은, 내가 보는 세상을 이루고 있는 하나하나의 픽셀들인 것 같다. 그들은 또 리버시 게임의 돌 같은 것들이어서, 인연을 통해 불투명한 면에서 선명한 면으로 뒤집히고 나면 내가 보는 세상은 그만큼 고해상도가 된다. 너무 신기하고 즐거운 일이다.
4. 도서 배가 및 서가 정리
도서관에서는 2주일을 주기로 담당 서가를 배정해 준다. 담당 서가에 꽂힌 책들이 청구기호에 맞게 정배열되어 있는지 확인하는 작업을 매일하고 있다. 그러다 알게 된 정말 신기한 것이 있다. 오류가 있는 부분은 어떻게든 티가 난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모든 순서가 틀리게 꽂힌 책을 놓치지 않고 한 번에 잡아내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잘못 꽂힌 책들은 왠지 모르게 정말 하나같이, 숙제를 안 해와서 쭈뼛거리는 초등학생들처럼 자신감 없고 불안한 모습으로 꽂혀있다. 나는 어쩌면 그게 책을 꽂아둔 사람의 심리를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아, 그리고 아예 북엔드 바깥쪽에 서있는 애들은 오히려 반갑다. 숙제를 안 해왔지만 손 들고 큰 목소리로 인정하는 당당한 녀석들 같다.
5. 구토
나이를 먹고 대학을 다니는 것은 어느 면에서는 좋은 효과가 있다. 같은 대학생들에게 관대해지기가 쉽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기숙사 엘리베이터 한 대가 토사물로 인해 운행이 중단된 경우에는 짜증이 날 법한데도 토한 학생을 생각하며 '청춘을 만끽 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농구 코트에 공이 생겼다. 덕분에 마음대로 농구를 할 수 있게 됐다. 오른쪽은 도서관 2층과 3층 사이
밖에서 본 도서관과 안에서 나갈 때 도서관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각종 행사들. 수업시간과 겹쳐서 심채경 박사님 독서 토론회에 가지 못하는 것이 너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