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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성, 추석, 가족, 생각

조카가 자는 틈을 타서

by 온호

1. 병

병자가 되어보는 것은 처음이라 심각한 병이 아님에도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두려우면서도 동시에 무언가를 처음 경험해 본다는 것에 신이 나서 들떴고 또 기쁘기도 했다. 왜냐면 사람은 경험해 본 것에만 공감할 수 있기 때문에, 어쩌면 이 일로 내가 앞으로 병자에게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너무 알량하다. 너무 알량해서 이런 것을 생각만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말로 한다는 것이 죄스럽기까지 하지만 그게 날 기분 좋게 만들어준 것이 사실이다.


나는 병자에게 공감할 수 없는 사람이다. 스물넷 때 암환자들과 관련된 봉사활동을 했을 때도 그랬다. 가장 강력한 어둠이 그들을 덮친 순간에 역설적으로 가장 빛나는 빛을 품은 그들을 보면서 어쩐지 아름답다고 느꼈고, 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나 했을 뿐이다. 그러한 성정이 지금도 크게 나아지진 않아서 '아, 그게 역설은 아니구나, 원래 캄캄할수록 빛이 잘 보이지.' 하는 생각이나 하고 있다. 병을 다 앓고 나면 이런 부분이 조금 나아질까 기대해 본다.


왼쪽 아랫가슴이 쿡쿡 쑤시고 마사지를 하고 싶은 답답함이 느껴지지만 마사지를 해보려 해도 얄팍한 가죽만 잡혀서 별 수가 없는 상태로 지낸 지가 며칠 되었다.


2. 주일성수

가족들을 교회에 태워다 주기 위해 운전석에 앉아있었다. 둘째 누나는 조카가 배고파서 교회에서 투정 부릴까 봐 걱정이 됐는지 편의점에서 먹을 걸 좀 사서 가게 해 달라고 했다. 아빠는 그 말을 듣고 집에 빵을 사놨는데 어째서 누나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행동을 하는지 불편해했다. 그리고 누나에게 한마디 했지만, 늘 의무처럼 아빠의 반대편에 서는 엄마가 옆에서 누나 편을 들었다. 시대가 변하는 것이고 그것이 진리의 문제는 아니지 않냐고 했다. 아빠는 진리의 문제라고 가슴속 깊은 곳에서 끌려 올라온 열정 혹은 노기가 섞인 목소리로 단호하게 응수했다. 율법주의자가 되지 말라는 뜻에서 하는 말을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경시하는 태도의 핑곗거리로 삼는 세태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아빠가 예전과 달리 이런 문제에 대해 길게 개탄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쟁은 다행히 부싯깃 없이 부싯돌로 불꽃만 튀기다 만 것처럼 힘없이 끝났다. 아빠는 늙은 것일까. 현명해진 것일까. 세상을 포기한 것일까. 자신을 포기한 것일까. 일요일에 돈 쓸 수 없기 때문에 불편하고, 그 규칙을 몰래 어길 때마다 찾아오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살았던 어린 시절을 가진 나로서는 아빠의 편을 들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엄마나 누나의 편을 들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성경의 현대적 해석이나 적용이라는 그럴듯한 포장 아래에는 결국 자기들한테 쉽고 편한 대로 취하고 싶을 뿐으로 보이는 기독교인들이나, 그에 영합하는 목회자들이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차에 혼자 남는 나를 바라보다 하고 싶은 말을 참고 가족들과 교회로 들어서는 은퇴 목사인 아빠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여 나는 미안하고, 마음이 조금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그래도 내가 하나님을 믿는 문제를 이 감정 때문에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작아진 등을 향해 혼잣말을 했다.


부모님의 인생을 부정하는 소신을 가진다는 것이 너무나 힘에 겨워서 불과 얼마 전까지 교회로 돌아갈만한 연을 만들어보려고도 했지만 잘 되지 못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기는커녕 그리스도의 발톱 때냄새나 풍길 줄 알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뿐이었다. 오 주여.


3. 유럽식 아침식사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아침을 먹으면서 유럽식 아침 식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식탁에는 빵, 치즈, 집 근처 농가에서 재배한 과일들과 그 과일들을 재료를 해서 불과 하루 전에 직접 만든 과일잼이 있었다. 무언가의 산지에 사는 것의 특권은 서울에서 먹는 것보다 훨씬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다는 점인 것 같다. 이런 말은 주로 현 유통시스템에 환멸을 느끼거나, 자신의 생산물에 자부심이 넘쳐서 도시의 상품을 무시하기를 숨기지 않는 농부들이 자주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게 현실이었다. 도대체 '상품성'이라는 것의 기준이 뭐길래 백화점에서 훨씬 비싸게 파는 복숭아며 자두, 샤인머스켓이 그렇게 맛이 없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하여간 여기서 먹는 과일은 정말 놀랍도록 달고 맛있다.


4. 초코파이똥쿠키 레시피

2년 전쯤이었던 것 같다. 초코파이의 식감을 좋아하지 않는데 초코파이를 먹기 위해서 초코파이 똥을 만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거 구우면 쿠키가 될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그래서 구워봤고, 구워졌다. 그 후로 조카들과 명절을 보낼 때마다 체험학습 명분으로 조카들과 같이 만들어 먹으면서 몇 번의 호작질을 반복했다. 나중에 이미 이짓거리가 레시피화 되어있다는 것을 알고 나 같은 사람이 한둘이 아닌 것에 안심하기도 했다.


예배를 마치고 나온 가족들을 태우고 집으로 돌아와서 편의점에 들렀다. 점심 먹고 먹을 디저트를 사려고 했지만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그때 '초코파이하우스'라고 언젠가부터 보이는 초코파이 신상품이 눈에 들어왔다. 마음에 드는 게 없으면 만들면 된다. 이번엔 저걸로 한 번 만들어보자 싶었다. 그리고 결과가 아주 샤브레 같은 식감의 쿠키로 잘 만들어져서 흡족했기 때문에 까먹기 전에 기록을 해본다.


초코파이하우스 낱개 9개를 까서 볼에 담고 으깬다. (12개입을 사서 1개는 오리지널 초코파이랑 뭐가 다른지 맛을 보는데 썼고, 2개는 쿠키가 망하면 먹으려고 남겨놨다.)

우유를 적당히 조금 넣고 반죽한다. 밥숟가락으로 따지면 6~7스푼 정도 되려나. 반죽(?)을 주무르다 보면 우유는 생각보다 모든 빵에 퍼져 스며들기 때문에 처음에 많이 부으면 위험하다. 굽는데 시간도 많이 걸리고.

원하는 식감을 상상하며 크기와 두께를 조절하여 성형한다. 두꺼우면 안이 촉촉, 얇으면 바삭.

오븐 180°C 예열 10분, 집어넣고 190°C에서 20분, 180°C에서 5분

꺼내서 식힌다.


오리지널 초코파이로 만들었을 때보다 더 맛있었다. 그리고 오리지널 초코파이똥쿠키에는 견과류를 넣는다든지 초코칩을 넣는다든지 반죽에 버터를 넣는다든지 여러 배리에이션을 줘봤지만 완성이 되면 어떻게든 그냥 익숙한 초코파이맛이 나는 쿠키가 될 뿐이었다. 아마 반죽에 스리라차마요소스 정도는 넣어야 맛이 달라질 것 같았다. 그런데 초코파이하우스똥쿠키는 평범하게 많이 달달한 초코쿠키 같아서 배리에이션을 주면 잘 융화가 될 것 같은 맛이었다.


5. 집으로 내려가는 길

고속버스에서 잠도 두 번이나 자고 책도 읽었다. 여행길 처음과 끝에 잠이 들었더니 집에 빨리 도착한 느낌이 들어서 아주 수월했다. 휴게소에는 스트레칭도 하고 바람도 쐴 겸 잠깐 나왔다. 터미널에 도착해서는 마중 나온 아버지와 여느 사랑하는 관계의 부자들처럼 평범하고 화목한 인사를 나눴다. 집으로 들어갈 때는 아빠가 가져온 차를 내가 운전해서 들어가면 된다는 것을 이번엔 까먹지 않았다.


6. 둘째 누나

일주일 뒤면 겨우 만 3살이 되는 아이가 집에 있는데도 여태 제대로 구색 갖춘 구급상자 하나 마련해놓지 않고 살 정도로 체계 없는 누나 주제에 내 신변의 변화만은 귀신같이 감지했다. 자존심도 상하고 어이가 없으면서도 그게 너무 웃기고 재밌었다.




이 정도면 사람들이 빌어준대로 행복한 한가위라고 부르기에 충분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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