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만의 거대하고 추한착각일 것이라는 불안한 가능성을 분명하게 확인한 것이 처음에는 후련했지만, 억지로 찾아낸 감사를 전하다 울 뻔했던 순간에는 내 본심을 깨닫고 고통스러웠다.
상대는 결과를 통해(시체를 한 구 늘리고 나서야) 안다고 말했지만 나는 주변에서 과정을 보면서 알았다. 상대 주위에는 늘 시체들이 보였다. 나도 곧 그 시체들 중에 하나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멍청하고 약한 가젤을 자처했다. 승낙을 받는 환상이 현실을 왜곡해서, 거절을 당하면 괴로운 고민의 끝을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로 그렇게 했다.
아마 과정 단계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그 일종의 불감증을 만들어내는 정신적 기질이 그녀가 가진 봉긋한 이마나 맑은 피부, 완벽한 얼굴형 같은 것들보다도 훨씬 무서운 무기이자 매력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런 계산을 하면서도 나 역시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포기하고 뛰어들었다.
내가 내민 목덜미를 강력한 턱으로 무심하고도 당연하게, 그리고 자연의 법칙처럼 순수하게 물고 흔들어 내 숨통을 끊어놓는 포식자의 잔인한 처사에는 일순 상대가 싫었다. 그러면서도 내 목덜미에 박혀있는 그 이빨들의 감촉과, 턱이 목을 틀어잡고 있는 강한 압박감마저 달콤하게 느껴져 좋았다. 심지어 흐르는 내 피 냄새까지. 미친놈.
그토록 바라고 원했던, 다른 사람들에게는 종종 보여주던 친밀함을 나는 목숨을 바친 대가로 얻게 되었지만 물색없이 그게 또 기뻤다. 목숨이란 건 사실 아마 자존심일 뿐이겠지만 목숨 같았나 보다. 아니면 부족한 자존감이었을 수도 있고. 그나마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된 후에야 나보다 남을 사랑하고 너무 원해서 나를 포기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된 것이 아이러니일지 어떨지.
어디가 단단히 고장 나있어서 척만 하고, 그때그때 역할에 따라 연기하는, 진짜는 없는 인간인가 싶어 어릴 때부터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이번 일을 계기로 그건 아니란 걸 알아서 마음이 놓였다. 나는 정말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그냥 그만한 사람을 못 만났었나 보다 하는 생각을 한다. 이만해도 운이 좋았고 감사할 만하다.
"착각, 착각."
상대의 입으로 나온 그 단어를 듣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꿈에서 깼다. 꿈결에 뱉은,사람 소리가 아닌 것 같은 부정확한 웅얼거림이 너무 징그럽거나 우스꽝스럽거나 혹은 추하지 않았길. 아니다, 그랬어도 괜찮다.
1년 동안 너무 많은 것이 변하면서 글도 많이 변했다. 나라는 인간은 다행히 좋게 변했지만 글은 썩 안 좋은 방향으로 변했다고 느끼고 있었고 그래서 처음으로 진지한 피드백을 받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문제인식을 할 때는 안 그러는 게 나은 대화법인 줄 알면서도 "나도 안다."는 말을 연신했다. 왜냐면 내가 느끼는 두 가지 지점들을 너무 정확하게 집어서 절절한 공감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말을 하면서 동시에 후회도 같이 했다. 너도 알고 나도 안다는 건 그만큼 문제가 분명하다는 거니까. 대화술은 앞으로 훈련을 하면 좀 나아지겠지.
알긴 뭘 알아. 나는 해결책에 대해서는 전혀 떠올려보지 못했다. 이번에 감사하게도 도움이 될 방법들을 들을 수 있었다. 참 귀하다. 달라진 상황에 맞게 다르게 써볼 것. 덜 것. 솔직할 것. 그리고 예전에 글을 쓰던 느낌에 대해서 다시 고민해 봤다.
그래도 아마 새벽에 룸메의 역겨운 코골이와 내 불안에 고통받으며 쓰던 글과 이젠 그 시간에 꿀잠을 자거나 운동을 하는 내가 쓰는 글은 앞으로도 계속 다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오늘 하루정도는 새벽에 깬 김에 예전처럼, 룸메를 깨우지 않게 조심하면서 키보드를 소심하게 누른 글을 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