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과는 1학년이 200명 정도 되기 때문에 친구를 사귀려면 전공 동아리 5개 정도 중에서 한 두 개를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개강 전 오리엔테이션에서도 그걸 권장하고, 동아리 가입 프로그램이 따로 이루어졌다.
나는 동아리 홍보 시간에 통찰력 있는 스피치를 했던 회장형을 쫓아서 동아리 가입을 했다. 그리고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가장 친한 친구 그룹이 생겼다. 고시원에 살던 친구, 통학하던 친구, 신축 오피스텔에서 살던 친구 등 다양했다. 그리고 "너는 어디 사냐"는 질문을 들을 때마다 나는 학교 오는데 1시간 걸리는 청파동에서 자취를 한다고 했다. 이 걸 몇 번 반복한 후부터는 동기들에게 다시 알릴 필요가 없어졌지만, 제각기 다른 선배들과 친해질 때마다 이 질문에 늘 다시 답을 하곤 해야 했다.
이 때는 '나도 지방에서 올라온 녀석답게 평범하게 기숙사에 살거나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거나 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왜 자취를 그렇게 멀리서 하냐고 하는 질문에 좀 이골이 났던 것이다. 우리 집은 6남매고 이미 내 위에서 네 명이나 고향 집을 떠나 학교 다니면서 살 집을 구해야 했는데 당연히 내가 학교 근처에 또 집을 얻을 형편은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누나가 숙대에 다니면서 살게 된 반지하 집에서 같이 살면서 통학을 했다. "누나가 숙대 살아서 거기서 같이 산다."는 동아리 사람들은 들어봤자 신경도 쓰지 않을 평범한 말인데 나는 이 말을 할 때마다 속으로 부끄러웠다. 자식이 한 두 명 있는 집의 아이들처럼 평범하게 부모님의 지원을 받으며 학교 생활하는 대학생이고 싶었다. 또 부모님이 좀 가난하시더라도 평범하게 가난했으면 싶었다. 수입이 적어서 가난한 게 아니라 수입 자체가 없고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는 형태인 것도 싫었다.
대학생 때 처음으로 현실적인 부분을 직시할 시간이 찾아왔다. 그전까진 그냥 교복 입고 학교 다니면서 공부하고 공놀이만 하면 그만이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현실을 마주 볼 시간을 참 늦게 가졌다. 보호를 너무 오래 받았던 것 같다. 빨리 노출되고 터놓고 이야기하면서 이겨낼 시간을 가졌어도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있다.
대학교를 가서 학자금 대출을 받는 과정에서 등본을 떼고 소득분위를 계산하고 하면서 사실 이곳에 나보다 가난한 학생은 거의 없다는 걸 알게 됐다. 그동안은 교회 분들이 알음알음 식자재를 잘 챙겨주셨던 덕분에 형편에 비해 잘 먹고살았고, 삶의 질의 주요 축 중 하나인 식생활에서 나름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느라 체감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나는 없는 살림에 자신을 도와주느라 등골이 휘는 부모님을 둔 친구들처럼 나도 평범하게 고통받고 싶었다. 부모님에게 미안할 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대학 다니면서 아무것도 받는 것이 없었다. 차라리 부모님이 없어서 처음부터 기대할 것도, 의지할 구석도 없이 외로운 게 낫겠다고도 생각했다. 있는데 없는 거랑 같으니까 더 힘든 것 아니냐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들으면 돌을 던질 말이겠지만 이 당시에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동아리 친구들은 대부분 잘 살았다. 과 특성상 부모님이 사업하는 분들도 꽤 있었다. 그런 친구들은 가끔 싼 걸 먹겠다며 학식을 먹는데 나는 그런 학식조차도 부담스러웠다. 나는 당연히 용돈 자체가 없었고 생활비 대출을 받아서 생활하다 보니 유흥은커녕 고정비라고 볼 수 있는 식비 지출부터 관리하는 것이 중요했다. 나는 편의점에서 포만감이라는 속성을 기준으로 구매결정을 내리곤 했다.
그러다보니 늘 친구들과 지내는 데는 어려움이 없던 내 인생이 대학을 오고부터는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친구와의 시간에는 '돈'이 필요했고 친구 만나는 것이 부담되기 시작한 것이다. 같이 밥을 먹는 것이, 같이 술을 마시는 것이, 같이 당구를 치는 것이, 같이 놀러 다니는 것이, 같이 쇼핑하는 것이 모두 돈을 요구했다. 나는 이 과정에서 속만 썩였다. 내 사정이 이러해서 부담이 된다는 이야기를 할 배짱이나 자존감이 없었다.
학교를 다니면 나 같은 사람들이 종종 보이곤 한다. 그들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서둘러 강의실을 빠져나와 알바를 하러 가기도 할 것이고, 편의점에서 신중히 가격 대비 칼로리가 높은 제품을 찾기도 할 것이다. 부모님이 꼭 가난해서가 아니더라도 본인들의 의사로, 혹은 부모님의 뜻으로 지원받지 않고 생활하느라 그러는 학생들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애들이 지닌 멘탈이 지금도 내 이상형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이다. 나는 그렇게 강인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후로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었다가 깨어났다고 속 편하게 생각하기에는 현실은 내가 나약했다는 것이 모든 원인이다. 그래도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후회도 10년 하니 지겨워서 못 하겠다.
요즘은 그래도 학식도 세트 메뉴로 잘 먹고, 사 먹기도 잘 사 먹고 다닌다. 아무래도 어릴 때처럼 먹을 걸로 아끼다가는 몸이 축날 것 같기도 하고 대신 옷이나 신발 같은 걸 덜 사게 된 것 같다. 신경 쓰이는 동기도 선후배도 없는 생활이다 보니.
학자금 대출도 생각보다 건실하게 잘 갚으면서 생활하고 있고, 밥도 잘 먹고 다니고 공부도, 학교 생활도 나름 즐겁게 하고 있다. 여가 시간에 소소하게 글도 쓰면서 세상과 작은 소통도 하고. 졸업하고 일만 잘 구하면 어찌어찌 될 것 같다. 인생 곡선 타는 시기가 뒤쳐졌긴 했지만 앞으로 만큼은 꽤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다행이다.